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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수원/부산/전주] 악마의 기도
조회수 | 1,967
작성일 | 09.01.13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첫 제자 네 명을 부르신 다음에 하신 첫 번째 행동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자기과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표징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히 알았기에 그분을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마르 1,24).사람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데, 악마는 그것을 벌써 알고신앙고백까지 한 것입니다.

악마의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그저 하늘에 계십시오.
그 대신 제 이름이 거룩히 빛나며,
제 나라가 임하며,
제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이 악마의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실제로는 악마의 기도를 바치며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란 악마의 기도에서 주님의 기도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신앙고백까지 하더라도
참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악마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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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이중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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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었다

유다인들의 ‘회당’은 우리의 ‘교회’와는 그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회당은 주로 교육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기도, 성서 봉독, 그리고 말씀에 대한 해설을 하였다. 그곳에는 음악도 희생제사도 없었다. 성전이 예배와 희생제사의 장소라고 한다면 회당은 교육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다. 유다인들은 10가구만 되어도 회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율법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유다인의 거류민단이 있는 곳에는 의례히 회당이 있었고 새로운 메시지는 바로 그 회당에서 전해졌던 것이다.

이 회당에는 회당장과 봉사자가 있었는데 회당장은 회당의 업무관리와 예배준비의 책임이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헌금이나 물건을 기증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봉사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쓰여진 두루말이를 내왔다가 들여놓는 일, 회당의 청소, 사람을 모을 때 나팔을 부는 일, 어린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시키는 일 등의 회당장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 상임 설교자나 상임 교사는 없었으며 사람들이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회당에 모였을 때 말하고 해설할 수 있는 유능한 삶을 회당장이 지명해서 하도록 했다. 이러한 여건들이 예수께서 회당에서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실 수 있었고 사람들을 쉽게 모아 가르칠 수 있었던 여건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 회당에서 백성들의 믿음의 생활을 이끌어오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즉 그들의 선생들의 가르침과는 달랐고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경탄했던 것이다. 유다인들의 선생들은 모세 오경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으로 가장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인간생활에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믿어 생활에 실천하기 위해서 수만 가지 법규를 만들어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위대한 도덕적인 율법에서 시작해서 규율과 규칙으로 끝났으며, 믿음에서 출발하여 율법주의로 끝났다. 또한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생활을 자신들이 규제하는 율법과 그것을 풀이한 가르침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시고 사람들을 죄와 약점에서 해방시키시어 인간의 삶으로 들어 높이시는 가르침이었기에 사람들은 놀라 경탄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믿음은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믿음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생활 하나 하나를 규제하고 억압하는 믿음의 생활인가? 즉 율법주의적인 강박 관념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인가? 고백성사를 보기 싫어서 억지로 주일에만 겨우나오는 삶인가? 아니면 선행과 사랑, 하느님께 기쁨을 가지고 소신 있게 나아가는, 그리고 감사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신앙생활인지 반성해 보고, 우리의 믿음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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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역시 말의 힘은 행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풋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게 되었다. 개업 첫날이었다. 손님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옳지, 이제야 손님이 오는구나. 첫손님이니 내가 꼭 사건을 맡아야지.’ 이렇게 생각한 변호사는 어떻게든 손님에게 신뢰감을 줄 양으로 개통도 되지 않은 수화기를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애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일감을 맡고 있는지를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손님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온갖 제스처를 다 써가며 더 큰 소리로 지껄였다, “사실 맡은 사건이 많아 요즘 제가 무척 바쁩니다. 오늘 아침에도 손해배상소송사건을 의뢰해온 분이 계신데 일이 밀려 제가 거절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일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제가 맡아 드리겠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른 손님이 오셔서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변호사는 손님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손님은 무슨 사건으로 오셨죠?”
그러자 손님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이어 드릴려구요.”
전공은 아직 개통하지 않은 전화기의 선을 찾아 잇기 시작했다.
방금 그 변호사가 들고 지껄였던 전화기였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사람은 허세를 부려서라도 자신의 능력을 드려내고 자랑하려고합니다. 말하자면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특히 요즘 같은 상업화된 사회일수록 과장된 홍보와 말들이 넘쳐납니다. 홈쇼핑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말들을 잘 하는지 금방이라도 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게끔 만듭니다. 또 각종 홍보물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쏟아지는 전단지, 각종잡지, 인쇄물들이 넘쳐나 제 같은 경우엔 책상이 어지러운 건 물론이고 봉투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도 허다합니다. 무슨 하고 싶은 말들이 그리 많은지요.

