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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절대적인 신뢰
조회수 | 1,523
작성일 | 09.05.01
예전에 대구 파티마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어느 암 환자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절에 다니셨던 분인데, 저와 만나면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로 치유되어 부활의 새 생명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는데 그래도 생명을 건진 기쁨이 너무나 크기에 마음 아파하지 않고 언제나 기쁜 모습으로 많은 이야기를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쁜 일과 중에 하염없이 그분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조금씩 조급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측은한 마음으로 들어주다가 점점 더 급한 환자에게 마음이 갔고, 그런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이야기만 끝없이 늘어놓는 그 자매님에게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예, 수녀님. 수녀님 말씀대로 제가 말이 좀 많지요? 눈이 멀어 보이질 않으니 제 앞에 계신 분만 생각하고 미처 주변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이 대답을 듣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나는 왜 그 신뢰를 먼저 보지 못했던 것인가?’ 그 자매님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활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게 자매님이 저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하느님을 향한 마음 자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체험한 사람은 이렇게 하느님께 완벽한 신뢰를 하게 됩니다. 완벽한 신뢰로 기도할 때 단순한 마음으로 쉽고 빠르게 하느님의 현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도 중에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앞이 보이지 않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상대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던 자매님처럼 우리도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세영 수녀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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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더 살아야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체성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수렴되는 중심이었습니다. 돈 보스코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체성사에 대한 찬미의 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는 복도에서 미사참례 하러 사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당부하곤 하셨습니다. "아이들아!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일,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그분께 가장 큰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일을 하러가고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라.

돈 보스코를 가장 가까이 모셨던 체리아 신부의 증언을 통해 돈보스코의 탁월했던 성체신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돈 보스코께서 성체성사를 집전하실 때에는 다른 사제들과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분의 미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사 중에 돈 보스코의 얼굴은 자주 감동과 기쁨의 눈물로 얼룩지곤 했습니다. 때로 그분의 얼굴이 얼마나 성스러워 보이든지 마치 살아 계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듯 했습니다."

이런 돈보스코의 거룩한 미사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당시 개인 집에 경당을 두었던 부자들은 서로 자기 집에 돈보스코를 모셔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왜 돈보스코께서 집전하시는 미사는 다른 사제들과 달랐겠습니까?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돈보스코께서 쇼맨십이 강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비결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바로 준비였습니다.

그분은 저녁시간에 접어들면 침묵 가운데 다음날 아침 미사를 준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셔서도 미사 전까지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미사를 집전하면 할수록 부끄럽게 느끼는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과연 언제쯤 미사다운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소홀한 준비, 습관화된 전례, 삶과 연결되지 않는 단지 예식만의 성체성사는 주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성체성사는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우리를 헌신하게 합니다. 참된 영성체는 우리에게 이웃이나 지역, 학연이나 지연, 빈부격차, 인종이나 국가와도 같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게 하여 우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게 합니다.

진정한 미사는 우리를 이웃의 아픔에 동참케 하며, 보다 큰사랑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참된 영성체는 우리를 세상의 빵이 되게 하며 구원의 샘이 되게 합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의 얼굴에서 생명의 성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영성체를 잘 하십시오. 영성체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옆 사람에게 방해주지 않기 위해서 엉겁결에 절대 따라 나가지 마십시오. 보다 철저한 준비와 참된 기다림으로 생명과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십시오. 그리고 매일의 일상에서 성찬의 삶을 사십시오. 그때 참된 영성체는 완결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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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와 성사

요즈음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급기야는 당신 자신이 바로 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신다.
이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당신을 떠나기까지 하는데...

먹는다는 것...
결국 먹고도 죽어가야만 하는 것인데도
때론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어처구니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배가 고프면 이렇게 허겁지겁 먹는 것에 안달하는데
영적인 양식인 성체를 모시지 못하면
허기에 안달하지 않는지...

복음을 통해
식사는 참으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식사는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식사는 하나의 성사이다.
식사는 축제요 사랑의 나눔이다.
그냥 게걸스럽게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욕구충족의 시간일 뿐이다.
수도자는 식사를 게걸스럽게 해서는 안된다고
어떤 성인은 말한 바 있다.

식사가 욕구충족의 도구냐 하나의 성사가 되느냐?
이것이 식사가 진정한 생명의 빵이냐
썩어 없어질 빵이냐를 가늠하는 척도가 아닐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먹은 음식의 양이 얼마나 되며,
지금까지 신자로서
영한 성체의 양이 얼마나 될까?

