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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조회수 | 1,672
작성일 | 09.05.01
요즘 프로야구가 한창입니다. 특히 저는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요즘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팀을 아주 열심히 응원하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그저께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야구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나운서석 바로 옆에 관중석이 있는지 듣기에 그리 좋지 않은 소리들이 방송을 통해서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쌍시옷 소리가 아주 강하게 나는 소리들 그리고 단어의 맨 앞에 ‘개’라는 말이 들리는 소리들 말이지요. 재미있게 야구를 즐겨 보고 있는데, 간혹 나오는 그 소리가 인상을 쓰게 만듭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욕지거리 듣는 것이 좋습니까? 자신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말 듣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소리, 예쁜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은 어떻게 보이나요? 욕하는 그 모습이 멋져 보입니까? 아니면 예의 바르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일까요? 아니지요. 그 사람이 바르게 보인다고 말하면 분명히 비정상적인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지도 못하는 욕인 동시에, 자신의 위신도 깎일 수밖에 없는 욕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습관 때문입니다.

이 습관이란 참으로 무섭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을 고치기란 큰 맘 먹지 않는 한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나와 이웃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습관이라면 우리들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이 이렇게 다투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유다인들의 나쁜 습관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은 생각하지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그토록 놀라운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며, 또한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들을 그토록 많이 하셨는데 왜 예수님을 반대하는가?’

바로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고자 하는 아주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우리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지 못하면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방법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우리들은 아니었는지요?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게 하는 가장 쉬운 좋은 방법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더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드러내면 자신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그 반대의 방법을 씀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지 못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위신도 깎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나쁜 습관들. 그 습관들이 곧바로 고쳐지지 않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고쳐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을 고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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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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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각오로 사업에 뛰어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 사람 역시 처음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계획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아주 열심히 일하였지요. 하지만 세상일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도 서서히 지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도 한 번 두 번 늦어지기 시작했고, 사업차 사람을 만나는 일도 한두 번 빼먹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렇게 처음 마음먹었던 열정은 점점 시들해져 갔고, 점점 그는 나태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확히 1년이 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사업에 대해서 바라볼 수가 있었지요. 그 순간 자신의 사업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의 인생 역시 낭떠러지 앞에 몰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는 매순간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말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망쳐버린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쯤이야! 이번 한 번쯤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안일한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말들을 지금 내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중한 내 자신을 망쳐버릴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불행하게 사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또한 누구보다도 의미 있게 이 세상을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부정적이고 힘이 빠지는 말을 씀으로 인해 행복보다는 불행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은 노동절입니다. 동시에 교회에서는 노동자의 수호성인이신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성 요셉 성인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 안에 그렇게 많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목수로써 조용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셨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의 삶도 평탄하지가 않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고, 또한 갑자기 천사의 말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피난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예수님의 아버지로써 지켜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요셉 성인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한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일, 즉 목수의 일과 가정 안에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이하는 오늘,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 요셉 성인을 기억하면서 지금 내 자신은 직장, 가정, 그 밖의 모든 곳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그러한 모습 안에서만 주님께서 안내해주신 행복의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최대 행복은 날마다 덕에 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미하지 않는 생활은 인간다운 생활이 아니다(소크라테스).

조명연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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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집

