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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주/대구/안동/수원/청주/마산] 오늘 그리고 영생을 살아가는 신앙
조회수 | 1,472
작성일 | 09.04.28
이집트를 탈출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광야를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젓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향해 나아간 그들의 여정은 길고도 험했습니다. 많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시련과 고통의 광야를 걸었습니다.

광야의 생활은 힘들고 배고픈 생활이었습니다. 목마른 백성들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할때가 더 좋았다 하며 과거의 죄스런 삶에 집착하기도 했습니다. 때론 배가 고파 허기져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도 심하게 드러냈습니다. 배고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간청을 들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 만나를 먹고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영생의 빵을 찾을 때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떤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어 당신을 믿게 하겠느냐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뭘 보여주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믿을 만한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예수께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그 빵을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려줍니다.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빵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쉬울 것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목마르게 하지 않습니다. 배고프게 하거나 부족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우리를 애태우게 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세상의 것은 언제나 우리를 배고프게 합니다. 항상 부족합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세상살이에 잘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런 부족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목마름과 세상의 모든 허기짐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분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바른 삶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을 쫓아 사는 우리들에게 진리를 향한 바른 길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람을 살리는 신앙입니다. 세상사에 지쳐 힘들어하고 기진맥진해 있는 우리 인생에 힘을 북돋아주는 신앙입니다. 생명을 불어넣는 신앙입니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있게 살아가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당신 부활로서 하느님 성부의 계획을 드러내셨고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경륜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죽어 없어지는 일시적 빵을 구하는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는 양식, 바로 구원의 빵을 구하라고 초대합니다.

여러분, 사랑이신 하느님은 당신 아들 성자 그리스도를 세상 구원을 위한 생명의 빵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 곧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위해 세상 창조 전부터 준비해놓은 축복을 함께 나누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더라도 항상 미래를 바라봅니다. 오늘을 살더라도 내일을 계획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내세를 준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늘을 사는 신앙이며 나아가 영생을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축복의 식탁, 영생의 잔치에 교회는 항상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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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예정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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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분께 삶의 이유와 활력이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고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은 음식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음식입니다. 영혼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균형은 깨어지고 무너지고 맙니다. 삶이 불안해 지고 허무감에 휩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고 갈증을 느낀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고, 모르고 있기에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본능적인 삶에 탐닉을 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욱더 심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답변이 주어져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서 대답을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자신을 두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영적 음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강해진 영혼이 육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 입니까?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수없이 모시지만 영적인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나선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소한의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생략되었기에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아무 뜻 없이 받아먹는 영성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성체신심은 정성에서 출발합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정해놓은 것은 정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많이 후퇴하여 성체를 모시기 한시간 전 까지면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오래 전에 우리 교우들은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물도 못 먹게 하였고 양치질을 해도 양칫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 만큼 정성을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옛 교우들은 이 규정을 끔직 이도 지켰답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셔야 필요한 곳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 힘이 우리 영혼과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활 속의 불안과 허무를 극복할 줄 압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운 변화가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체를 정성껏 모실 수 있을 때, 성체께 대한 신심은 새로워 질 것이고, 그 분 안에서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신요안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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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루라도 성체의 의미를 살려서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셨는지요. 어제가 아니라면 오늘이라도 우리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사랑의 웃음을 선사해보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주님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군중들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어떻게 합니까?”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이제 믿을 수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청하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본래 모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에 배고픈 우리를 먹여 주었듯이 또 먹여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깨달아서 주님을 찾아 헤맨 것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어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빵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요구한 표징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종살이를 떠나 광야에 들어서서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하느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불평을 벌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매일매일 제공해 주셨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도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주어지는 양식은 맛없고 충분히 질릴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기가 그립다고 불평까지 합니다. 그들은 에집트 종살이 시절에 겪었던 노예가 먹는 가마솥 음식까지 그립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들도 결국 하느님이 주시는 음식의 표징을 모르고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그 빵, ‘만나’를 먹었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기에 모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그렇게 죽어갈 그런 빵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원한 것은 눈에 보이고 확인하고 먹을 수 있는 ‘썩어 없어질 빵’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서 알고자 했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십시오. 눈으로 보고서 믿는다는 말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너는 눈으로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서 믿는 자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라고 하셨듯이 믿음은 눈으로 보지 않고 하는 행위입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이들은 하느님의 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는 그 말씀을 ‘만나’처럼 노동없이 먹을 수 있는 빵으로 착각했습니다. 기적으로 군중을 먹이셨던 그 빵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세상의 재화와 풍요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바로 하느님의 빵은 결국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서의 저술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빵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 영원히 먹어서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빵을 먹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구세주를 믿고 그분의 삶을 사는 것이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이나 빵 제조법을 가지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물질적인 음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증거할 때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먹어서 죽지 않는 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체의 삶은 바로 세상에 살면서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또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성체를 받아 모신 사람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내 이웃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하루 봉헌하며 삽시다.

