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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고난을 통한 완성
조회수 | 1,831
작성일 | 09.01.13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영도자라 하고, 구원의 영도자는 고난으로 완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영도자라는 것은 알겠는데 고난으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고난으로 완전해집니다.
고난을 통해서 고통의 의미를 배우고
고난을 통해서 고통을 견디는 힘이 자라고
고난을 통해서 겸손이 자라고
고난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사랑이 자랍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도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이토록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고난을 통해 우리 불완전한 인간이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아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미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완전해지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고통의 인간을 구원하실 분은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군대도 갔다 오지 않고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 하지 않으시고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굳이 말씀께서
이 세상으로 발걸음을 하시지 않고서도 이 지상에서도 이곳저곳을 굳이 돌아다니며 수고수난을 당하시지 않고서도 반대자의 반대를 받아 돌아가시지 않고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능력으로 구원하려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껴안으시고 마지막으로 논개처럼 우리 인간의 죽음까지 다 껴안고 돌아가셔야 당신 사랑의 구원은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가파르나움까지 오시어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구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삶의 자리까지 오시어 우리의 아픔을 당신 눈으로 몸소 보시고 우리의 하소연을 당신 귀로 친히 들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당신 손으로 친히 어루만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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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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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속도에 맞추어

얼마 전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교육분과 연수가 있었다. 거기서 ‘핀란드 학교교육’에 대한 취재 내용을 보았다. 맨 먼저 내 마음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핀란드의 교육 목표였다. ‘학교교육에서 뒤떨어지는 학생이 없게 하는 것’이 국가 수준의 교육 목표였다. 그에 따라 국민들의 경제·문화적 차이에도 고른 교육 기회를 통해 대학교까지 무상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실 안에서도 전체적인 수업을 하는 선생님과 함께 속도가 느린 학생에게 맞추어 지도하는 다른 선생님이 계셨다. 그래서 학생 개인의 수준에 맞게 배우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지 못한 우리 학교 현실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 결과 국제 교육 성취도 평가에서 핀란드 학생들은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의 학업 성취를 보이며 전체적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편차가 심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행복하게 배우며 가르치는 핀란드의 학교가 내게는 참으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의 현장으로 느껴졌다. 비교에 의해 속도가 빠르고 느리다고 하기보다 각자의 고유한 속도가 존중되고 받아들여지는 교육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위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획일적인 잣대로 줄 세우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며 모두를 살리시는 데서 우리의 온 존재에 감동을 주는 권위를 지니신 참 스승님, 이제 그 뒤를 따르는 우리가 한 걸음씩 작지만 귀한 걸음을 내디딜 때다.

사랑의 씨튼 수녀회 조정희 수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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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슨 상관이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랑이 멀어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하신 예수님을 잊어먹게 되었다는 말이고, 이는 반대로 우리 교회가 가난하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한 이웃들도 외면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무관심은 우리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간다.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아파트 문화생활 가운데서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오늘 마귀는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예수가 누구신지 명확히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아무런 관심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나와 예수님과는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면서 베드로의 사양을 질책하시면서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그렇다면 발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청하였다.

예수님과 나와 관계가 있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 그 거래는 섬김과 봉사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분의 섬김을 받은 나이기에 나 또한 이웃을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기는 거래가 맺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인 동시에 맏형님이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과의 형제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기에 우리 또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와는 형제성을, 하느님과는 자녀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그분과의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관계성은 같은 동료 인간들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과 같은 피조물인 자연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오늘 마귀가 고백한 대로 우리는 참으로 주님과 묘한 관계에 놓이고 만다. 아무 상관이 없게 될 수도 있다. 비록 우리가 그분에 대한 지식은 마귀 못지 않게 하루하루 늘어간다손치더라도...

가끔 굿뉴스 게시판에서 우리는 국내외 우리 한국인 본당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형제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형제들을 비난하는 어조의 신보수주의적 사고도 눈에 띈다. 이러한 자세는 마귀의 지식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 뿐 그렇다고해서 주님과 진실한 관계에 우리를 놓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참된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동료 신자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갈라진 형제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짓밟힌 피조물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과 정말로 상관있는 사람이 된다. 이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최대 목표를 이 형제성 회복에 두면 어떨까?

