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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행복 - 예수님과 대화
조회수 | 300
작성일 | 17.08.20
[인천] 행복 - 예수님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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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생활의 지혜 몇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스스로 체득한 것은 아니고요, 어떤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랍니다.

1. 상한 우유를 이용해 마루나 가구를 닦아보자. 우유가 상하면 세제처럼 약알칼리성으로 변해, 더러움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있다.

2. 먹다 남은 소주가 든 병을 뚜껑을 연 채로 냉장고에 보관하자. 음식물 냄새를 말끔히 없애 준다.

3. 쓰레기통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면 신문지를 물에 적셔 덮어 두자. 신문이 냄새를 빨아들여 악취가 없어진다.

4. 김빠진 콜라나 사이다를 변기 속에 부어 놓았다가 30분 뒤 물을 내리면 변기 속이 놀랍게도 깨끗해진다.

어때요? 아마 주부들은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알뜰한 주부가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한 생활의 지혜였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다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버리는 것을 이용한 생활의 지혜라는 것이지요. 상한 우유, 먹다 남은 소주, 날짜 지난 신문, 김빠진 콜라나 사이다. 모두 필요 없는 것이고, 당연히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어떤 것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찮게 여기는 것도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마음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모상과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 창조하신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우리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특히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을 판단하고 단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조차도 주님 앞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판단과 단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즉, 그분과 대화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세속적인 부자만을 지향하면서 살아갑니다.

당신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는 당신과 대화를 좀 하자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일 이렇게 계속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습은 아마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기가 힘든 것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십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인간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귀중한 존재가 더욱더 의미가 있기 위해서, 이제는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게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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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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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복음에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자, 그 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장담하면서, 더 할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가 완전한 자 되고자 한다면 가진 바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기에 필요한 예수님의 그러한 답변을 들었을 때, 그 청년은 구원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가진 재산에 더 집착했기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경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낙타" 라고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었으며, "바늘귀" 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생활개념 속에는, 도시에는 성곽이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길이란, 이 작고 낮은 문뿐이었습니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 다닐 수 있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에게는 어떠한 험이 있길래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1) 재산의 부요함은 잘못된 자만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재산을 부요하게 가진 자는, 세상의 무엇이나 다 값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원하는 것을 넉넉히 할 수 있고, 또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돈이 그것을 해결해 준다고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고, 돈만 주면 슬픈 일도 물리칠 수 있음으로, 하느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고, 인생의 모든 문제도 재산이 모두 해결해 준다고까지 생각하고 믿는데에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2) 마태 6, 21에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재산의 부요함은 그 사람을 이 세상 것에 집착시키고, 하느님을 외면하는 잘못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3)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하게 되고, 재물의 부요함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데 그 잘못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한번 재산으로 안락과 사치를 누리게 되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을 지키기에 긴장과 근심을 하게 됩니다. 즉, 재산을 생활의 평안과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하여, 이것을 더욱더 끌어 모으려는 생활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다른 곳에서 보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루가 19, 9 .. 자케오는 에리코에게 제일가는 부자였는데도, 예수께서는 그를 천국으로 부르셨고, 마태 25, 57 ... 아리마태오 요셉도 부자였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묻을 무덤을 준비할 수 있었으며, 요한 19, 39 ... 니꼬데모도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의 시신을 바를 향액을 가져다 바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요함이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크게나 적게나 자신이 가진 재산에 대해서 그것을 지키기에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재물도, 그 이전에는 다른 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다른이의 손으로 넘어갈 날 이 있을 것이며, "주인이 바뀌지 않는 어떠한 보화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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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부자들은 자선행위에도 앞장섭니다. 미국의 최고 갑부 빌 게이츠는 자선금 기부에서도 해마다 1등을 기록합니다. 한국에서도 최고의 재벌이 사회 공헌에서도 최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하늘나라를 살 수는 없겠지요. 극히 한정된 경험이지만 부자들을 만날 때 불편했던 것은 그들이 남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돈을 보고 접근한 탓이겠지요. 그러나 돈을 지키려다가 결국 재물을 섬기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재물이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니까요.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집착이 문제입니다.

