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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수수깡 색안경
조회수 | 1,685
작성일 | 09.04.28
어릴 때 색안경을 끼고 놀던 생각이 납니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겉에 다양한 색의 셀로판지를 끼워보면 세상은 빨갛게, 파랗게, 노랗게 변해갑니다. 세상의 색을 내 입맛대로 고르며 바라보는 안경 너머 세상은 자기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채 어느새 내가 원하는 색으로 변합니다. 나는 그것이 진짜 세상인 양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선생님을 보고 믿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군중의 질문에서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보여주지 않으면 도무지 믿을 것 같지 않은 완고한 기운이 느껴져옵니다. 마치 원하는 색을 끼워 세상을 바라보는 수수깡 안경 속의 눈처럼 고집스런 종교적 신념의 안경을 끼고 있던 그들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마저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자기들의 신앙을 고집합니다.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야 믿을 수 있는 기적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 옛날 자기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다는 만나의 기적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참된 빵,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라 하시며 이들이 원하는 표징을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잘못된 신앙의 색안경을 쓰고 예수님께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나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정명숙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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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er Christo인 스테파노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오늘 사도행전의 스테파노는 성령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제 성령의 눈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먼저 하늘을 유심히 봅니다.
그렇게 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보입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하늘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육의 사람에게는 하늘이 막혀 세상 것밖에 보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사밖에는 보지 못하지만
영의 사람에게는 하늘이 열려 하느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하고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스테파노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기에게 돌을 던질 때 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하고 기도하고,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주님께 외칩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고 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떠올립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스테파노는 예수가 되어
예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를 일컬어 Alter Christo라고 하는데
스테파노도 Alter Christo(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본 하늘을 보라고 하고
하느님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청합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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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친절의 하느님

언젠가 형제들과 농가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점심 식사로 도시락까지 맞춰 갔었는데, 홀로 사시는 할머님, 막무가내셨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큰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냄새부터 다르더군요.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흘렀습니다.

후덕하신 할머님, 아니나 다를까, 밥공기 크기부터 달랐습니다. 놋쇠로 된 무거운 밥그릇은 보통 식당 공기그릇의 거의 두 배였습니다. 그런 그릇에 밥을 꽉꽉 눌러 담은 다음, 또 다시 애써 고봉으로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껄쭉하게 잘 끓인 청국장을 큰 대접에 한 대접씩 퍼주셨습니다.

밥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밥공기에 든 밥은 통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저희 모두는 하나같이 밥그릇, 국그릇, 비운다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았다, 이제 다 먹었다, 했는데, 비호처럼 다가오신 할머니, 어느새 제 밥그릇 안으로 밥 한 주걱을 더 얹어주시며 하시는 말씀.

“덩치는 산만한 장정들이 밥 먹는 게 통 시원찮여! ”

‘밥 고문’ 당할 당시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일방적인 할머니가 엄청 미웠지만,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할머님으로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겠지요. 할머님과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더 잘 먹이려고, 더 많이 먹이려고, 더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망을 가고, 우리가 외면을 해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과잉친절’의 하느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위로를 주셨습니다. 격려를 주셨습니다. 새 출발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살과 피를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비와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풍요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되풀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바를 관대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싫다고 해도 쫓아가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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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얼마나 힘찬 선언인가!
과연 예수만이 외칠 수 있는 말이다.
누가 감히 생명의 빵이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매일같이 음식을 먹지만
요 며칠간 식중독끼가 있는 듯하여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생명을 위해 먹지만
약이 되기는 커녕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단 말이겠지.

자,
나는 생명의 빵인가?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사제요 수도자인가?
아니면 오히려 잘못 먹여서
식중독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병을 주는 사제요 수도자는 아닌가?

언제
나 또한 주님처럼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으리오.

그 이전에
<내가 생명은 주지 못할 망정 독을 주지는 말게 하소서>
하고 청해야 하리라.

내가 진정 생명의 빵이 되려면
생명의 빵이신 그분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리라.
그래야만
나도 작은 생명의 빵이 되리라.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 되게 해보자.
생명의 빵이신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해보자.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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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가르다

