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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구/청주/수원/원주] 예수님 공생활 따라잡기
조회수 | 1,891
작성일 | 09.01.12
주님 세례 축일’로서
20여일 정도의 성탄시기가 마감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었다. 연중시기는 구체적으로 오늘부터 재의 수요일 전까지와 성령강림 주일 다음 월요일부터 새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 직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래서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1)과 연중시기(2)로 구분된다.
연중시기에 사제는 녹색 제의와 영대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과 겸손, 인내와 차분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연중시기는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 같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특수한 신비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기념하며 지내는 시기이다. 한 마디로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따라잡기’의 시기인 것이다.

연중시기의 시작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부분이다. 마르코는 마태오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계기로 삼고 있다. 비록 강제로 중단된 것이지만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마치자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5절)는 절대절명의 언명(言明) 속에 간단명료하게 선포된다.

이 복음은
세상창조 때 이미 계획되고 약속된 것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을 거쳐 예수님과 함께 성취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스스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뜻한다.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취할 태도는 회개(悔改)와 믿음이다.

회개는
죄악의 세계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회개는
여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고 전환하여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질서 지우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을 수락하고, 수락하였다는 표시를 보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즉, 기쁜 소식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은 추종(追從)이다.

모든 믿음이 다 적극적인 추종일 수는 없지만,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인 추종이 필요하다. 성소(聖召)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추종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뚜렷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오늘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에 주님께서 복음선포의 길로 우리 각자를 초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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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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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그리스도 가르침의 시작 - 회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느님의 대변자가 가장 많 이 외친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의 백성이 예언자들 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공 생활을 시작하시며 세상을 향해 맨 처음 외치신 첫 일성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말씀하신다. 인류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래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회개를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개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회개는 삶의 중심, 생활의 기준 문제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어 그 중심과 기준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둔다. 그래서 오해하고, 미워하고, 탓하고, 불평하고, 고통 받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하느님을 잊는다. 이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와 닿을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과 기준을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두는 것이 회개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우리에게 이것은 한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보라,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미사에까지 와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사람관계, 어려운 일, 돈 문제 등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미사시간에 왜 그렇게 얼굴들을 펴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지 못하시는 것이겠는가? 회개가 필요한 모습들이다.

주님께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맛들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의 중심을 주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용기도, 강복도 주신다. 믿음을 가지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회개를 종말 때까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할 것이다

<대구대교구 서경돈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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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에 의해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 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머뭇거림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취미생활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일, 운동을 하며,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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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동업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을 사도로 뽑아 세우시는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도들은 백성의 지도자나 실력 있는 지식인, 당시의 명망 있는 저명인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보잘것없고 아무 능력이 없어 보이는 오히려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2제자를 면면히 살펴보면 로마제국에 붙어서 동족의 세금을 걷어 바치는 세리였던 마태오도 있었고, 단순무식한 어부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했고 거칠었으며 기분파라 쉽게 싸움에 휩쓸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제국을 뒤엎기 위해 가슴에 칼을 품었던 혁명당원 시몬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라는 사람과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줄행랑을 친 그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이 제자로 뽑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저명한 사람이었다면 복음을 전파하는데 훨씬 더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아니라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열정을 보고 뽑으신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이후 그리스도교를 열정적으로 전하며 자신의 온 몸을 교회를 위해 바칩니다. 그야말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똑똑하고 약지 않아서 오히려 순수했고, 부족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그런 제자들이었습니다.

지식과 명성이 아니라, 능력이 아니라 그들 마음 안에 있는 믿음과 그 순수한 열정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안에 교회의 신비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겨울 추운 날 새벽 세 시경에 선교사 선발을 위한 면접시험이 있었습니다. 새벽 3시에 면접이라니 포기한 사람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5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감독관이 나타나 지금부터 시험이 시작임을 알렸습니다. 첫 번째 질문, 빵집이란 뜻의 단어를 영어로 말해보시오. 청년은 베이커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감독관은 잘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질문, 2의 2배는 얼마지요? 4입니다.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감독관은 합격이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감독관은 그렇게 쉬운 문제를 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오늘의 시험은 이러합니다. 첫 번째는 극기 시험입니다. 당신은 그 추위에 새벽 세시부터 여덟시가 될 때까지 한마디 불평 없이 기다렸습니다. 두 번째는 인내심을 시험하였습니다. 일부러 다섯 시간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세 번째, 나는 당신의 성질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나의 게으름조차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나는 당신의 인간성을 시험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도 대답할 수 있는 유치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떠한 거부 반응이나 이상한 생각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며 훌륭한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합격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람들을 바라볼 때 외형과 능력 등의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판단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열정과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더라도 또 뛰어난 능력이나 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따뜻함과 열정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오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으로 기쁘게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부산교구 김병수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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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이다. 이 기쁜 소식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가? 신약성서에는 여러 곳에서 기쁜 소식이 나타나고 있다.

