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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가장 깊은 어둠 가까이에
조회수 | 1,557
작성일 | 09.01.12
오래전 맹인 선교회 식구들과 만날 때였다. 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예비자 교리도 하고 함께 병원 방문도 하며 기쁘게 지내던 중 한 사람을 통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체험을 했다. 내가 상대방의 자립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의존하기를 바라며 만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 나는 몹시 비참했고 슬펐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믿으며 살아온 내 존재가 흔들리며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감사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나에게 첫 회개의 순간이라 느껴진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삶의 방식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시고 나를 거짓된 강박관념에서 풀려나게 해주신,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동기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내가 느끼기에 버거운 일이 닥칠 때면 나는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믿고 ‘예.’`할 것인가, 부족한 내 능력을 생각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본성에 따라 ‘아니오.’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서 갈등한다. 나를 바라보는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께 온전히 맡겨드리며 ‘예.’`하는 데 믿음과 용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내가 걸어온 길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때로 가장 깊은 어둠과 두려움 가까이에 있었다. 그 너머를 보게 해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늘 가까이 계셨다. 그러기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도 감사하다. 당신께서 더 진실한 그릇으로 빚기 위해 인도하시는 것임을 늘 뒤늦게 깨닫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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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씨튼 수녀회 조정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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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한 달 반가량의 대림․성탄 시기가 어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마치도 잔잔한 은혜의 강가를 주님과 함께 거닐던 꿈결 같던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은총의 오솔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절기의 끝자락에 매달려 우여곡절의 지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나날들은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지난 대림․성탄 시기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결국 새롭게 맞이한 연중시기 첫 아침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감사뿐입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절에 대한 결론은 항상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연중시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축복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날들,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연중시기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아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아침입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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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시기를 시작하며...

우리 구원의 시작을 알린 주님의 성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를 시작한다. 성탄시기 동안 보고 느끼고 체험한 화려함과 감동을 뒤로 하고 이제 묵묵히그 성탄의 신비를 살아나가야 할 때이다.

성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아니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 지를 강력하게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하고 계심도 보여주셨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겸손의 길임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묵묵히 이 성탄의 신비를 살아나가야 한다.

연중시기를 시작하시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일성(一聲)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이다.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臨)하심을 체험하였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중심에 놓고 사는 기쁨을 누리라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의 삶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을 느껴보자. 그리고 그 주님과 더불어 함께 기쁨을 나누자꾸나.

두번째의 말씀은 <나를 따라 오너라!>이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시고 제자들 또한 두말없이 묵묵히 그 초대에 응한다.

연중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거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하루하루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가자. 그냥 단순히 그분의 초대에 <예> 하고 순응하는 생활이 연중시기를 지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리라.

마치 장거리 경주의 출발점에 서 있듯이, 길고 지루하게 펼쳐질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가족 여러분 모두에게 영적 여정에 진보 있으시길 축원해 본다.

출발!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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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살아도 목마른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저 깊은 곳의 상처까지도 껴안아 주신며 주저함속에 머물러있는 우리를 가장 뜨거운 당신 가슴으로 손수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물이라는 어리석은 인간관계마저도 버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믿을 수 없는 우리들을 오히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사람들을 위한 길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통해 삶이 다시금 깨어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 여긴 우리들이 그분을 따라나서게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살아야 할는지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버려야 새로워질 수 있음을,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음을 제자들의 삶에서 만납니다. 버렸던 그물과 아버지는 실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었기에 주님께서 잘 이끌고 가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잘 가는 것이 참된 겸손이며 순명순리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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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된 운명 -신비가의 삶-

언젠가 읽은 '재미없는 천국'의 미국, '재미있는 지옥'의 한국이라는 비유를 미국의 광활한 광야에 자립 잡은 뉴튼수도원에 와 있어 보니 실감합니다. 외적 자극과 도전이 없는 변화없고 역동성 부족한 환경에 자칫 안주하다 보면 무기력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막의 영성'에서 간과해선 안 될 점입니다. 한국 같은 끊임없는 자극과 도전에, 외적 변화가 눈부시고 역동성 강한 환경에선 생존 본능만 남고 삶은 천박해질 위험이 있는 반면, 변화와 자극이 없는 사막 같은 광활한 외적 공간의 여기 수도원 환경에선 쉽게 '무기력(akedia;아케디아)의 늪'에 빠질 수 있으니, 양편 다 장단점을 보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재미있는 천국'을 살 수는 없을까요? 방법은 단 하나 어느 환경에서든 깨어, 주님을 찾는 내적초월의 깊이의 여정에 항구한 노력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화입니다. 여기 뉴욕에 계신 사촌 영숙 누님의 주선으로 누님의 아들 내과의사인 스테파노의 집에 초대 받아 여기 뉴욕, 뉴저지주에서 살고 있는 친지들을 모두 만나 오랜만에 축제와 같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 수철 형님, 작은 아버지와 똑 같아요. 이철 형님과도 똑 같구요.“