김경욱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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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어제 복음(6,22-29)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불멸의 양식이란 썩어 없어질 양식처럼 찾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추구(追求)'하라는 것이다.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구한다'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제 복음의 결론이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불멸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선포된다.

오늘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예수께서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조건'으로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한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를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우리의 조상들을 먹이는"(출애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는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기적(奇蹟)을 청하고 있다.

사실 믿음이란 내심(內心)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빵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② 이제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라고 정정(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신다.(출애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한다. 이에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언명(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폭로(暴露)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적 언명(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가파르나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사람들 보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안중에 '하늘의 빵' 밖에 없는 것인가?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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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사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말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는 사람들
일제히 자신을 향해 달려들어
성 밖으로 몰아내
돌을 던졌던 사람들은 오늘, 기이한 ‘꼴’을 봅니다.

던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평화로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이의 음성을 듣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주제에
오히려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악 받힌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의 외침을 들었으니까요.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마지막 가는 길에
어떤 말을 하고 싶습니까?
문득,
다윗의 마지막을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했던 믿음의 사람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하느님을 위한 헌신이 감동을 전하는 다윗이었지만
그의 유언은 약간,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아들 솔로몬에게
“츠루야의 아들 요압이 나에게 한 짓”을 기억하여
“그자가 평안히 저승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여라”고 당부하고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벌을 내리지 않은 채 그냥 두지 마라”고 말하는 다윗을 보며
(1열왕 2,5-9 참조)
그 삶의 마지막이 허전하고 씁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스테파노 성인의 마지막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엉뚱하고 엄청난 일인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일러 주셨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의 가르침은
말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셨기에 확실하고
값집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은
모조리
엉뚱하고 희얀하고 멍청한 일투성이였습니다.
늘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서
엇박자였으니까요.
오늘 스테파노 성인의 마지막 모습은
모든 이에게 엉뚱할 만큼 무모한 것이어서,
대단히 바보 같고
철저히 어리석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짓이었기에
가장 주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오늘 독서는
그날 스테파노 성인의 마지막 모습에
하늘의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계셨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대로
바보같이 멍청하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엉뚱한 삶을 택하는 모습에 감동하신
몸짓이라 짐작해 봅니다.
핍박과 박해에도
용서하고 오히려 기도하는 완벽한 믿음에
벌떡 일어서신 것이라 싶으니까요.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은 대단히 엉뚱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엉뚱한 그분의 사고방식에 따라 실천하는 이가
부활한 삶의 주인공입니다.
주님께서 벌떡 일어서 기뻐하시는 그 삶을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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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가득한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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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배교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졌듯이 지금 성령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내릴 것임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은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였던 것처럼(느헤 9,26; 예레 2,30) 의회원들이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를 살해한 무리라고 스테파노는 그들을 고발하였다.

이에 그들은 대단히 격분했지만,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영광과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를 선포하였다. 이에 격노한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나가 돌로 치기 시작하였다.

스테파노는 십자가상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루가 23,45; 23,33)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운명한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팔레스티나 각지와 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지게 되었다(8,1). 그러나 이 박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각 지역으로 흩어지도록 함으로써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스테파노의 피는 그리스도교 확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의 눈에는 그리스도이신지를 모르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한 그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성령을 거스르지 말도록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예언자들을 죽인 죄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간청한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보고, 자기가 본 것을 확신에 차서 그들에게 전하며 회개하기를 간청한다.