1. 갈라디아서 2장 5절 ; 골로사이서 1장 5절에서
그것은 ‘진리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 전까지는 추측하여 찾는 형편이었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하느님에 대한 진리가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2. 골로사이서 1장 23절에 보면
‘소망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어떤 역경에서도 사람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소식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3. 에페소서 6장 15절에 보면
‘평화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의 싸움이 항상 있고, 그로 인해서 분열된 인간성을 지니고 살고 있는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악을 정복하여 승리에로 이끄는 평화를 주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4. 에페소서 3장 6절에 보면
‘약속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는 하느님이라기보다 두려움의 하느님으로 사람들은 생각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소개하며 알려주시는 하느님은 약속을 충실히 지키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5. 디모테오 2서 1장 10절에 보면
‘불멸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그것으로 절망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의 삶은 죽음을 거쳐 영원 불멸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임을 드러내 주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6. 에페소서 1장 13절에 보면
그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단순히 과거의 죄로부터 도피나 형벌로부터의 해방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초대, 즉 하느님의 속성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자녀로서 들어 높여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혀주시고 드러내신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이 기쁜 소식을 굳게 믿음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스럽고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말씀을 잘 읽고 그 말씀 한 구절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말씀이 이제는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진정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여기에서 우리는 항상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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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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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집착을 버리려 결심하면 그 집착이 버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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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란 예수님께서 복음을 공적으로 전파하는 3년간의 시기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내용은 이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는 말은
‘드디어 당신이 오셨다’는 말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참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며,

“회개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행복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을 버리라’는 뜻이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복음 선포를 믿었던 이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첫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던지는 시몬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행복이라 여기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베드로는 이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삽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들을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사람을 낚는 것과 하나입니다.
또한, 복음을 믿는 것은 물고기 잡는 삶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고기 잡는 삶이란 이 세상에 집착하는 삶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돈을 좋아하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저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고통의 뿌리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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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나라의 귀족이 자신의 하인에게 많은 돈을 주며 시장에서 맛이 좋고 값비싼 물고기를 사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욕심 많은 하인은 귀족의 돈을 상당 부분 빼돌리고, 맛없는 싸구려 물고기를 몰래 사다가 들키고 말았습니다. 귀족은 자신의 명을 어긴 것도 모자라 자신을 속이고 돈을 빼돌린 하인에게 크게 화가 났지만,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네가 나를 능멸했으니 벌을 내리겠다.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선택하라. 네가 저 싸구려 물고기를 모두 먹든지, 곤장 100대를 맞든지, 물고기 값을 물어내든지, 그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사실 귀족은 잘못한 하인이 물고기 값을 다시 돌려주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자기 손에 들어온 돈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하인은 물고기를 모두 먹겠다고 나섰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돈도 들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인은 그 많은 물고기를 절반도 먹지 못했는데 벌써 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머지 물고기를 모두 먹다가는 배가 터져서 죽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결국, 하인은 물고기 먹는 것을 포기했지만 끝내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곤장을 맞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곤장도 고작 10대 정도를 맞고 나니 더 맞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었던 욕심 많은 하인은 결국 물고기 값을 물어내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돈을 좋아하면 고통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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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님은
“손에 든 찻잔이 뜨거우면 그냥 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뜨겁다고 괴로워하면서도 잔을 놓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돈 욕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뭐라도 마셔야 하는데 뜨거운 차밖에 없다면 그 사람이 잔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뜨거워도 찻잔을 끝까지 들고 싶다는 말은 다른 선택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뜨거운 것이 아닌 콜라라도 주면서 잔을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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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55세 때 큰 회개를 하였다고 합니다. 30대에 이미 세계 최고 갑부가 되었던 록펠러는 55세 때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지나치게 돈 욕심이 많았던 록펠러는 그때까지 남을 위해 돈을 써 본 적이 없는 수전노 중의 수전노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수술비가 부족하여 수술을 받지 못하는 한 여자아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벽에 걸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는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록펠러는 처음으로 선행을 합니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는 병이 나아 긴 감사의 편지를 록펠러에게 써 보냅니다. 록펠러는 그 편지를 읽으며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행복을 체험합니다. 그 이후부터는 십일조를 꼭꼭 내고 남을 돕는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자 병이 나아 99세까지 장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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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욕심에서 벗어나려면
돈의 욕심을 버리는 것 대신에 얻는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길을 거부한다면 아무 데도 못 갑니다. 세상에 산다면 돈 욕심이 고통인 줄 알면서도 돈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이 복음을 전하는 행복입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는 대신 사람을 잡는 기쁨을 선택하였습니다.