예전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그러니까 50년 만에 만난 저보다 한 살 적은 예전 경기중고(京畿中高)와 서울공대(工大)를 나온, 이젠 할아버지가 된, 독실한 장로교 신자인 '중철' 사촌 동생의 반가움 가득한 탄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포함된 7남(男)의 형제들과 1녀(女)의 고모에게서 태어난 사촌이 무려 55명이니 참 만나기가 힘든 사촌들입니다.

"얼마 전 면도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 얼굴과 똑 같았어요.“

이어진 사촌동생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작년 산티아고 순례 때 보내준 제 사진을 본 후 영희 동생의 반가움 가득 담긴 카톡 답변 메세지도 잊지 못합니다.

"옛날 아버지 사진 보는 것 같네요. 똑같으세요.“

이 모두 역시 신비로운 만남, 복된 만남, 일종의 신비체험 같습니다. 운명적인 만남의 인간 존재임을 실감합니다. 이렇게 얼굴을, 사진을 보면서도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얼굴의 신비'입니다. 아마 나이들어갈수록 아버지를 닮은 얼굴이 되어 가나 봅니다. 예전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니 바로 세월이 주는 성숙인것 같습니다. 순간 '아!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이들어가면서 하느님 아버지 얼굴을 닮아가겠구나' 하는 은혜로운 깨달음도 마음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복된 만남, 복된 운명입니다. 만남의 신비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느님을 향한, 또 이웃을 향한 자기초월의 사랑의 신비가의 삶이, 영적 삶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과 '시몬, 안드레아' 형제들, '야고보, 요한' 형제들과의 만남은 운명적입니다. 만일 이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 어떠했을까요? 하느님의 섭리 앞에 '만약'이란 가정이 다 부질없는 말이지만, 평생 이 형제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잡이 하면서 평면적인 반복의 삶을 살다가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 아까운 인생 마쳤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생각하면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인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저 역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수도사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강론도 올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내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2012년 성삼일 주님 만찬 미사 때 깨달음처럼 스친 고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한 이 형제들! 정말 은총의 기적입니다. 이제 주님은 이들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이들을 부르셨기에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은총의 부르심이 선행했던 것이며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만남의 충격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을 까요. 아마 주님을 찾는 내적 열망을 한눈에 통찰하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에 즉각적으로 응답한 제자들의 모습이 회개의 모범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향한 자기초월(自己超越)의 자유로운 수직적 비상(飛翔)의 내적여정이 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밖으로야 평범한 예전 같은 일상 같아 보이지만 내적 상태는 예전과는 판이 합니다. 바로 목표로 하는 분이 분명해 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1,2ㄴ-3).

정말 은혜로운 고백입니다. 복음의 네 형제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바로 이런 아드님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니 이보다 복된 일이 어디 있겠는지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네 어부 형제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전적포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성소의 양상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자 주님께서 불러주신 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이고 전적인(immediate and total) 응답을 바라실 뿐입니다. 갈림없는 마음으로 항구히 주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내적성장과 성숙이요 주님의 얼굴을 닮아갈 수 있고 소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신비가가 되어, 당신을 따르는 내적초월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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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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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운전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요즘 많은 어머님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편감’ ‘나의 로망’으로 뜨는 한 인물이 계신답니다.

그분은 바로 수십 년 째 서민들의 일요일 아침을 기쁘게 해주고 계신 ‘전국 노래 자랑’의 사회자 송해 선생님이시라고 하네요.

이유는 다른 남편들은 40대 초반에 벌써 실직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는데, 이분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아무 걱정 없이 ‘쭉’, 꾸준히 출근하고 계시지, 남들은 일 년에 몇 번 못가는 지방 출장을 매주 어김없이 한번 씩 다녀오시지, 다녀오실 때 마다 지방특산물 들고 들어오시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가만히 송해 선생님 생각하면서 참으로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84세의 연세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십니다. 최고령 MC이자 최장수 프로그램 MC 기록을 계속 갱신하고 계십니다.

