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평일강론 (홀수해)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9 3.6%
[부산/전주]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조회수 | 156
작성일 | 17.08.25
[부산]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몹시 책망하시는 부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생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도 야단을 치셨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모세를 통해서 10계명을 받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세는 이것을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는 판관들에게 물려주었고 판관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회당의 교사들에게 넘겨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교사들을 율법학자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렇게 등장한 율법학자들은 10계명과 모세 율법의 원칙 아래서 자신들도 지키기 어렵고 불필요한 규칙을 수천 개를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백성들에게 글자 그대로 지켜나가기를 강요했기 때문에 질책을 당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이 바로 '언행일치'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는 대신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순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기 때문입니다. 즉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의 생각에 있지 않고 그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었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행하진 않았던 것입니다. 거룩하게 보이고 칭송을 듣고 싶어하기만 했을 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진 못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주님의 율법을 가르쳤지만 사랑의 계명을 무시한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 스스로는 올바르게 살았다고 확신할지 모르지만 결국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자신들만을 위해서 산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해가 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만큼 심각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그러다보면 늘 타인에게 우월감을 느끼든지 아니면 열등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비교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내가 누구보다 잘나보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느 누구만 보면 주눅이 든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이 비교에서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빠진 것도 자신을 하느님과 비교한데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 때 이후는 더 이상 한 형제가 아니라 경쟁대상이고 이겨야할 대상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은 같은 동족들 사이에서 항상 비교되고 우월감 속에서 살았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항상 가식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지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시장에서 시계줄을 갈면서 리어카 위에서 시계를 고치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온갖 시계 부속품이 다 있는 그 리어카에 있는 아저씨는 너무나 깔끔하게 시계줄을 갈아주었습니다. 하루 열시간 이상 조그만 좌판에 앉아 자신의 일에 충실히 다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옆에 상점에는 점원이 계속 유리창을 닦고 있었습니다. 몇 푼 되지도 않을 월급에도 성실히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인, 국회의원들이 떠올랐습니다. 큰소리치고 위세 부리며 살지만, 과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자신의 생계를 잇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희망과 사랑과 용기는, 세상살이의 가치는 웃어른들이 아니라, 바로 평범하게 일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계속 윗자리를,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권력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과연 거기에 무슨 가치가, 무슨 보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생계를 위해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인생의 신비가, 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리고 꼴찌와 첫째의 이야기도 그같은 일상의 신비를 말해 주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은 얼마나 하느님 안에서 말과 행동을 가지런히 해나가면서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면서 성실히 살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 부산교구 전수홍 신부
449 3.6%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가네.” 스승의 날이면 수업시간마다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처럼 가르침을 주는 모든 분들은 삶의 스승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선생님은 많은데 스승이 없다고 합니다.

스승의 첫째 덕목은 어떤 가르침에 있어서 스스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는 왜소해지는 반면 학원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성직자들은 같은 지식을 가르치지만 삶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사제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닌가 싶습니다.가르친 삶의 지혜를 스스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나누지 못할 때가 있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로만 떠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저 역시 행실이 따르지 않는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담풍’ 하더라도 자식은 ‘바람풍’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사제가 설사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실천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어쩌면 이 희망이 간절한 기도가 되는 이유도 제 삶이 부족한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 08.25
449 3.6%
▲ 죽은 강의

20대 후반 무렵부터 나는 초청 강의나 강연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많은 강의를 해왔지만 잊혀지지 않는 강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박수를 여러 번 받고 훌륭한 강의였다는 칭찬을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신임 교리교사들을 대상으로 세 시간 동안 ‘교리교사론’에 대해 이론이 아닌 실천을 중심으로 강의를 했다. 휴식 시간마다 후배 교사들은 나에게 와서 좋은 강의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고, 여러 가지 칭찬과 함께 다음 기회에 또 강의를 듣고 싶다는 말을 남기곤 했다. 마침내 강의가 끝나고 큰 박수를 받으면서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큰 박수가 주는 뿌듯함은 잠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몹시 괴로웠다. 평소 내가 실천하지 못한 일을 남에게 실천하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온 터라, 그날 강의에서 나는 행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에게는 ‘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율배반적인 나의 언행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강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실행하지 않은 일을 마치 실행한 것처럼 말하는 강의는 아무리 크고 오랜 박수를 받아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강의를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강의는 곧 그 강사의 인간 됨됨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강의는 죽은 강의라고 생각한다.

▥ 한명수 시인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부)
  | 08.2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466   [수도회] 그 뜨거운 사랑 체험  962
1465   [부산] 하느님 나라 확장  [1] 917
1464   [서울/인천] 예수님의 도구  [1] 1997
1463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  [1] 2461
1462   [부산] 주님 사랑하기  [3] 2244
1461   [인천/서울] 아흔아홉 번의 친절과 한 번의 상처?)  [2] 2284
1460   [수도회]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2] 2309
1459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내 발에 향유를 발라 주다)  [2] 1881
1458   [수도회] 사람이 되고 싶은 허수아비  [3] 1297
1457   [부산/안동/전주/청주]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4] 1325
1456   [서울/인천]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까?  [2] 998
1455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2] 2423
1454   [수도회] 부부관계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2] 572
1453   [대구/부산]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2] 932
1452   [서울/인천] 희망의 배달부  [2] 520
1451   (녹)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젊은이야, 일어나라)  [1] 2377
1450   [청주/수원]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4] 712
1449   [인천] 백인대장과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1] 684
1448   [수도회] 시련을 참아내는 힘은 오직 천주님으로부터  [3] 505
1447   (녹)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3] 2157
1 [2][3][4][5][6][7][8][9][10]..[74]  다음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