누가 돈 욕심이 있는지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면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말이기 때문에 돈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하면 돈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사람이 돈 이야기하면 질색을 합니다. 이렇게 돈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돈 욕심에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돈을 싫어하기로 한다고 돈 욕심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욕심을 벗어날 다른 욕심을 찾아야 합니다.

물고기 잡는 삶에 지쳐있던 베드로는
물고기 대신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일도 좋지만,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물고기 잡는 일을 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는
돈을 건지는 바로 그곳에 많은 영혼이 함께 허우적대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그들을 구하려다 보니 돈의 욕구를 잊게 되고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일을 하면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을 잡는 사람은 물고기만 잡는 사람보다 더 먹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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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1년 1월 21일
  | 01.11
465 94%
[수원] 첫 제자들을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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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오로지 복음서에만 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쓰여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신앙의 기쁨은 회개에 따르는 어떠한 쓰라림도 보상해 준다. 거룩한 양심의 기쁨을 바라는 사람은 회개의 쓴맛을 삼켜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하신다. 예수님은 비천한 어부들 같은 가난한 사람들과도 어울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즉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분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힘과 용기를 채워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이 가르치셨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 4,19) 하시며 그들을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을 쫓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거룩한 일꾼이며 교사로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셨고, 그들을 당신 가르침의 선포자라 선언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즉 방해되는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말씀이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절) 마태오는 세관에서 벌떡 일어났으며(마태 9,9), 어떤 이는 믿음 때문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조차 남에게 맡겼다.(루카 9,59-60)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사도들이 했을까?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재산과 허영심, 사회적 지위와 쓸데없는 욕심과 같은 온갖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린 배마저 버렸다.(20절)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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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465 94%
[전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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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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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표현만 보면
‘하느님의 복음’이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이 바로 ‘하느님의 복음’입니다.

(뜻에 따라서 문장을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셨다.”)

때가 찼다는 것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도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인데, 역사를 마무리하시고 완성하실 시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하면,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지금’ 빨리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왜 ‘기쁜 소식’인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 또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서운 소식’, 또는 ‘듣기 싫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뒤로 이천여 년이나 지났다.
그러니 종말은(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교회는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버린 이천여 년의 세월에 대해서는
베드로 2서에 나오는 다음 말을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2베드 3,8-10ㄱ).”

이 말은, 종말에 관해서 말할 때마다 너무 자주 인용되는 말이라서
‘상투적인’ 말로 보일 수도 있는데, 자주 인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응급 상황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앙인으로서 진짜로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의 종말의 시점에 대해서는, 얼마나 가까운지, 아니면 아직 시간이 많은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인생의 끝은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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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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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관점에서만 보면 성모 마리아가 첫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요셉, 엘리사벳, 즈카르야, 세례자 요한, 시메온, 한나 등이 그 뒤를 잇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부르심을 받은 어부들은 첫 제자들이면서 동시에 첫 신앙인들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었고,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 (루카 6,12-13)”

여기서 ‘제자’ 라는 말은, ‘신앙인’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열두 사도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나중에 사도로 뽑으실 생각을 하셨겠지만, 어떻든 그들을 부르신 일은 아직은 사도로 부르신 일이 아니고, 신앙인으로 부르신 일입니다.

