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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예수님은 사랑의 법을 가르치시다
조회수 | 1,856
작성일 | 09.01.13
예전의 저는 골초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많이 담배를 피웠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세 갑 정도를 피워댔으니 얼마나 피웠는지 아시겠지요? 한 갑에 20개비가 들어있으니, 세 갑이면 60개비가 되겠지요. 그런데 잠자는 시간 8시간을 빼면, 16시간 동안 60개비를 피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1시간에 3~4개비의 담배를 피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랬던 제가 담배를 끊은 지 벌써 햇수로 8년째가 되었으니 신기하지요?

그 당시에는 습관적으로 담배에 저절로 손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담배가 없으면 괜히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중독이 아닌가 싶네요. 이러했던 제가 문득 담배에 의해 내가 구속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싫어서 8년 전에 독한 마음을 갖고 담배를 끊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한 번의 습관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 가지 동작만 계속 하게 되면 한 가지 근육만 발달하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들은 이렇게 잘못된 습관에 얽매여서 계속 반복해서 행하게 되고, 이로써 나의 잘못된 습관을 더욱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는 담배만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습관, 선을 행하기보다는 죄를 범하는 습관 등등. 이러한 습관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점점 부정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화를 자주 내고 불안한 감정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은 습관은 어떨까요? 이 역시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발달되어 나를 이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평화와 행복 속에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들은 습관적으로 가르칠 뿐이었습니다. 조상님들의 전통을 따른다는 이유로 선배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반복만 하는 나쁜 습관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규정만을 지키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법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권위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단순한 명령어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큰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인 것이지요.

우리들 역시 율법학자들처럼 과거의 잘못된 습관만을 반복해서 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대신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좋은 습관으로 하느님의 큰 힘이 내 안에 작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주위에 더러운 영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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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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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독수리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여우가 나무 위의 둥지로 기어올라 알들을 죄다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꾀바른 여우는 둥지에서 내려오기 전에 근처 덤불에 주워 온 양털을 흩뿌려놓았습니다. 독수리가 돌아와서 빈 둥지를 보고는 노발대발했지요. 애지중지 품고 있던 알을 어떤 불한당 같은 놈이 모조리 먹어치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위에 나뒹구는 양털로 보건데 범인은 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탄 독수리는 괘씸한 양들의 새끼를 낚아채 골짜기에서 내동댕이칠 심산으로 즉각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계곡으로 급강하하려는 순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가 깔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독수리는 별 수 없이 계획을 이튿날로 미루었습니다.

둥지로 돌아온 독수리는 화를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양이 무슨 재주로 높다란 둥지까지 기어올랐으며, 더욱이 그렇게 대담한 짓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풀 뜯어 먹는 양은 봤어도 새알을 집어삼키는 양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또한 주변을 봐도 양의 발자국은 찾아낼 수 없었고, 대신 여우의 발자국만 또렷이 볼 수 있었지요.

그제야 독수리는 교활한 여우의 속임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잠시 눈이 멀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지요. 독수리는 때마침 짙은 안개가 끼었던 것을 감사히 여기며 앞으로는 행동하기 전에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만약 안개가 끼지 않았더라면 독수리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양을 공격했겠지요. 그리고 애꿎은 양만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안개를 통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고, 그래서 보다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생각하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많은 이들이 성급하게 판단하게끔 만들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이렇게 성급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마귀의 유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회당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요? 틀리는 말일까요? 100% 맞는 말이지요.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마귀는 거짓만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마귀의 말이 아니라, 천사의 말인가요? 아닙니다. 마귀는 진리를 가지고도 성급한 판단으로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부각시켜서 오히려 하느님의 큰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의도를 아시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뻔 하게 보이는 거짓만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조명연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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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짓은 진실의 다른 얼굴이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기다려온 메시아(마태오), 계시된 하느님(마르코), 소외와 빈자의 구원자(루카),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요한)입니다. 요점은 ‘나자렛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것. 인간 가운데서 하느님을 본다 함은 계시의 비밀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한 후 가장 먼저 그리스도로 알아본 이는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더러운 영(악령)들이었습니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나의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악령에게 먼저 고백되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합니다.

복음서는 왜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 사실을 기록하였을까요?
악령도 영이니 영의 세계는 경계가 없고 상통한다는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신앙고백의 역설적 표현일까요?

오! 얼마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더러운 영은 정령의 존재를 드러내고 악령은 성령을 드러내는 것임을…. 그래서 악은 선을, 거짓은 진실을 드러내는 표징이 됩니다. 성령이 가려지면 악령이 활개치고 진실을 감추면 거짓이 됩니다. 그러므로 거짓말하는 자는 그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자입니다. 대통령 후보의 부정 의혹을 감추려 하나 그 진실을 아는 자 그 자신입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하여 삼성그룹의 금품 로비가 폭로되었음에도 통회의 빛 한 줌 없이 변명만 합니다. 그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도 그들입니다.