준비성이 얼마나 투철하신지 대본 한 구절, 한 구절, 사람 한명 한명을 꼼꼼히 챙기신답니다. 지방으로 촬영을 가시면 꼭 그 동네 목욕탕엘 가신다더군요. 함께 목욕을 하면서 그 지방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프로그램 진행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신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땅에서의 삶을 정말 충만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장 바람직한 응답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목숨 다하는 날 까지,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부르시는 그 날 까지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충실히 살아내는 삶,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장 적절히 대응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스승님, 참 진리의 선포자이신 스승님의 부르심 앞에 그간 간직해왔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가족, 생계도구였던 배와 그물, 그간 추구해왔던 가치관, 인생관...

그 결과 더 큰 인생, 더 풍요로운 삶, 더 빛나는 생애를 선물로 얻었습니다.

우리 역시 사도들 못지않게 여러 차례, 여러 측면의 하느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이것 정말 보통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세례성사로 또 부르셨군요. 뿐만 아니라 견진성사에로, 신품성사에로. 뿐만 아닙니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교사로, 봉사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회갑에로, 칠순에로, 80의 나이로, 100세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새롭게 주어진 이 한해는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시고 다시 한 번 부르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이 ‘하루’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표현이 확실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다시 눈뜬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거룩한 부르심이 분명합니다.

‘이 나이에 무슨’이란 말은 절대 금물입니다. ‘나는 이제 끝났어’란 말처럼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무책임한 말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마운 내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한 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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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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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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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 가면 어라연(漁羅淵)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물고기들이 물 밖으로 뛰어오르면 그 비늘이 비단처럼 반짝거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져 오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실상사에 계시는 연관 스님은 ‘라(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습니다. ‘그물 라로 읽어야 맞아요. 어라는 고기 잡는 그물을 뜻하지, 고기는 중생이고.’(강제윤의 「숨어 사는 즐거움」 중에)

참 놀랍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이 땅의 지명에서도 드러나는 것을 보면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는 일은 어느 사회나 종교에서든 끝나지 않는 과업인 듯싶습니다. 누가 언제 붙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난 시절 도탄에 빠져 괴로워하던 백성들이 그 연못의 아름다운 물고기들을 보고, 그리 살고 싶은 염원을 담아 생겨난 이름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곳에 들어와 살기 전 나는 오랫동안 방송일에 종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매스 미디어가 갖는 위력에 푹 빠져 살아온 세대인지라 자긍심도 있었고 한편으론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데 카메라만큼 큰 위력을 지닌 것이 없다는 극히 상식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나의 방송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카메라는 내게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구하는 그물과도 같았고, 그 그물이 닿는 사회는 개선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물로 구원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교묘하게 혼란에 빠뜨리게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내가 그것을 굳이 막지 못하거나 그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 그물을 사용할 만한 어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은 온전히 나와 같은 삶을 살자는 뜻과 같습니다. 그냥 졸래졸래 따라다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온전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는 그물을 놓고 ‘따르기’ 위해 숨을 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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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이(예수살이공동체)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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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히브리서>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각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 복음서의 특색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인데, 이는 마태오복음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루카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인데,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라”(요한 1,38-39)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바람인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하는 바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은 이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네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 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가 11,20 참조). 그래서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놀랍게도 그 어떤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고,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것,
좋지 않는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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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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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465 94%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복음 1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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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시기의첫날이다.

복음을 사는 것은 우리 영혼의 진실어린 회개이다. 회개는 기쁘고 회개는 아프고 회개는 단순하다. 회개는그 자체로 은총이다. 뼈를 깎는 회심이 참된 은총이다. 회개로 사는 것이 기쁜복음이다. 회개는 우리 삶 자체이다. 회개는 신앙의 현주소를보여준다. 버리고 따르는 삶 안에 회개가 있다. 회개의 길로 주님께서 오신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회개는 삶의 중심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회개의 삶이다. 회개는 용서와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 자녀로 돌아가는 삶이다. 우리의 회개로 복음은 선포된다.

