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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청주/수원] “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조회수 | 907
작성일 | 15.11.23
[부산] “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하고 입을 여십니다. 초세기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세기 신앙인들은 기꺼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응했고 믿음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내어 놓았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신앙 선조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고 그분의 뒤를 이어 기꺼이 순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고통과 시련과 박해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간이 흐르고 과학문명이 발전하고 더불어 점점 개인화 되어가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듯 보입니다. 우리는 분명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박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신적인 박해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을 따르는 제자라 해서 손을 대어 물리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것보다 더 무서운 박해, 곧 냉소와 무관심으로 우리는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귀를 막고 또 우리들의 입을 막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암암리에 부정하도록 부추깁니다. 또한 여전히 물질만능이라는 바알신을 숭배하는 세상의 논리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논리는 무관심과 냉대를 부추김으로써 부자와 빈자라는 양극화의 박해를 가하고,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빈민국의 어린이들과 선진국의 소아비만이라는 양극화의 박해를 가하고, 시장의 원칙이라는 빛좋은 개살구를 가장해 중소기업을 죽이고 대기업이 독점하는 박해를 가하고, 정규직과 비규정직의 양극화의 박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이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고 있긴 하지만 때로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녀에게 바알의 논리, 세상의 논리를 앞세우곤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치와 논리인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기 보다는 “좋은 게 좋은 것 아니야?, 머니 머니해도 돈이 최고야! 무조건 1등을 해라!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고 부추기는 박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나만, 내 가족만 잘 산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예수는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야! 신앙은 내가 잘되고 또 여유가 있을 때 지켜지는 것이 아니냐?” 하며 박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지난 과거의 물리적인 박해보다 더 무서운 박해인 정신적인 박해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이 듭니다. 저의 주장처럼 우리는 정말 박해받고 있다고 애청자 여러분은 생각하고 있으십니까? 제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러한 박해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육체가 공격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공격을 받고 있기에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체의 예로 들자면 영혼은 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이 병들었을 때 그 증상이 쉬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이처럼 서서히 병들고 있음을 인정합시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영혼을 세상과 바알의 논리에 맡겨버린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그 박해 속에서 주님을 영원히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인내하며 박해에 대항합시다. 시대의 논리에 바알의 논리에 물질만능의 논리에 수긍하거나 꺾이지 말고 끝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릅시다. 예수님께서 복음말미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분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 부산교구 손영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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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이 질문은 신앙인을 괴롭히는 질문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그 분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 앞에서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이 고통에 대한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바오로 사도는 회당 법정에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고(사도18,12 참조), 사도들을 비롯해 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열두 사도와 바오로, 스테파노 등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 사람들은 고초를 겪고 나서 결국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에게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신앙을 증언할 기회이며, 그 안에서의 굳건한 믿음이 결국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넓고 편한 길을 놔두고,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좁은 만큼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봄바람이 거세면, 세상은 민들레 꽃밭이 된다고 합니다. 겨울 엄동설한을 지내고 나면, 농사가 잘된다고 들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서 굳어진 우리의 신앙도 훗날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전상규(베르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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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하느님의 사람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 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7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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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증언할 기회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마음의 정원’이란 소제목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김씨가 길가 가판대 위해 인형들을 놓고 장사한 지 6개월쯤 지났습니다. 검게 때가 앉은 와이셔츠 위에 허름한 양복을 걸치고 얼굴엔 수심이 가득 찬 한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습니다.

“이 인형 얼마예요?”
“신랑신부 인형이요? 삼천 원인데요, 손님.”
“하나 주세요.”
“네.”
“장사는 잘 되나요?”
“웬걸요. 하루에 서너 개도 팔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나마 인형이라도 팔아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많이 파셔야 할 텐데... 여기 있는 신부의 모습이 꼭 제 아내를 닮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천 원짜리 세 장을 건네주는 사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 맺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그 중년 사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밝아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신랑신부 인형 중 신랑의 인형을 하나만 더 사고, 감사의 의미로 과일이 들어있는 봉지도 선물로 놓고 갔습니다. 김씨는 어리둥절했습니다. 봉지 안에 있는 편지를 읽어보고야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열흘 전, 나는 밤거리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날 나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내며 밤길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죽기 위해 미리 봐두었던 한강으로 가는 길에서 당신을 만났던 것입니다. 무심코 당신이 있는 곳을 보았을 때 당신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형들을 앞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런 모습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신랑신부 인형을 샀습니다. 나는 사업에 번번이 실패했고, 오랫동안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더 이상은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차리라 죽으려 했던 것입니다. 한강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가 다 될 무렵이었습니다. 눈을 꼭 감고 뛰어 내리려는 순간, 첨벙 하는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두려움에 깊이 찔린 나의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강물이 아니라 다리 위의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물속에 뛰어든 것은 내 주머니 속에 있던 신랑 인형이었습니다.다리 난간에 기대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하지만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거리에서 인형을 팔며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당신의 모습이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만일 그날 밤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젠 저도 내일부터 양말이라도 팔아보려고 합니다. 저에게 이런 용기와 희망을 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될 것이고 임금과 총독들 앞에 끌려 나가게 될 것인데 그 때가 바로 당신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회’란 것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인형을 팔던 김씨는 어쩌면 자살하려던 사내보다 처지가 더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살하려고 하는데 김씨는 그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전부를 잃은 것처럼 절망으로 떨어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내기도 합니다.

우리 순교자들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박해하는 이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고문을 하고 생명을 빼앗는다고 위협하면 기가 꺾일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들이 어쩌면 ‘전부’라고 여기는 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증언입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그 평화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감동하여 박해하다가 신앙인이 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을 증언하고 희망이 되는 이들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해 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김씨처럼 그저 자신의 삶을 감사히 살아내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의 미소만으로도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을 본받읍시다. 계획도 준비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을 태울 뿐입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냐가 관건입니다. 개가 두 발로 걸어도 개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부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할 말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미 내 일상의 삶 안에서 충분히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일상을 행복하게 살아내십시오. 이 세상에서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하느님이 계신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7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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