저 역시 매일미사 강론을 합니다만 어떤 때는 잘 준비되지도 못한 강론을 하면서 마음에 와 닿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말을 하고 살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함을 생각할 때 그 강론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없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역시 말의 힘은 행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나 “아직도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누지 않아서 입니다.”라고 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 등, 유명인사나 위인의 금언을 들을 때 가끔은 “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데”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지요? 그렇다면 누구나 깊이 생각하면 할 수 있는 말이 오늘날까지 “누구, 누구의 금언”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멋진 말을 남겨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말을 평생 삶으로 살아 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어서 악령까지 굴복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예지의 능력이 있는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고 발작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초월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더 두드러집니다. 악령 들린 사람을 해방시켜 주시는 모습에서부터 비롯하여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는 등 수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광경은 예수께서 얼마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가를 여실히 보여주시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지도자와 억박 지르고 허세 부리는 지도자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허세와 권위주의에 찬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당신의 삶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빈말이나 겉치레가 아닌 진실된 삶의 자세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부산교구 방삼민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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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음선포의 항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 네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체 없이 그분을 따라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로서 시몬과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그들이 고기를 잡는 배와 그물은 버렸지만 사람을 낚는 배에 올랐다. 배의 이름은 ‘복음선포 호(號)’이며, 선장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선원들이며, 목적지는 세상이라는 항로를 통한 하느님나라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죄로 물들어 구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복음선포의 항해(航海)를 시작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항해 첫 하루의 일과를 들려준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복음선포 호가 가파르나움에 도착하였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예수께서 첫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보낸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일컬어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마르 1,21-39) 라고 한다. 안식일에 먼저 회당을 찾아가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회당에 있던 악령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 회당을 나와 시몬의 집에 들러 열병으로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해 주셨고, 문 앞에 모여든 온갖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이튿날 새벽에 홀로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다음 선교 장소를 향하여 닻을 올리시고 돛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루는 이렇게 흘렀다. 물론 안식일 하루에 이 많은 일들을 수행했다는 점이 다소 과장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파르나움에서의 하루’ 안에 마르코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활약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 생애가 하루로 요약된 것인 셈이다.

예수께서 복음선포의 첫 하루를 가파르나움의 회당(會堂, Synagogue)에서 시작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고 유배생활을 시작하던 때부터(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여 곳곳에 지어진 회당은 유다인들의 종교와 신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회당에 들러 기도하였으며, 안식일에는 모두가 회당에 모여 야훼신앙을 고백하고, 모세오경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그 내용을 설교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오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의 가르침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가르침의 권위에 놀라버렸다. 그 가르침의 효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경과 예언서를 바탕으로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가르치는 율사들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의 권위는 오히려 악령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예수는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선포 첫 날이 권위 있는 가르침과 더불어 더러운 악령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시작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점이다. 마르코복음에서 뿐만 아니라 루가복음에서도 이 구마기적이 예수님 공생활의 첫 번째 기적으로 보도된다.(마르 1,21-28; 루가 4,31-37) 이는 도래한 하느님나라가 근본적으로 세상의 악한 세력과 대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성취는 세상의 악(惡)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을 제거하는 일이 구마기적과 같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악을 일삼는 세상과 인간의 회개와 참회로 이루어지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오늘 복음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움과 찬사를 보냈으나, 예수를 믿지는 않았다. 악령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이는 믿음에의 순종이 아니라 두려움에의 복종이다. 따라서 사람들도 악령도 모두가 아직은 악의 암흑 속에 있다. 진정한 믿음의 순종은 빛과 진리이신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며,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복음선포의 항해는 계속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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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이 꽃 보다 아름다워

강론시간이 가요 톱 텐이나, 뮤직뱅크 시간이 아니데, 요즘 들어 가요를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안치환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람의 꽃보다 아름다워”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 누가 뭐래도 ―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하아 햐

노랫말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런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꽃이 사람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장미, 백합, 극락조, 초라한 잡초라 하더라도, 그 꽃이 저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노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 소중함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존재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함, 가치를 따진다면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우월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만이 최고요, 중심이기에 자연과 다른 창조물들을 훼손하고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최고’란 의미는 지배 피지배의 개념이 아니라, 소중함의 의미입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숨결, 넋으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외칩니다. “나자렛 예수님,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떠나거라.” 꾸짖으시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기에, 치유해 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묵상하며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이 외침이 마음에 남습니다.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영, 곧 마귀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모상을 갖고 있고,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습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는 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도 예수님에게는 소중한 존재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에도 예수님께는 그러한 존재이기에… 구원의 대상이기에 더러운 영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으로 나약하고, 많은 잘못과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자신과 이웃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안겨준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또한 시편 저자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인간을)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꽃보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다짐을 드리며 새롭게 시작되는 연중 시기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아멘.