<서울대교구 박기호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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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방과 자유로 초대하시는 분

신학생 시절, 방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오면 동창생들이 함께 모여 방학생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 번은 시골 본당 출신 친구가 겨울방학 동안에 마귀 들린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본당에 마귀 들린 여자가 있어서 많은 교우들이 기도해 주려고 갔는데 이 여인이 메가톤급 신자들의 비리를 폭로해 모두를 혼비백산시키고 본당은 초상집과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마침 그 시기에 동창생이 방학을 지내러 내려가니 신자들은 크게 반기며 “우리 학사님이야 순결한 분이시니 마귀 들린 여자를 대적할 수 있겠지!” 하더란다. 다음날 신자들과 함께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다. 신자들이 여인에게 신학생이라고 소개한 후 함께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내내 이 마귀 들린 여인이 뚫어지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무슨 비리를 찾는 것 같아 두려운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어쩌면 그 여인이 마귀에 사로잡힌 부마자였다기보다는 인간적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 가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 안에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는 하느님의 빛과 은총이 역사하시는 반면에 이에 저항하는 어둠과 악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주신다.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26절). 예수님 가르침의 권위는(22절),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심을 단지 말로만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도록,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악의 세력과 싸우기까지 하심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단지 인간의 신체적 병만을 치료해 주시지 않고 인간의 근원적 병인 죄까지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사로잡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구마자이시다.

<서울대교구 구요비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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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성당에 열심히 다니셨고 또 그 누구보다도 열심 봉사 활동도 하신 형제님께서 어느 날부터 신앙생활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위의 교우들은 이 형제님께 왜 냉담을 하시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형제님께서는 “열심히 성당을 다녔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저는 그 동안 쓸데없는 일을 한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년 동안 봉사하며 수고했지만 기쁨보다는 한숨과 원망과 절망뿐이라는 것이었지요. 왜 이 형제님께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요? 바로 사랑의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했지만, 그 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낀 거죠.

이 분의 진짜 문제는 주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생활 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임을 느꼈어야 했었습니다. 사랑의 결핍은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사랑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그 마음 안에 주님이 오시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행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고 물으십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라고 대답하지요. 그리고 이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큰 칭찬을 내리시지요. 그런데 이 대답과 다를 바 없는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런데 이 대답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명령하시며 꾸짖으시지요. 베드로의 고백과 악마의 고백이 다를 바 없는데, 왜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였을까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고, 악마들은 두려움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단지 악마들은 사랑이 아닌 그 순간을 넘길 목적으로 진리를 말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똑같은 고백을 했지만,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들처럼 살아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똑같은 행동을 했어도 정반대로 나올 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지요. 주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에 사랑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말과 행동에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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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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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설득하는데 있어서 많은 말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말보다는 적은 말이라 할지라도 힘 있는 말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하긴 많은 말은 오히려 분쟁과 다툼을 일구어낼 때가 더 많지요.

자녀를 교육할 때를 떠올려 보세요. 자녀가 숙제는 안 하고 만화만 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 엄마가 텔레비전을 끄면서 “아유, 지겨워! 너 공부 안할래?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하면서 계속해서 말하면 어떨까요? 자녀 역시 맞받아칩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그러나 많은 말을 하기보다 저음으로 “이제 공부해야지.”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자녀는 “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술 마시고 새벽 두 시에 들어옵니다. 아내가 저음으로 “늦었군요.”라고 말하면 남편도 뜨끔해하며 “미안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유, 지금 몇 신데 이제야 기어 들어와!!!”라고 말하면, 남편도 “아니, 이 여편네가 감히 남편에게 뭐라고 말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부부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 있는 말, 힘 있는 말이 필요한 것이지, 결코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떤 말을 쓰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쓰신 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회당에 더러운 영이 소리 지르며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그의 말을 잘 보지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어떻습니까? 틀린 말이 있나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시며 꾸짖으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많은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몸에서 나오는 말이냐에 따라서 더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을 자기 마음 안에 모신 거룩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이 가장 힘이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 있는 말만이 더러운 영들을 복종시킬 수 있음을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오늘 인천교구에서는 사제 17명, 부제 11명이 새롭게 탄생합니다. 성직자로 살아가면서 이들 역시 이제 계속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내 몸을 더욱 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는 사제 부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 자신의 모습 역시 반성하면서 입보다는 몸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은 힘있는 말씀이 되어 세상 구석구석에 널리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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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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