그 먹은 음식이
그 영한 성체가
온전히 성사가 되었다면
나는 영육으로 얼마나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러나 내가 먹은 음식이 욕구충족의 수단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영한 성체가
그분이 내 안에서 사는 힘이 되지 못했다면
나는 영육으로 건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그렇다!
내가 먹은 식사가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힘으로 주님의 일을 행할 때이고,
내가 영한 성체가 진정한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 때이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살며
일하시게 될 때
참으로 그분은 내 안에서 살아계시며
진정한 생명의 빵이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한끼에 100,000원씩이나 하는 고급 식사를 한들
그것이 나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없다.
내가 먹는 음식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 음식이 내 안에서
새로운 힘을 발휘함을 깊이 체험한다면
성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 영성체를 하였지만
그분이 내 안에서 계심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제멋대로 살았다면
그분은 내 안에서 성사화가 되지 않고
그냥 제병 조각으로 남게 되고
마침내 다른 음식물들과 함께 배설물이 되고 말 뿐이다.

내가 주님을 모셨다면
주님이 내 안에서 힘을 발휘하셔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사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영이 살아남을 느끼게 된다.
그때 우리는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될 것이다.

오상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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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멀게 하는 은총의 빛

극렬 박해자였던 사울을
당신의 사도로 뽑으신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미 당신의 제자였던 사람 중의 하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지 않고
주님께서는 왜 당신의 박해자를 이방인의 사도로 뽑으신 것일까?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들려주신 한 비유가 생각납니다.
두 아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큰 아들은 “예”하고 대답하고는 하지 않은 데 비해
작은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곧 뉘우치고 실천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아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건성으로 대답할 정도로 아버지의 뜻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면전에서 깨고 싶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는 좋게, 좋게 얘기하고
실제로는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뒤통수친 것입니다.
이런 사람 여러모로 아주 불쾌합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것인지, 말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말씀이지만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싫어하시는 것 알면서도
면전에서 싫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긴 하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가서 했습니다.
반대를 분명히 했던 만큼 실천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제가 사장이라면
작은 아들 같은 사람을 부하직원으로 채용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뽑으신 것도 같은 이치인 것 같습니다.
나를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반대한다면
나를 보여주고,
나를 제대로 알게 하면
확실한 나의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여주고,
알려주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의 눈을 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빛으로 사울의 눈을 못 보게 합니다.
은총의 빛은 이렇게 먼저 눈을 멀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합니다.
잘못 보는 눈은 멀게 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눈도 멀게 합니다.
보지 못하는 기간은 사흘이 필요합니다.
사흘 정도는 보지 못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흘이 지난 다음
주님께서는 눈에서 비늘을 떼어내시어
이제 봐야 할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먼저 주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저 인간 예수로만 알았는데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자기의 주인님이심을 알아 뵙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늘로부터 소리를 듣자
즉시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제 게임은 끝이 난 것입니다.
“주님!”하였으니 자기는 주님의 종이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을
종으로서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성껏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기가 받은 그 은총의 빛을
자기처럼 보지 못하는 이방 민족에게로 갑니다.
자기처럼 보게 하기 위해서.

이 아침, 사울을 보면서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뱉어버리시는 주님께서
나를 뱉어버리시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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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리재 쏟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선포하는 사제의 경문을 들으면서, 어김없이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남이 볼세라 조심스레 가슴을 친다.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당신 종이 곧 나으리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하루 중 가장 겸허한 순간이다. 가슴에 손을 가져가는 습관(?)이 생긴 것은 10여년 전 새벽녘에 꾼 꿈 때문이다.

제대가 성당 중앙에 위치한 뮌헨 모원에서 예수회 노사제가 제의방으로 나를 불러 제대 위에 놓인 성체를 대신 나누라고 했다. 제대 위의 성체를 만지는 순간, 진짜 살로 변했고 그 살을 만졌을 때 피가 흘러나왔다.