<부산교구 이찬홍 신부>
  |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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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악령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전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신 두 가지 일, 곧 권위 있게 가르치신 것과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신 일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예수님의 힘의 증거입니다. 곧 권위가 충만한 가르치는 말씀과 힘이 충만한 구마 말씀, 이 둘은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입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는 어디를 가나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은 신앙생활과 종교 교육의 중심기관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22절)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의 관습에 따라서 성서를 읽고나서 말씀하셨지만 그분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달리 성서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종종 인간의 해석과 규정들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본래의 뜻을 행하는 데 실패하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뚜렷한 의식을 가지시고 당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넘치는 확신과 절대적인 권위로서 가르치시고 성서본문에 대하여 당신 자신의 해석을 가하십니다. 이렇게 커다란 권위로써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준 직후, 한 악령들린 사람과 당신과의 만남으로 이 감동은 더 커집니다. 악령들린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적대자는 예수님의 구원활동과 하느님 나라의 개시를 멈추게 하기 위해 그의 세력 일체를 불러 모읍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더 강하심을 입증하시고 사탄의 나라를 격퇴시키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과 더러운 악령과의 대화는 적대자간의 교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악령은 자기의 “거처”에서 자기를 제거하고자 하시는 분, 그리고 자기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을 구하고자 하시는 힘있는 분의 현존을 감지하고는 탄원을 외쳐댑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큰 외침과 반항적인 질문은 구마자의 공격을 막아 보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악령의 이 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 방어의 수단인데, 타락하였을지라도 천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악령이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나라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앞에 서 계심 자체가 자기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입니다. 악령은 곧 예수께 대하여 싸움을 걸려고 시도할 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될 예수님의 위격, 즉 감추어두어야 할 비밀을 재빨리 폭로하여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좌절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더러운 영의 외침에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명령하심으로써 악령을 복종시키실 뿐입니다. 이제부터 악령들의 힘은 그분에 의해 부서질 것이며 이 깨지고 부서지는 악마의 나라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데 그분의 복음 선포의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령의 이 말들은 자기 눈앞에 다가온 패배 때문에 오는 공포와 격분을 나타내는 첫 비명소리인 셈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시도된 구마사건에 대해 하느님께서 승리를 보증해주고 있고 예수님의 우위성, 즉 예수님이 악령보다 강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 있고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며 모든 존재는 그 명령에 복종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우월함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보다 인간적 전문가의 어떤 모습에 더 신뢰를 두고 있거나 혹은 복음의 원리보다 신문이나 잡지의 유명인사의 칼럼에 우리의 가치관을 따르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을 듣기보다는 주식시장의 말을 더 따르거나 예수님의 계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우리를 모든 죄와 악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세주이심을 확신합시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는 3가지 구원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께 우리의 신뢰를 둡시다.

“오 사랑하올 예수여, 구원의 모든 적들로부터 저희를 보호해주소서. 저는 그것을 제 자신만으로 할 수 없사오니 당신의 강한 팔로 저를 붙들어주시어 그 어떤 것도 당신과 저의 사랑을 갈라놓지 말게 해 주소서. 아멘.”

