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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구/전주] 사랑
조회수 | 166
작성일 | 17.08.24
오늘 복음 묵상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 가운데 한 율법학자가 등장합니다. 율법학자란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 율법 해석에 있어서 전문가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은 613개가 있었는데. 율법학자들은 그중 248개는 적극적인 율법, 365개는 소극적인 율법으로 나누어 사람들을 이 율법으로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대단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선생님, 율법서 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라고 묻지만 그들이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속을 모르실리 없는 예수님은 그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고 하십니다.(37-38절)

한분이신 하느님을 영원토록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은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자기의 존재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섬김을 받는 대신 섬기며, 소유 대신 나눔과 내어주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사랑, 자기만족, 자아 성취를 위해 싸우고 서로 착취하면서 살아갑니다.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자신의 성공, 자신의 건강, 자신의 가정,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중심으로만 기도합니다. 이런 ‘자기 사랑’은 이기적이며 물질적일때가 더욱 많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의 모습이라면 틀린 말일까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먼저 ‘온 마음으로’ 다하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부터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비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분은 교리나 신학에 매인 분이 아니라 우리가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둘째는 ‘목숨을 다하는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참된 사랑은 처음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그렇듯 조건이 있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은 진리가 절대적이듯 진짜 사랑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대충 사랑해 놓고 어찌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죄 많은 우리를 주님께서 우리를 생명 걸고 사랑해 주셨듯이 우리도 생명 걸고 그분에게 보답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의 사랑이 변덕스러우니까 하느님의 사랑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자기의 사랑이 이기적이니까 하느님의 사랑도 이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셋째는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온 정성을 다하여, 모든 생각과 의지를 동원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 돈, 시간, 정열, 은사 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고 영광도 없고 빛도 없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상대적이거나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최상, 최고의 존재이니 우리도 최상의 것 최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기도이며,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을 목말라 합니다. 주님만이 영원한 샘물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먼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분에게 나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최선의 것을 드려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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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박기흠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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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파들은 항상 예수님을 눈에 가시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뻔히 다 알면서도 예수님의 속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께 율법, 즉 의무 규정에 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태도와 방법을 함께 말씀해주십니다.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그러한 열정과 정신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이 두 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기에 사랑의 계명을 들을 땐 왠지 부담되고 의무만으로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실 때 율법과 의무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바리사이들과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분명 율법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족과 기쁨인 사랑에 관하여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기록의 충실성에 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의 충실성에 관해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율법의 순위로 말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무 규정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함으로써 얻는 진정한 해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계를 매기려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근본적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과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어느 날 복도를 가다가 복도 끝에 걸려있는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 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랑의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느냐 일 것입니다. 얼마나 실천하느냐는 바로 자기희생을 얼마나 감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란 말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말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어서 그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이 각박하고 메마르다 하더라도 서로가 오아시스 같은 충만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그 실천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기에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물었던 그 율법교사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우리도 똑같이 대답을 별로 어렵지 않게, 별로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를 아는 천주교 신자라면 질문자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쉽지도 않게, 결코 쉽지 않게, 가볍지도 않게 간직해야 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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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대교구 이재희 (베네딕도)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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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내 가족마저도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듯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족만큼은 책임졌던 전통이 늙은 부모님을 모시던 미풍양속이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해체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치매 걸린 늙은 부모님을 여행지에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뒷꼭지를 보고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한 자식은 그처럼 그 자식에게도 효도를 받습니다. 어릴적 부모님께 한 효도를 자녀들이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조건이 없지만인간의 사랑은 대부분 쌍방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극치는 순교입니다. 순교 또한 쌍방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하느님과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이라고 해서 별다른 모습을 갖고 있겠습니까?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빵 한 쪽 나누지 못했다면 나에게 나눠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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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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