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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구/수원] 신앙 - 가난과 부자
조회수 | 218
작성일 | 17.08.20
[전주] 가난과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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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가난과 정비례하고 부와는 반비례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신앙이 약해지면 교회가 웅장해지고 화려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당 앞에서 뒤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서 건축한 베드로 대성전은 부패했던 중세에 건립되었습니다.

물이 가득한 컵에는 더 이상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컵 스스로가 다른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 컵은 스스로 다른 물을 받아들입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부자는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물이 가득 차버린 컵이 아닐까요? 한 번 더 물어보고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자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부자의 마음은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로 가득 차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정의와 평화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건 아닐까요? 피리도 속이 텅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비운 자리만큼 그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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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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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산이 얼마이고,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나는 부자인가 아니면 가난한가? 재산을 얼마나 모아야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부자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부자가 아니다고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신부인 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욕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점점 더 나누고 싶은 마음,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반감되고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많이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그만큼 더 해이해지고, 나태해지고 무관심해지고 이기적으로 되고 남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부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태도가 문제일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은 부자를 경멸하거나 저주하는 것으로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정당하게 노력해서 얻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입니다.

여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여유 중에 가장 큰 여유가 나눌 수 있는 여유입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재산이 그리 많지 않다해도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부자는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이며, 재산에 얽매이지 않는 여유로움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의미의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는 부자로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나눌 줄 모르고 긁어모을 줄만 아는 사람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이면서도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자이면서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면서도 기꺼이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난하면서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과 부에 대한 성서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개운치 않고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사람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을 이야기 하시며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산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게으른 거지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재산을 가지고 현세재물을 이용하며 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힘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다름 아닌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 놓고 버리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이해할 수 없는 편협한 사람들로 인해서 부당한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신앙인도 예수님처럼 서슴없이 내어놓고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신앙인의 진가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많이 갖고 적게 갖고 양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재물과 거기에 얽힌 마음 씀씀이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정당하게 많이 벌어 많이 나누는 삶이 더 적극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신앙입니다. 하지만 마음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이재희 (베네딕도)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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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집착과 사랑의 차이

한 수녀님께서 고민을 털어놓으셨습니다. 대부분의 고민들은 역시 공동생활을 하는 동료 수녀님들과의 갈등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것들보다 더 큰 고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고민에 비하면 다른 수녀님들과의 갈등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고민은 바로 누군가가 수녀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사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밀쳐냈습니다. 물론 그 분도 잘 이해하고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슬퍼할까요?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녀님도 사람인지라 당신도 어느 정도는 좋은 감정을 가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힘든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밀쳐내야 한다는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밀쳐내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밀쳐내야만 할 때는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부님, 수녀님들도 성인이 아닌 이상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그런 감정들이 일어나게 되면 자연적으로 이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집착이 될 때,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지, 집착이 사랑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아프리카에서 욕심 많은 새를 잡는 방법입니다. 맛이 짠 먹이와 충분한 물을 함께 놓아두면 됩니다. 그 새들은 먹이를 먹고 물을 먹고를 반복하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배가 불러 날지를 못하게 됩니다. 사냥꾼이 오면 짧은 다리로 퍼덕이며 도망을 가지만 몸이 무거워 손쉽게 잡힙니다.

이것이 집착입니다.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걸림돌이 되어 하느님께 날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집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도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사람을 더 가볍게 만들어 하늘까지 날아올라갈 수 있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오늘 무소유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버린 것은 무엇이나 100배로 받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저는 ‘약속’이란 영화에서 박신양이 술이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기억납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옷 몇 개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 앞에서 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더 많이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집착하는 작은 것들을 빼앗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잡고 움켜쥔 손이 아니라 자유롭게 펼쳐진 손이 먼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버리는 것은 무엇이나 100배로 채워주신다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를 내가 받게 되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소자들은 부모님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맺어주신 수많은 부모님들이 생겼고 집을 버렸기 때문에 가톨릭 시설 어디에서나 잘 수 있게 되었으며 형제들을 버렸기에 수많은 믿음의 형제들을 얻게 되었고 역시 영적인 많은 자녀들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애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한 사람의 사랑에 집착한다면 많은 사랑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고 아버지로부터 인간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그리스도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떠남으로서 교회의 수많은 사랑을 얻은 것입니다.

집착은 한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고 많은 사랑을 잃게 만들지만, 참 사랑은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잃게 만들고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정말 애인을 버리고 성소를 택한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랑도 그리스도의 자리엔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좋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배우자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덜 사랑해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한 것이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온전히 애정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한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두려워지고 그래서 밀쳐내야만 하는 무엇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나 수도자들은 애인을 버렸다면 두려움 없이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합니다. 누가 봐도 순결하고 영적인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인까지도 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영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해서 한 개인과 혼인하지 않고 교회의 신랑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 한 사람과의 혼인을 버리고 교회와 혼인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집착은 하나를 좋아하면 다른 것을 잃게 만들지만 참다운 사랑은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만들고 많은 사랑을 얻게 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2017년 8월 22일
  |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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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부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고 하신다. 여기에서 낙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낙타는 바늘구멍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바늘구멍이 낙타의 거대한 몸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져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정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 모두가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 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부족하고 죄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결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배”는 하늘 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7년 8월 22일
  |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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