내가 가장 최우선 관심을 가져야 할 회복 대상은 누구인가오늘 힘있게 되물어보자!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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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이라는 빛으로 그동안 지나쳤던 제 내면을 보게 됩니다. 아주 캄캄한 부분도아주 자세히 보게 됩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제 어둠을 주님께 말씀 드리게 됩니다. 모든 걸 주님께 말씀드리는 거기에서치유는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과 마주하며 구체적인 부분까지 말씀을 나누게 될 때 우리 마음은 조용해지고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분열된 우리 내면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기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님과 나누는 기도의 삶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참된 식별이란 더러운 영의 추방처럼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내지 못하고 사는 우리 삶입니다.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내지 못하기에 우리가 괴로운 것입니다. 부질없는 것들을 내보내야 조용하고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생명은 더러운 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만 새로워짐을 깨닫게 됩니다.

조금씩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은총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으로 생명의 등불을 밝히는 주님은 분명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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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추방 -말씀의 위력-

히브2,5-12 / 마르1,21ㄴ-28

"구세주 주님이여 간구하오니, 우리게 인자로이 내려오시어, 우리의 마음속에 천상밝은빛 가득히 넘치도록 내려주소서“

주님 세례 축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찬미가 둘째 연이 은혜롭습니다. 주님의 천상 밝은 빛이 마음 속 어둠을 몰아냅니다. 악령은, 괴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무의식 안에 잠재해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된다는 말도 있지만, 죄인에게서 죄와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천상빛 뿐입니다. 주님의 천상 밝은 빛만이 무의식 안에 잠재해 있는 악령을, 괴물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제각기 선한 남녀들도 서로에게는 악한 사람이 되는 수가 있고, 제각기 악한 남녀가 서로에게는 선한 사람이 되는 수도 있는 게 결혼이다.“

얼마 전 읽은 구절이 깊은 묵상자료입니다. 참 불가사의한 인간관계입니다. 어찌 부부관계뿐이겠습니까? 사람간의 관계도 이런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악의 신비'입니다. 이런 악을 퇴치할 수 있는 분도 거룩하신 주님뿐입니다.

어제 유수일 주교님께서 여기 뉴튼수도원을 방문하셨을 때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성당 앞에서 저녁기도 준비차 서 있을 때 들어오셨고 즉시 강복을 청해 받았습니다. 순간 뉴튼수도원이 환해 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 주교님이 오시니 뉴튼 수도원이 밝고 따뜻해진 느낌입니다.“

식사 때 드린 덕담입니다. 이런 체험은 요셉수도원에서 있을 때도 간혹 겪은 일입니다. 주교님이나 아빠스님이 방문하셔서 묵으실 때는 마치 보물을 지닌양 부자된 듯 마음 든든하고 분위기도 밝고 따뜻했습니다. 떠나셨을 때는 마치 수도원이 대청소를 한듯 깨끗한 분위기였습니다. 바로 빛이신 주님께서 교회의 어른들을 통해 수도원을 방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제 주님이 방문하신다면 그 영향력은 얼마나 크겠는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이를 입증합니다.
말그대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생명이자 빛이신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의 신선한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사람마다 무의식 깊이를 꿰뚫는 강렬한, 그러나 밝고 따뜻한 천상빛에 더러운 영은 숨을 데가 없자 저절로 뛰쳐 나오며 주님을 고백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주님의 천상밝은 빛만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악령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즉각적인 주님의 명령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말씀만이 악령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오늘 지금 미사를 통해 새롭고 권위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며 악령을 추방하십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악령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거룩한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은총이 우리를 성화하여 악령의 어둠을 퇴치합니다.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거룩하신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의 천상빛만이 무의식 속속들이 치유하고 정화하고 성화하여 악령이 발붙이지 못하게 합니다.

비단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뿐 아니라 성무일도 및 미사 모두에 확장 적용되는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요, 일상의 전 삶에 파급될 때 비로소 관상적 삶, 천상적 삶의 성취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바로 시편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구세주 예수님을 렉시오 디비나한 열매입니다. 시편 8장을 렉시오 디비나 하여 그리스도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 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활약상,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이들이 시편8장을 렉시오 디비나 한 열매임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저자처럼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말씀을 육화해갈 때 천상빛 가득한 거룩한 삶, 관상적 삶입니다. 우리 역시 구원의 영도자 주님처럼 삶의 온갖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될 때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어둠의 세력을 말끔히 청소해 주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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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 1,22)