따라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함께 하는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은 일꾼들을 모집하는 활동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일꾼이 되는 것이고,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일꾼의 생활입니다. 우리는(신앙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물에서(죽음에서) 건져져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고, 그 생명을 아직 물속에(죽음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임무를 받은 사람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그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선교활동은 모든 신앙인의 기본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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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465 94%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때는
예언자들에 의하여 약속된 구원의 때이며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로 마련된 시대가 지금 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것은
예수님의 선포가 그 선포를 받아들이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영혼에 준비시키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 조건이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러나 먼저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믿어야 할 진리를 향해 열리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희소식이며 벌써 온 하느님 나라의 선물인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즉 이 나라가 다가왔기에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믿음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의 내적인 돌아섬의 결단이 실행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개에로의 부름은 ‘복음을 믿으라’ 는 요청과 결합되는데 회개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초대에 ‘예’라는 기쁨에 찬 응답을 발하여 예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 회개가 있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이 신앙에의 회개로부터 자라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며 그 회개는 하느님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박하게 요청되는 눈앞에 현존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신속하고도 완전한 응답의 구체적인 표본은 예수께서 첫 번 째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들을 보시고 즉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이 부름은 절대적이고 강력하며 철저합니다. 하느님이 부르실 때 거기에는 망설임이 없으며 부름의 내용은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스승으로 그들에 앞서 가시고 그들은 그분을 따르며 그분이 자신들을 이끄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따름, 이 추종을 통해 제자가 되라는 부름이 갖는 목적은 이 어부들을 위하여 적절하게 골라진 상징적인 말들, 곧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구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제자 직분의 원래 의미를 밝혀주는 것으로써,
예수님의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을 돕기 위하여 보다 친밀한 그분과의 일치와 결합을 이루는 것이 그 의미인 것입니다.

두 쌍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이고 절대적으로 순명합니다. 그들은 현재 일을 버리고, 제베대오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가족마저도 떠나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지금 그들에게 가치있는 것은
이미 그들 가운데 와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내적인 변화와 그에 따르는 실천적 생활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임을 이 첫 제자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러한 따름에서 야기되는 결과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가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것까지 스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 후 지상에서 그분과의 동료생활이나 그분과 함께 운명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그리스도를 따름” 이라는 영적인 의미만이 남게 되었고 이제 이 따름, 이 추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육체적이고 지상적인 현존이 없이도 여전히 그분과 더불은 동료신분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따름’을 그들 자신과 각 개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의 상황이 어찌하든, 그 삶 속에서 회개와 그리스도에의 추종의 삶을 살도록 불리어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하나의 결단입니다.
그것은 결정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세속적 가치보다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고 때로는 불확실한 듯이 보이는 미래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실, 예수라는 인물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를 따르라’, 즉 당신께 전적으로 의탁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이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좇고 있는지, 우리가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를 묵상해 봅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며 나의 참 행복과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제자됨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존귀한 칭호가 어울리도록 매일 그분을 따르는 삶의 방식을 선택합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가를 보여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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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윤명기 요한 칸시오 신부
  | 01.11
465 94%
[원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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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서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에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차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역할을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서간 저자는
이제는 하느님께서 예언자가 아니라 당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뿐 아니라 만물의 상속자로 만드셨고 온 세상을 창조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의 메시아 찬양의 시편을 인용하며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거룩한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6-7)

그래서 서간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이 지상 생활을 마치시고 아버지에게로 가실 때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경배하며 인도할 것이라고 설명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자렛의 조용한 삶을 접으시고 때가 되시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마르코는 이러한 정황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1)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따르는 조건은 회개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소명의 협조자인 제자들을 호숫가에서 부르십니다. 그곳을 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2)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주님께 더 나아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그들도 부르십니다. 그들도 바로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일련의 망설임이나 ‘주고받는 거래’도 없습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이 있고 따르는 순명하며 따르는 제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스승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와 관계(1열왕 1920-21)와는 달리 제자들은 주님의 복음선포를 위해 이제까지의 자신들의 생업에 필요한 배나, 그물을 두고, 또 가족을 떠나 주님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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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개라는 말은 희랍어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라고 하는데,
'머리의 방향을 바꾼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옛 번역에는 ‘머리를 돌린다’라는 의미로 ‘회두(回頭)’라고 해서 냉담자를 교회로 인도했다라는 의미로 섰다. 또 다르게는 '뱃머리를 돌려 진로를 바꾼다'라는 의미, 초대교회에서 '배교(背敎)에서 다시 공동체로 돌아온다', 또 ‘악한 마음을 선한 것으로 바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회개가 따라야 한다. 세상에 묻혀 살다가 하느님 나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마르코는 ‘너희는 회개하고 믿어라 μετανοεῖτε καὶ πιστεύετε’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2. ‘사람낚는 어부 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1,17)라는 표현은
이해하기가 어렵니다. 단어대로라면 ‘사람들의 어부들’인데, 어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했는지는 밝히기가 어렵다. 원문을 지나치고 그냥 이 표현을 쓰니까 지금은 당연히 그 표현을 답습하는 느낌이다. 리틴어로 ‘piscatores hominum’ 이탈리아어로 ‘pescatori di uomini’, 영어로 ‘fishers of men’이다. 모두 '사람들의 어부들'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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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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