복음에 순명하는 삶이 회개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회개에 있다.회개만이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복음의 빛나는 섭리이다. 교만이 아닌 회개로 우리 모두를 이끄시는 주님을 믿는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회개의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오신 복음을 진실로 믿고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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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465 94%
구원자 예수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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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전 갈릴래아 호숫가
한 작은 마을에서는 한 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을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갑자기 마을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 세세대대로 명맥이 이어져온 가문을 이어가야 할 사람,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요 든든한 보루같은 젊은이들이 동시에 떠나버렸으니, 마을 전체가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제베대오 같은 경우 얼마나 황당했겠는지,
즉시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날도 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조업 후 얽히고 설킨 그물을 손질하고, 타고 나갈 배도 청소하고, 요깃거리도 챙기고...

그런데 아버지 제배대오가 허리를 한번 크게 펴고 나서,
아들들이 일을 잘 하고 있나 하고 둘러보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물을 손질하는 도구를 내팽개친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간다온다 말도 없이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제배대오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어이, 아들들! 지금 너희들이 제 정신이냐? 일하다 말고 누굴 따라가는거야? 지금 출항 오분 전인데! 당장 돌아온다 실시!”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두 아들은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듯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예수님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제배대오는 아마도 그날 밤 단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일주일 이상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을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도 예수님으로 인한 큰 피해자 중에 한명입니다.
딸을 두고 집을 나가버린 시몬으로 인한 충격과 원망으로 인해 끙끙 앓다가, 열이 위로 치밀고 올라와 열병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까지 했습니다.

부모를 비롯해서 아내와 자녀들,
생계 도구인 그물과 배마저 버리고 즉시 따라나선 첫번째 제자단의 모습을 보면서 든 한 가지 생각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풍기는 매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으면,
그분의 인품과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으면, 그분께서 건네신 제안이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으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을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첫 사도단에게 보여주신 청사진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코 복음 1장 17절)

‘애들아, 너희들은 그동안 물고기를 잡을 만큼 잡지 않았느냐? 이제 물고기 잡는 것도 질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 비린내 나는 물고기 낚는 일은 그만 내려두고 앞으로 나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지 않겠느냐?’

“구원자 예수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첫 제자들이 했을 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따라고자 아버지를 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첫 제자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아니,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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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465 94%
회개와 따름, 예닮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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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교황님의 미국민들에 대한 감동적인 호소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미국에 대한 교황님의 염려가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미국사회에 뿌리 내린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화해를 촉진하라. 폭력은 언제나 자기파괴적이다(Violence is always self-destructive). 폭력은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고 많은 것을 잃게 한다. 만남의 문화, 배려의 문화를 살리고 공동선을 건설하라.”,그러니 자기파괴적인 폭력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요!

오늘은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첫날 바야흐로 연중시기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시작으로부터 어부 네 사람을 부르는 일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우리 역시 다시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주지시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성을 지닌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으로 예수님 설교의 요약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유일회적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언젠가 그날의 때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절박성을 띠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에게는 언제나 카이로스의 구원의 때, 주님을 만나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여기 오늘 지금의 때에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를 뜻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시작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도 시작됩니다. 여기 오늘 지금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응답은 회개를 통한 깨어있음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측면보다는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뜻합니다. 회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복음을 믿는 것이요 구체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와 복음을 믿음은 주님을 따름으로 실현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라 부르시자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어부들의 회개는 부르심, 버림, 따름의 과정으로 표현됩니다. 따름의 궁극 목표는 나의 구원은 물론 이웃의 구원에 있음을 봅니다.

네 어부들의 삶에는 획기적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이에 대한 응답입니다. 네 어부들이, 또 우리가 따르는 주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음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아드님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은 초월자이시면서 언제나 늘 오늘 지금 현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에 오른 우리들입니다. 새삼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막연한 자기 실현이 아니라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 나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회개와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더불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부질없는 만약의 질문이지만
'구원의 출구'이신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없었다면, 네 어부들의 삶은, 우리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한번뿐이 없는 유일회적 삶인데 평생을 살아도 주님을 만나지 못해 주님도 참 나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할까요! 인생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만남은 천복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버림과 따름은, 회개는 한두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여정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이에 회개로 응답하여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늘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고백처럼 말그대로
주님을 따라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사랑의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주님을 따라
하느님 바다를 향해 맑게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더불어
한결같이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맑게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 따름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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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이수철 신부
2021년 1월 11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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