오늘의 사도행전은 유다의 원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과
팽팽히 맞서는 스테파노의 모습을 전합니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예전 제가 참관했던 80년대
재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문 익환 목사의 시국사건 재판이었습니다.
인상에 남은 것은
죄인으로 단죄 받는 문 익환 목사가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한데 비해
죄인을 고소하는 검사들과 판결하는 법관들이
오히려 초라했던 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에 남은 것은 문 목사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최후 증언에서 문 목사님은 그때 재판정에 나와 계신
당신의 95세 노모를 얘기하시며
시아버지, 남편, 아들 3대가 옥살이하는 집안에 오셔서
일생을 옥바라지 하신 어머니께 부끄럽지 않도록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말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얘기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그 연세에도 몸도 꼿꼿하시고
아들이 또 다시 감옥에 가는데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보였습니다.
마카베오서에 일곱 형제를 차례로 순교케 한 어머니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스테파노 최후 재판정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단죄 받는 스테파노가 오히려 의연하고 당당하고
단죄하는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화가 치밀어 어쩔 줄 모르고
결국 스테파노를 감당하지 못해 죽이고 맙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지는 것인데,
결국 스테파노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지만
스테파노에게 지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고
스테파노와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영의 차이입니다.
스테파노는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습니다.
듣기에 사뭇 이상하지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하고 꾸짖습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는 할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인 것 같지만
마음과 귀는 완전히 굳어질 대로 굳어져
하느님의 소리는 귓전에도 울리지 않고
마음은 더더욱 울리지 않아
하는 것마다 하느님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겉 할례는 받았지만 속 할례는 받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무늬는 신자지만 속은 신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고 졸기만 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합니다.
어떤 얘기를 해도 불감증에 걸려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하고 그들을 질타합니다.
영을 거부하고 거역하는 완고함,
그래서 영이 죽어있는 화석의 상태가 그들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스테파노의 영이 주님의 영과 일치하고
주님의 영이 스테파노의 영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는 하늘이
주님의 영으로 인해 스테파노에게는 열리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의 영으로 인해 스테파노는 봅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마침내
자기의 영을 주님께 바치며 맡깁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o)가 되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용서청하며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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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는 빵

삼십 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해온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는 딱 한 번 주어지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공동생활을 해나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고, 제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성장의 시간 가운데 제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주님이 내 안에서 더 찬미를 받으실 수 있도록 ‘나’를 포기하며 ‘나’를 낮추는 기도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도생활뿐 아니라 제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평화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수도생활도 한결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순간에 충실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비범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어 비로소 행복한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수도자로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은 갈망을 안고 최선을 다한 저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수녀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얼이 담긴 얼굴’로 보게 되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능력도 생겨났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지난 삼십 년, 아니 더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 저를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진정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음을.

이세영 수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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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예수님

가끔씩 대책 없는 어르신들을 뵙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날들’을 생각해서 당신들 몫을 잘 챙겨놓으셔야 하는데, 이 자식, 저 자식 다 마음에 걸립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다 나누어 주다보니 이제 남은 재산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못줘서 안달이십니다. 나중에 어떡하려고 하시는지 정말 대책이 안섭니다. 이리 떼이고 저리 뺏겨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태,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이제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더 대책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나눠주고 이제 그분께 남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은 마지막 몸뚱아리조차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시며 우리에게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엇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애가 타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내내 음식과 무척이나 관련이 있었습니다.

‘빵집’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말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들이대던 곳, 건초가 가득담긴 말구유에 뉘어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허기진 백성들의 해결사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들의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해주시기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보다 강건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나약한 인간에게 당신의 신성(神性)을 공유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죄인인 우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내어놓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목숨인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과분한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그 큰 사랑, 측량할 길 없는 감사의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주님 현존의 장(場)이 어디 있을까요?


의외로, 또 은혜롭게도 그 장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되풀이하십니다. 매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시는가 하면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성체성사에 참석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의 신비에 깊이 침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홍해를 통해 죽음의 땅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어제의 나와 결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악습으로 물든 지난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때 마다 우리는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반복해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과감하게 아래쪽을 포기하고 위쪽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죄와 암흑이 지배하는 죽음의 나라를 통과해서 은총과 빛이 흘러넘치는 생명의 나라로 부단히 넘어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별도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굳이 비행기 삯을 들여서 최후의 만찬이 거행되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은 이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주어지는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동물들이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필요한 사료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 인간의 영혼들을 영생의 창공으로 비상하게 할 참된 양식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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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하루하루를 하느님 주시는 새날의 선물로 생각한다면,
늘 새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죽어있는 것들은 차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잘 된 동물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진화가 덜된 동물은 차갑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살이 딱딱한 뼈를 에워싸고 있지만,
진화가 덜된 거북이, 게, 가재 같은 동물은
딱딱한 뼈가 살을 에워싸고 있다는 이야기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이들,
진화가 덜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들,
예나 이제나 쇠붙이 무기들 들고 전쟁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진화가 덜 된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처럼 무익하고 무모한 전쟁을 하는 동물들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군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문명화된
야만인일 수뿐이 없습니다.
외적상태만 아니라 내적상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내면은
진화로 말하면 최고의 절정상태입니다.
다음 스테파노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백성, 원로들, 율법학자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을 거역하면
마음과 몸은 차고 어둡고 거칠고 딱딱해져
완고하고 인색해 질 수뿐이 없습니다.
반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참 거룩한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임종어와 똑같은 스테파노의 두 임종어가
그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새삼 참 영성의 특징은
단순성,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결같이 성령 충만한 결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빵, 생명의 빵인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와 말씀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존재하는 온 세상의 피조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인 다음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성체성사의 진수를 밝혀줍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결코’라는 단어에 주님의 힘이 집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육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지요!
영육이 배고프고 목말라도 채워지지 않아
차가워지고 굳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실 때
일거에 해결되는 영육의 배고픔이요 목마름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복음의 군중은 물론 우리의 간절한 소원에 응답하여,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빵인 당신 자신과 더불어 성령을 충만히 선사하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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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수도회] 예수님 안에서  [2]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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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요한6장 묵상 전체)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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