더 갖고 싶어 집착하고 하느님 대신 섬김의 대상이 돼버리는 것은 재물만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명예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보다 더욱 위험합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성 추진 과정에서 성인 반열에 오를 분에게 문제점이 없는지 조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과 똑같은 제목이지만 이 영화는 변호사 일반의 문제점을 꼬집은 것입니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일지라도 갖은 지략을 동원해 무죄로 만들어 버리는 변호사들이야말로 영혼을 악마에 팔아버린 현대의 사교집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변호사(키아누 리브스)는 우여곡절 끝에 악마(알 파치노)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악마는 다시 살아나 징그럽게 웃으며 말합니다. “허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지.” 악마가 내세운 돈과 여자의 유혹을 물리친 주인공이 결국 명예욕에 걸려 넘어질 것을 암시하지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저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저도 신문에 제 이름을 내걸고 글을 쓰면서 명예욕의 위험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그 위험성이 느껴집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하늘나라는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 임영숙 (서울대교구 한남동 성당)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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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영국의 리즈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피실험자 그룹에게 넓은 실내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말이나 몸짓을 주고받지 말고 그냥 걷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구팀은 사전에 이미 일부 피실험자들에게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세부적인 지시를 내렸었지요.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방향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더라는 것입니다. 인간도 양이나 새처럼 소수의 개인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면서 무리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지닌 개인’이 단 5%만 있어도 200명에 이르는 군중들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 95%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정보를 지닌 개인이 이끄는 무리를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이 실험 내용을 보면서 왜 전체 인구의 10% 이상이 되는 가톨릭 신자들이 세상에 영향을 못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주님께서 제시하는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 안에서 죄악이 가득한 이유는 10% 이상이 되는 가톨릭 신자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뜻은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돈이나 명예 등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십자가 희생으로 보여주신 사랑을 향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처럼 생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문제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이러한 삶은 불가능한 삶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가 많은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실제로 많은 성인 성녀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런데 ‘나는 성인 성녀가 아니야.’라는 단호한 결정으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 자체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의 작은 행동 하나도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영향, 하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8월 22일
  |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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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계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계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란은 둥글기 마련입니다. 미국 계란도, 중국 계란도, 일본 계란도 둥그렇습니다. 우리의 삶도 계란처럼 둥글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결코 둥글지 못합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걱정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삶을 각지게 살게 됩니다. 둥근 계란은 욕심도 버리고, 걱정도 버리고 둥글게 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상처가 나면 계란으로 상처 부위를 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면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위로해주기보다는 소금을 뿌릴 때가 많습니다. 비뚤어진 우리의 마음 때문입니다. 계란은 흰자와 노른자 모두를 먹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노른자만 먹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강남에 남은 마지막 노른자 땅’이라는 현수막을 본 적도 있습니다. 마치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우리는 ‘성공, 출세, 명예’라는 불꽃을 향해서 날아가곤 합니다.

‘살충제 계란’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계란은 잘못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 때문에 닭은 좁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고, 좁은 공간에 사는 닭은 병충해에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닭에게 살충제를 뿌렸고, 살충제에 오염된 닭이 낳은 계란에 살충제의 성분이 검출된 것입니다. 논란이 된 것은 ‘계란’이지만 주변을 보면 많은 먹거리들이 사람들의 욕망과 욕심에 의해서 오염되고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우리의 식탁은 안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욕심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우리를 막기도 합니다. 욕심이 없었다면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일들도, 욕심 때문에 원망과 미움을 키워내기도 합니다. 욕심은 평화로운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병중에 대표적인 것은 암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모두 자신의 것들을 이웃한 다른 세포와 나누면서 성장합니다. 또 때가 되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여 또 다른 신선한 세포들이 자라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암세포들은 이런 과정을 거부합니다. 다른 세포들이 주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것들은 이웃한 세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나뭇잎들이 가지에서 떨어져야 새로운 나뭇잎들이 나올 수 있는데, 암세포들은 일정한 때가 되면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수백 배 키워냅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의 몸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암세포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암세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런 사람들에게 명예가 주어지면, 그런 사람들에게 재물이 주어지면 주변에 있는 이웃들과 나누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것들을 더욱 채우려 하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이 더욱 커져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7년 8월 22일
  |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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