오늘 복음은 이른바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1,21-39)의 한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신앙고백, 기도, 모세오경과 예언서 봉독, 설교 순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하셨다. 거기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다. 이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 이유는 그분의 가르침이 당시 회당에서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던 율법학자들과 달리(1,22)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1,27)이었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은 모세오경과 조상들의 전통을 근거로 율법을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기 위한 수많은 세부지침을 만들었다. 시작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나 결국은 그 본질은 자비와 자유가 아닌 인간을 구속하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힘을 지녔는데, 그 힘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었고 창조의 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 으로 사람들을 죄와 억압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느님의 자비로 인간을 살리고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랑의 권위에 ‘몹시 놀랐던 것이다.’(1,22)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어떻게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좋을까? 모든 권한행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모두의 성장과 행복을 도모할 때 진정한 권위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을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공동선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하시며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보여주셨다. 권위는 권한행사에 사랑이 배어있을 때 드러나고, 다른 이를 섬김으로써 다른 이들이 행복해질 때 참 권위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우리 모두의 구원이요 해방이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지배를 위한 힘의 행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집중된 권력의 행사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1,24)라고 외친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알지만 관계단절을 선언하였다. 하느님 체험에 근거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더러운 영’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과 생명을 지닌 우리는 예수님과 늘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처럼 모두를 살리고 해방하는 데에 힘을 써야 한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일상화 하고 있는 ‘진실 덮기’, ‘계층 간의 심각한 차별화’, ‘이념 대립’, ‘제5의 권력인 재력의 횡포’, ‘인간다운 삶을 도외시한 정치’, ‘자본의 우상화’ '집단적 이기주의' 등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실상이 바로 ‘더러운 영’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향해 오늘도 “나가라고 꾸짖으신다.”(1,26) ‘꾸짖다’(ἐπιτιμάν, 4,39; 9,25)는 말은 그리스어 성서에서 하느님의 능력 있는 꾸짖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였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권위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신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의 힘으로 우리 가운데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지도록 참된 권위를 행사하도록 하자!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권력, 재력, 능력을 하느님 뜻을 거슬러 사용함으로써 '더러운 영'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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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참된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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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호통을 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 광경에 몹시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권위에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이 힘을 지혜롭게 사용하면 현인이 되고 미련하게 사용하거나 나쁜 욕심을 부리면 우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수도회에서 평의원과 마케팅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수도회에서 새로운 준관구 통솔을 선출했을 때 총평의원 두 분이 저에게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의원은 ‘권위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년 남짓 평의원을 맡으면서 그 ‘권위와 사랑’을 함께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한쪽에 치우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짐합니다. ‘권위와 사랑’을 균형 있게 행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도움을 항상 간구하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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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김동주 수사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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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인 악마추방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인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무슨 권위 인가?

다름 아닌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마 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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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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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1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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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 복음 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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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믿음의 시작은 고요함의 시작이다.
시끄러움은 고요함으로 해결되어야한다. 고요해져야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된다. 무엇을 꼭 해야지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해져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스럽지만 맞닥뜨려야할 순간이 있다. 뒤엉켜버린 우리 내면을 정화시키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고요함의 관계가 주님과 참된관계이다.

고요함은 겸손함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빈 자리가 없다.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이와같이 고요하다. 비워낼 때 투명하고 아름답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은 결코 요란스럽지않다. 고요하고조용할 뿐이다. 고요함이 제자리를 잡는 은총이다.

고요함이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고요함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은 사람에게서 나가라. 믿음으로 고요함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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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1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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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   [수도회]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3] 2005
1479   [부산/원주/제주/수원] 소작인이 강도가 되기까지...  [6] 2651
1478   [인천/서울/의정부] 나만 잘되면 그만이리라 생각  [3] 2377
1477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죽여 버리자)  [5] 1974
1476   [수도회] 누가 더 불행한가?  [3] 2032
1475   [부산/제주/원주/전주/수원] 부자와 거지 라자로  [6] 2749
1474   [인천/의정부/서울] “나는--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5] 2228
1473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  [6] 1912
1472   [수도회] 섬김의 리더십  [8] 1916
1471   [부산/원주/제주/청주/수원]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마음...  [7] 2290
1470   [인천/서울]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5] 3048
1469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다)  [6] 1955
1468   [수도회] 하느님 앞에 우열 없이  [5] 2057
1467   [수원/청주/전주/원주] 율법의 근본 정신!  [5] 2494
1466   [인천/서울] 진정한 믿음이란?  [3] 1937
1465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6] 2139
1464   [수도회]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5] 2080
1463   [부산/제주/청주/수원/원주/전주]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풀어라.  [10] 2268
1462   [인천/서울] 사랑하지 않을 이유…….  [3] 2126
1461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남을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7] 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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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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