<부산교구 윤명기 요한 칸시오 신부>
  |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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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예전에 제가 있던 본당에 너무나 착하고 모범적인 형제님이 한분 계셨습니다.이 형제님은 온갖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다 도맡아서 하면서도 불평불만 없이, 묵묵하게 겸손하게 그 일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분들이 다 그 형제님 너무 좋다고 착하다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만 칭찬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일까요? 네. 바로 그 사람은 그분의 와이프였습니다. 그 아내 분은 사람들이 형제님 정말 좋다고 얘기하면 같이 한번 살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같이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를 보면 남자가 여자를 ‘알아’라고 할 때, 그 ‘알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지적인 앎을 넘어서는 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앎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인가? 진짜 구약의 예언자 중 한 사람인가? 아니면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인가? 그도 아니면 진짜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만 많고 실제로는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복음 활동을 시작하실 때, 아무도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설교말씀을 듣기 위해 따르던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의 능력과 권위 있는 설교말씀에 이끌려 모였습니다.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고 제자들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본 존재는 바로 더러운 영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참으로 아이러니한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경우는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존재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분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을 입으로 외우며 기도는 하지만 가슴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예전에 신자 분들을 대상으로 ‘성당을 왜 다니는가?’에 대한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안정,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친교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제 부활을 믿기 때문에 성당에 다닌다고 대답한 사람은 30%도 채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저 주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 대해 제대로 알고, 또 끊임없이 배울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또 우리의 신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더 우리의 신앙이 굳건해 질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더 많은 앎을 통해서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부산교구 김병수 신부>
  | 01.15
465 94%
[수원] 하늘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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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이스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입니다. 그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보며 그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곳에 내 이름을 딴 도시를 하나 건설하여라.”

그렇게 해서 건설되었던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후에도 로마,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함께 가장 위대하고 문화적으로도 강력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말의 위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권위가 있는 말’은 그 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한 이들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는 달리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저 말이 내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켜서만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압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랬더니 기리기리 날뛰던 마귀는 그 사람에게서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이것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랍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면 마귀도 저항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말씀에 그런 권위를 지니시게 된 것일까요? 말씀에 권위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 말씀에도 하느님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는 그 행실로 드러납니다. 제가 어떤 신학생이 너무 게으른 것 같아서 좀 부지런해지라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하루에 6시간도 안자는 사람이 많다. 너는 사제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무질서하게 산다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니?”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산다는 것을 알까요? 강론 대에서 좋은 말만 해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네 삶과 반대되게 가르치겠다는 거야?”

“올바른 가르침만 주면 되죠.”

물론 저의 간섭이 싫어서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강론 대에서 위선적으로라도 감동적인 강론을 해 주면 신자들의 삶이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이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 말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이 일어나게 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 분은 먼저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당신 자신이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말은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이 매일 싸우면서 자녀들에게는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고, 당신들은 텔레비전만 보며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왜 안 하냐고 호통을 친다면 그런 말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권위는 ‘성령’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어느 정도 충만해 있느냐에 따라 그 말과 행동에 권위가 드러납니다. 세상이 주는 학위나 세상적인 명예로는 율법학자들과 같은 위선적 권위만을 내세울 수밖에 없고 어떤 때는 자신들이 존경받기 위해서 매우 ‘권위적’으로 변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과, 마더 데레사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과, 우리 보통 사람이 말하는 것과 또 미움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모범을 보이신 분의 말만이 권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권위가 있어지기 위해서는 좋은 화법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한 마디만 해도 커다란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선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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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01.26
465 94%
[전주] 우리를 형제의 반열에 올리는 주님의 사랑(히브 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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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히브 2,12)

사도 바울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리켜 형제라고 부르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형제라고 부르신다.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주님의 형제가 될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1고린 1,29)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자신을 들여다보면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자신의 업적이나 지위도, 그 무엇도 내세울 수 없다. 하느님 앞에 서면 사람은 티끌이나 먼지에 불과하다.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죄와 허물로 얼룩진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처럼 보잘것없고 죄 많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형제가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강생하셨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그처럼 당신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이 곧 우리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베푸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특히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당신의 혼을 불어넣어 손수 만드셨다. 그리고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동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도록 하셨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만 받고 살기보다 자신이 직접 하느님처럼 되어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자 했고, 그 결과 죄를 짓게 되었다.

죄는 모든 것을 갈라놓는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자연 사이를 갈라놓는다.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 다른 사람과, 자연과 멀어지게 된다. 죄는 그 사람 앞을 가로막고 그를 죄 속에 가두어놓는다. 그는 죄에 가로막혀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를 벗어날 수도 없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죄 속에 갇힌 사람을 구해내실 수 있다.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느님을 벗어났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변함이 없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죄 속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어 죄 속으로 들어오셨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주님의 강생, 그것은 곧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을 드러내는 표이며,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하느님 사랑을 가장 크게 보이신 표이다. 다른 누구 아닌 나 자신을 위하여 창조주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비천함을 스스로 취하셨던 것이며,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이다.

더욱이 죄인인 나를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형제라고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비천한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주 하느님과 같은 반열에 올리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처럼 크고 위대하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도 아니고, 의롭게 살았기 때문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입김을 불어 넣으시고(창세 2,7) 당신의 모습대로(창세 1,26) 당신께서 직접 만드셨기 때문이다.