뭐가 그리 좋은지 만나기만 하면 웃고 떠드는 여고생들을 대상으로 피정을 진행하다가 조별작업으로 ‘자신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빼앗기는 곳’을 적게 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참새집’이라고 적어내서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이 말하는 ‘참새집’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죠. 혹시 PC방, 아니면 오락실, 수다방?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괴리감을 들어내기 싫어서 처음에는 아는 척을 했다가 용기를 내 아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아이들이 말하는 참새집이란 분식점을 일컫는 아이들의 은어였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친다고 해서 요즘 청소년들은 분식점을 참새집이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호흡을 하고 체험을 나눈다는 것이겠지요. 함께 밥도 먹고, 수다도 떨고, 재미있게 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 위해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분과 기도로써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꼭 들르듯 우리 신앙인들도 자주 성당에 가서 주님의 식탁에 차려진 양식을 나누며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정병덕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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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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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데 혹시 못 보셨는지요? 흔히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이야기하지요. 바로 오늘 독서에서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유다교에서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 세례를 받고 ‘예수는 주님’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울 본인으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울의 회개는 세계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지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두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망설임 없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뽑을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약 14(13)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 중에서도 초대 교회를 전 세계로 확장한 일등 공신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오로 사도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발명가’라고 까지 부를 정도였으니 바오로 사도를 초대 교회의 근간을 이룩한 사도라고 보아도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부르짖은 니체는 사울을 이렇게 변화시킨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몰랐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그래서 두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다교 신자였던 때 ‘사울’로 불렸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와서는 ‘바오로’로 불리었지요.

역사를 바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되풀이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다루어진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기 때문에 유다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파노가 죽을 때에도 옆에서 찬동을 하였고,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마스쿠스 쪽으로 도망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그의 박해는 유명하여 심지어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회심을 옆에서 도왔던 하나니아스라는 사람까지도 바오로의 악명을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사도9,13)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요청에 하나니아스가 한 대답입니다. 그 곳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지요.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마스쿠스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수석사제들과 원로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위임장을 받고 혈기왕성하게 그들을 잡으러 갑니다. 의기양양하게 길을 가고 있는 바오로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바오로는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지요. 그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9,4)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9,5)

깜짝 놀란 바오로가 묻자 그 음성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9,5)

이 순간 사울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단 한번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유다인으로서의 사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 바오로로 탄생이 되지요.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혈기왕성한 유다인 사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나도 놀라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의 판단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뽑은 이유가 오늘 독서에 나와 있지요.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9,15-16)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는 데에 가담하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출발할 때부터 벌써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당신의 일꾼으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충격으로 땅에 엎드려졌던 사울은 즉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했지요. 마치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밤낮을 돌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 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만나면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사도9,18) 되지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울이 주님께로부터 큰 은총을 받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이제 그가 당장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큰 일을 하고 승승장구하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공동체는 바오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선교사 스테파노를 죽이는 데 찬동하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쏟던 유다의 열혈 청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바오로사도는 45년경 1차 전도여행을 하기까지 많은 시련과 실패를 체험하면서 성과없는 10여 년을 보내고 고향 타르수스에서 은둔생활을 하기까지 합니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바오로를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바르나바가 사목자로 부릅니다. 그때서야 하느님의 사람으로 쓰기 위해 부르셨지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울의 사람됨과 그 행위를 낱낱이 아시고 그를 바오로로 변화시킨 후에도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묵묵히 지켜보시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회심하자마자 자신의 경험과 의지만을 믿고 마구 행동했다면 분명히 얼마 안 가서 실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 의지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힘이 빠져 성령 안에 자신을 도구로 내어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 또한 혈기 왕성하게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지만 그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지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는 사십 년 동안을 양치기로 보내야 했습니다. 힘이 다 빠진 모세가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탈출3,11)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3,12)하고 끌어내시지요.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나 지식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길 때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지요. 또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긴다고 해서 시련이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도, 부활을 체험한 열 한 사도에게도, 또 갑작스럽게 회심한 사도 바오로에게도 분명하게 주어진 소명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길은 험난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주는 길이지요. 복음을 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전하는 일을 사도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9,23)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 곳에 성당에 세워진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요.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며 감사와 찬미로써 모든 봉헌을 마치고 파견될 때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촉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 다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복음 선포가 바로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고 그것이 가장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독서에서 계속해서 보고 있다시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제일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바쳐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지요. 계속해서 사도들의 발자취를 들려주고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동참하게 한 그 이유는 바로 복음 선포 사명의 중대함을 전해주고, 그 소명의 실천을 우리에게 강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일은 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막막하고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내어드리고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구로 내어놓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인식시키고 파견을 하는데 과연 신자들은 그 사명을 깨닫고 자신을 도구로 내어놓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실에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신자로서의 사명은 수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나가면 아직 주님을 모르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하고는 나가자마자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직무유기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들, 그리고 하느님의 부활의 체험을 더 깊이 성장시키는 방법은 복음 선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 공동체가 복음적인 공동체로 거듭 성장하려면 복음 선포의 사도로서 내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여 놓아야 합니다. 그 때 개인의 부활 체험은 더욱 깊어져 성화되고 공동체는 복음적인 공동체로 한 걸음 더 성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9,15)