너무 놀란 나는 이 살을 수녀님들에게 어떻게 나눠주어야 할지 무척 당혹스러워하다가 꿈을 깼다. 이 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을 하는 유다인의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꿈은 성체를 모시는 준비가 부족했고 그동안 타성적으로 미사에 참례한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음식 사랑’이다. 먹는 것에서 사랑이 시작된다고 하지 않던가! 정성이 담긴 세 끼 밥상 앞에서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하루를 살아갈 활력과 생기를 찾는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아낌없는 사랑을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며 초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찌 그분의 현존 의식에 대해 갈망만 하고 있을 것인가? 오늘도 성체로 내 안에 오시는 주님께 벅찬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김연희 수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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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사흘간의 바닥체험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우리는 ‘혈기왕성’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거칠 것 없이 탄탄대로를 걷던 한 젊은이(사울, 청년 시절의 바오로)의 추락과정을 접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정통 유다인이자, 바리사이 가운데 바리사이였으며, 유다교 수호에 목숨을 건 돌격대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제대로 율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오직 율법만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으며, 율법의 실천과 연구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런 사울이었기에 율법을 사사건건 비판하고, 자신이 목숨처럼 여기던 각종 세칙들을 모조리 어기고 깨트려버리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몰래 집회를 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인육제를 벌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통 유다교 수호의 첨병임을 자랑하고 있던 사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흉악한 행위를 서슴없이 일삼는 그리스도교의 척결에 앞장서기로 결심합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 섬멸’이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특별서한’을 발부해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는 일종의 ‘체포권’ ‘체포영장’을 신청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장 앞장섰던 적대자 중의 적대자 사울을 수제자 베드로 못지않은 중요한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체포하기 위해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드디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엄청난 밝기의 빛과 함께 사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이어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갑니다. 갑작스런 하느님의 음성, 그로 인한 실명으로 인해 사울이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었던지 그는 사흘 내내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간 앞길이 창창했던 사울, 병원 한번 안 가볼 정도로 건강했던 사울, 오직 장밋빛 미래만을 꿈꿔왔던 사울, 지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내리막을 걸어보지 못했던 사울이었기에 당시 받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자존심도 완전히 바닥나버렸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너무나 건강했던 사울이었기에 남의 손에 이끌려 걸어간다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사건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 체험은 사울 인생 전체의 분기점이 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사흘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사울의 내면에서는 대대적인 작업 한 가지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죽음 체험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가 신속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이끌려가던 사울은 그 치욕적인 체험을 통해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재구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방향 설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해 완전히 추락한 사울이었지만, 제대로 미끄러진 사울이었지만, 그는 사흘이란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체험하셨던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처참하게 부서졌던 예수님의 사흘을 사울 역시 온몸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가끔씩 사울에게 행하셨던 방식으로 접근해오십니다. 때로 기고만장한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내려치시고 심연의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십니다. 우리의 완고함, 우리의 똥고집을 완전히 꺾어놓으십니다. 일종의 충격요법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길 안에 가끔씩 겪게 되는 추락, 실패, 바닥체험, 미끄러짐...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런 충격적인 사건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로 인해 새 인생을 출발하라는 하느님 측의 메시지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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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삶, 영적 삶"

육적으로 기우는 외적 삶일수록 영적 삶을,
내적 삶을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수도복을 입어 수도자가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때 수도자입니다.
우리가 입은 검정 수도복,
외적으로는 죽고 내적으로 살아났다는 표지입니다.
하여 수도자는 내적 삶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 넘어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사는 자가
수도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수도자는
세상의 빛, 세상의 희망,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감히 수도자의 존재이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내적 삶의 모델과 실현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바오로의 회심 과정이
내적 삶의 모델을 제공합니다.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
시작되는 내외적 변화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이후,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마치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3일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일꾼,
하나니아스의 안수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울의 모습이
다음 대목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영안(靈眼)이 활짝 열린 사울,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에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사도 바오로’로
그 인생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끊임없이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
내외적으로 변화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내적 삶의 실현에
최고의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게 성체성사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의 만남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내외적으로 변화를 촉진시켜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다음 대목도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는
바오로의 고백이 연상됩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매일 미사를 통해
무한한 힘의 원천이신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성혈과 말씀을 모심으로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요,
그리고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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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기 살을 (요한 6, 52-59)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우리가 생활하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직면할 때가 있다. 자기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사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리고 사울의 상식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의문의 질문을 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그 일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라면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기까지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히려 감격하고 감사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자기들 살까지는 못 내주어 준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내어주는 사람을 살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고 자기들끼리 말다툼까지 벌였다.

우리도 학문을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때로는 장상의 말을 들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저 사람이 어떻게..."라고 당황하게 된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의 한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한다.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참사를 당한 비행기 탑승객 유가족들이 사건 현장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라고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가 많이 있고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렇다. 이 세상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다. 이 세상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우주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이 내 생활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나의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또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나 말을 들었을 때 그 앞에서 절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서로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화해하고,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고놈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서로 말다툼하고 갈라지게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적어도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은 하나의 위기이다. 그 장애물 앞에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장애물 앞에 주저앉을 때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그것이 자기의 한계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런 식의 생활로서는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제자리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영적 세계는 무한하다. 또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구도자의 자세가 있다.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마리아가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를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2)고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넓고 깊고 신비한 세계이다. 더군다나 영적인 세계, 하느님 나라의 세계는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한한 세계를 향해 늘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보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리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초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놓으시는 그런 성체의 삶을 살 수 있다. "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자기들의 살을 먹으라고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한번도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놓은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오로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기의 신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세계 즉 자기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마스쿠수 사건을 통해 그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영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세계는 거기에서 멈출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라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묵상하며 생활한다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렇게 될 때만이 비로서 우리는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신앙의 그 깊은 세계, 넓은 세계, 무한히 펼쳐지는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남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나의 이해의 폭이 좁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의 빈곤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깊은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리 우리가 성체를 영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님 안에 살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은 간단할런지 모르지만 다른 이들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도록 내 살을 내어 주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쌀이 밥이 되어 우리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봄부터 농부의 수고와 벼들의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포도송이가 포도주가 되어 우리들이 마시게 되기까지에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알의 포도송이가 우리 입에 먹혀지기까지에도 봄부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맞으며 견뎌온 결실이다. 우리 자신이 남에게 먹히는 존재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봄부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로 하였듯이 그렇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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