나,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입김으로 창조된 나는 그만큼 소중하고, 고귀하며, 사랑받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사랑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은 죄까지도 뛰어넘는 사랑으로 나를 부르시며, 나를 당신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신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자. 그리고 자신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받는 자녀답게 사랑으로 살아가자. 마음속 깊이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여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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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1.26
465 94%
[청주] 권위 있는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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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여야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여당은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국정운영 구상을 소상하게 밝혔다.”고 평가했고 반면 야당은 “고집불통의 오기만 확인된 회견이었다.”고 혹평했습니다. 어떤 이는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은 없었고 대통령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하나마나한 신년 기자회견이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조차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듣다가 꺼버렸다니 그 어디에도 ‘권위’는 없는듯합니다.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아니라 ‘권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 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악령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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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1.26
465 94%
쉽게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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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서 가장 큰 스승은 부모님과 호인수 신부님이다. 세 분 모두 말이 아니라 당신 삶으로 나를 가르치셨다. 호 신부님은 글이나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특히 어려운 글이나 말은 더욱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또 어렵게 말하는 건 자기도 몰라서 그런 거라고 하신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되도록 쉽게 쓰고 말하려고 애쓴다. 그러려고 공부한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사명선언문은 이렇다. ‘우리는 이 시대 한국인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간다.’ 우리신학을 한다는 건 이 시대 한국인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를 살아가기 위해서다. 알아듣기도 어려운 얘기를 살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평생을 우리말글 살리기에 바치신 이오덕 선생은 우리말글을 더럽힌 게 지식인이라고 했다. 지식인의 말글이 삶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말이 어려워지는 건 삶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쉽다. 우리말글을 살리려면 입말을 살려 써야 한다는 게 이오덕 선생의 주장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남더러 살라고 하면 거짓이다. 그 거짓을 숨기기 위해 말이 어려워진다. 날이 갈수록 교회 말(교리)과 신학이 어려워지는 것도 교회 스스로 그리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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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 박영대
  | 01.26
465 94%
호시탐탐 노리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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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딸 셋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 딸들은 하나같이 미인이었지만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큰딸은 너무나 게으름뱅이였고, 둘째딸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고, 셋째딸은 남을 험담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옆 마을에는 아들 셋을 둔 부자가 있었다. 그는 세 처녀를 모두 며느리로 삼고 싶어 딸들의 아버지에게 사돈을 맺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세 딸을 둔 아버지는 부자에게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느냐고 하자 부자는 그런 문제는 자기가 책임지고 꼭 고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제발 세 딸을 모두 자기 며느리로 삼게 해 달라고 졸라댔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부자의 아들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첫째 며느리인 게으름뱅이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를 거느리게 해주었고, 도벽이 심한 둘째 며느리에게는 창고 열쇠를 주어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같이 불러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딸들을 출가시킨 아버지는 딸들이 못된 버릇을 버리고 정말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어느날 사돈집을 찾아갔다. 친정 아버지를 만나자 큰딸은 하녀들이 있어 몸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했고, 둘째딸은 자기가 창고 열쇠를 가지고 있어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셋째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매일매일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친정 아버지는 사돈집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셋째딸의 버릇만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셋째딸은 자신의 나쁜 버릇을 충족시켜 주려는 시아버지까지도 헐뜯고 욕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더러운 악령에게 “입을 다물고 썩 물러가거라” 하시며 꾸짖으신다. 악령은 예수님 앞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 예수의 정체에 대한 고백을 하지만 뒤에서는 늘 호시탐탐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다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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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공동체 이희수
  | 01.26
465 94%
[수원]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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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였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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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주욱현 신부
2021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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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  [6] 1912
1472   [수도회] 섬김의 리더십  [8] 1916
1471   [부산/원주/제주/청주/수원]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마음...  [7] 2290
1470   [인천/서울]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5] 3048
1469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다)  [6] 1955
1468   [수도회] 하느님 앞에 우열 없이  [5] 2057
1467   [수원/청주/전주/원주] 율법의 근본 정신!  [5] 2494
1466   [인천/서울] 진정한 믿음이란?  [3] 1937
1465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6] 2139
1464   [수도회]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5] 2080
1463   [부산/제주/청주/수원/원주/전주]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풀어라.  [10] 2268
1462   [인천/서울] 사랑하지 않을 이유…….  [3] 2126
1461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남을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7] 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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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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