오늘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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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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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 54)라고 말씀 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수 있단 말인가'하고 따져습니다(요한 6, 52).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 60)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 갔다고 합니다.

즉 빵의 기적을 보고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따라왔지만
이 말씀을 듣고는 예수님을 불신하고 떠나가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 베드로 처럼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임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 68).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고, 이 빵을 먹음으로써 영원히 살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고 그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이 거칠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또 그분의 말씀이 나의 행동지침이 되며 나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인간적인 차원에서 알아듣기 힘들다고 해서
예수님을 떠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 예수님께 매달리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보고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침내 떠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시면서도 이 말씀을 더욱 간곡히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즈음도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수궁이 가지만, 이러한 말씀은 못 믿겠다는 태도를 지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진실로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먼저 그들에게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고, 당신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한갖 도덕가로 밖에 보지 못합니다. 진정 참 생명이며, 부활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넘치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인간사회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당신 자신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성체성사로서 우리를 살찌우게 하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몸을 바치시고 그 넘치는 사랑을 내게 베풀었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모신 우리도 자신을 이웃에게 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서 좀더 주님께 대한 사람을 드러내고 특히 이웃을 통해 오시는 주님께 사랑을 드러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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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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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에는 음식 문화가 있다.
여기에서는 토속음식이 아니라 그 분위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훌륭하고 높은 분들의 식사예절이 깍듯하고 엄숙하다면 가난한 소시민들의 식사 분위기는 따뜻함과 소박함일 것이다. ‘먹보와 술꾼’(마태 11,'19, 200주년 성서)으로 표현된 예수님이 참석하신 잔칫집 분위기는 생각만 해도 흥겹다.

가나 혼인잔치의 분위기는
미리 예상하고 준비한 포도주가 동이 날 정도로 흥겨웠고, 돌아온 둘째아들의 귀향 잔치는 음악소리도 요란하여 질투를 느낄 만했고, 자캐오가 자기 재산의 반을 내어놓겠다는 저녁식사의 분위기는 얼마나 시끌벅적했을까! 예수께서도 신이 나셔서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라고 좋아하셨다. 예수님의 약점이나 티를 찾으려고 귀하신 분들이 준비한 자리는 너무나 긴장되어 소화가 될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유히 즐기시고 계시니 부럽다.

죄인들과 어울림을 좋아하신 예수님은
잔칫집의 신랑과 같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계시는 것 같다.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죄인들을 초대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미사성제에서 우리는 얼마나 가슴 뜨거움과 기쁨의 잔치를 만끽하고 있는가!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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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기문 형제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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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의정부] 항상 감사하며 삽시다  1421
25   [수도회] 예수님 안에서  [2] 1573
24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1328
23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요한6장 묵상 전체)  1992
22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1405
21   [기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1] 1613
20   [부산/수원]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4] 1520
19   [전주]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1] 1337
18   [의정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1283
17   [인천/서울] 생명의 빵  [7] 1484
16   [수도회] 다양성 안의 일치  [8] 1497
15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1299
14   빠스카의 신비에 대한 체험  1485
13   [기타]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1448
12   [부산/원주] 완전한 신앙, 완전한 일치, 완전한 사랑  [4] 1509
11   [전주]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1] 1553
10   [수원]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3] 1506
9   [대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사랑입니다  1575
  [인천/서울]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5] 1672
7   [수도회] 절대적인 신뢰  [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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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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