그러한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 원망이나 저주의 감정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가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돌에 맞아 쓰러져 있었던 중에서도 몸을 일으켜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간구한다. 이제 죽음으로써 대면하게 될 하느님 아버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이처럼 죽음에 직면해서도 십자가상의 주님처럼 기도하는 스테파노는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참 신앙인은 언제나 주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 주님의 마음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다.“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않는”(마태 5,42), 마음이며,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마태 5,44) 마음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악의가 없고 오직 선의만이 있다. 분노, 시기, 원망, 탐욕 등의 악한 마음이 없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탐욕에서 벗어나 육정에 따라 살지 않으며(갈라 5,16),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갈라 5,22-23)가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처럼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오늘 스테파노처럼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자. 사랑과 용서가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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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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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이 예수님께 믿을 만한 근거로 기적이나 일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믿을만한 예로써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제시합니다.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아날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는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절실하고 가장 믿을 만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적을 보여준다면, 기꺼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만나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순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예수님께 믿을 만한 징표를 요구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믿음, 잘못된 믿음, 순수하지 못한 믿음을 탓하기보다 예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자체로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신앙생활이 기쁘고 보람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것에서 신앙생활의 기쁨과 보람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나 주변의 칭찬, 활동 속에 느끼는 인간적인 기쁨이 신앙생활의 기쁨의 참된 원천인 양 착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인 기쁨이 주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자체의 기쁨과 의의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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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문병찬 신부
  | 12.17
468 98.4%
[안동] 말씀을 알아듣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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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서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문과는 다른 엉뚱한 대답을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고 싶은 빵’을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알고 싶어 합니다.

신앙적인 의미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되고, 좌절하지 않고 더 높은 희망을 향해 적극적인 자기 투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삶의 의미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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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임준기 신부
  | 12.17
468 98.4%
[수원]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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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워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새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서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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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12.17
468 98.4%
[수원] 받는 사람, 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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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기가 찬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더 큰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흥미로운 것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을 믿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며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만, 금방 모든 것을 잊고 주님께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결국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청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면 곧잘 하느님께 등을 돌리거나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그토록 많음에도 하느님께 투덜거립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받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봐야 합니다.

감사드릴 것이 그토록 많은데도 우리는 혹시 하느님께 받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만일 아직까지 감사드리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내주는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닮은 자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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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우정 신부
  | 12.17
468 98.4%
[청주] 영원한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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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한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믿으라 하고 사람들은 믿음직한 표징을 보여달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대중성을 지닌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중심으로 서로 모여 마음을 열고,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모두 풍족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총을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총의 풍부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은총을 깨닫지 못합니다. 육적으로 배고프지 않을 빵을 달라고만 합니다. 사람들은 그 옛날 조상들이 광야를 헤매며 굶주릴 때, 모세의 도움으로 ‘만나’를 먹고 살게 되었다고 모세를 칭송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육적인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지만 열두 광주리나 남게 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생각을 바꿔 이웃을 초대하고 마음을 열어 나누는 것이기에 한 번 먹고 끝나는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생명의 빵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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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유철 신부
  | 12.17
468 98.4%
[마산] 기적 중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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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기적(奇跡)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큰 사랑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을 기적(奇跡)이라고 합니다. 창밖을 내다보시겠습니까? 당신은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새록새록 돋아나는 새싹들, 하루가 다르게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 잔디밭이 보입니까? 그것이 기적(奇跡)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손길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날씨가 맑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절개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나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마태16,1-4)

요나가 니느웨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아침저녁 하늘을 보고 날씨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도 하느님의 큰 사랑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는 눈 뜬 장님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고 요한복음은 증언합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당신에게 허락된
오늘 하루도 큰 기적입니다.
당신 자신도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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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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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의정부] 항상 감사하며 삽시다  1421
25   [수도회] 예수님 안에서  [2] 1574
24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1329
23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요한6장 묵상 전체)  1992
22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1405
21   [기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1] 1613
20   [부산/수원]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4] 1520
19   [전주]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1] 1337
18   [의정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1283
17   [인천/서울] 생명의 빵  [7] 1485
16   [수도회] 다양성 안의 일치  [8] 1498
15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1299
14   빠스카의 신비에 대한 체험  1485
13   [기타]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1448
12   [부산/원주] 완전한 신앙, 완전한 일치, 완전한 사랑  [4] 1510
11   [전주]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1] 1553
10   [수원]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3] 1506
9   [대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사랑입니다  1575
8   [인천/서울]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5] 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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