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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원주] 완전한 신앙, 완전한 일치, 완전한 사랑
조회수 | 1,509
작성일 | 09.05.0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그분의 살과 그분의 피가 하늘에서 내려 온 빵입니다. 그 빵을 먹는 사람 곧 그분을 먹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도 그 사람 안에서 삽니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은 영원한 생명의 빵, 선함의 빵, 그분의 몸, 아버지의 힘을 지닌 빵입니다. 이 빵은 보통 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빵을 어떻게 받아먹습니까? 아무 감동도 없이 받아먹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빵. 천상의 음식인데도 아무렇게나 받아먹지 않습니까? 이 빵은 하느님이 주시는 음식. 곧 예수님의 몸, 그분의 생명, 하느님의 힘이 계시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음으로써 그 사람은 그 분 안에서 살고 그분은 그 사람 안에서 사십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신비입니까? 만일 그분의 몸인 빵이 그저 일상의 빵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빵이 우리의 몸 안에 살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 빵 안에 살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몸인 빵이 그저 일상의 빵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 분 안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빵은 눈에 보이는 빵이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빵입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빵, 보이는 그분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분.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

누가 이 빵을 먹습니까? 모든 인간이 그 빵을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빵에 대해서 보고 듣지도 못하고, 또 들은 사람도 그 빵을 날마다 먹으려 하지 않고, 아예 그 빵을 하나의 상징으로만 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징이라면 왜 먹으라고 하셨습니까? 상징을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른 화제로 넘어가지 말고 오직 그 분의 몸, 곧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서만 관심을 모읍시다. 먹음으로써 우리 안에 사시는 그 분, 그 분 안에서 사는 우리. "먹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 안에 살고, 너희도 내 안에 산다."

어떻게 살면 인생을 잘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성체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살고, 너희가 내 안에 살고" 이것이 가장 잘 사는 방법입니다. 내가 그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이 내 안에 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일치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완전히 내 것이라는 말이고, 내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완전히 그분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 당신은 나의 것. 그 분의 몸, 곧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우리와 그렇게 되려고 하신 빵입니다.

신앙에는 일치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갈라지고, 몸이 갈라지고, 사랑이 없고, 의심, 불신, 멀리하는 것에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분의 몸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 분안에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만으로, 상징만으로, 설명만으로는 신앙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주고 받음이 있어야 신앙이 가능합니다. 그분의 몸의 신비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서 그분과 같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났기에 우리가 났고, 그분이 죽으셨기에 우리도 죽고, 그분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몸과 나 자신의 일치는 나와 다른 사람의 일치를 말합니다. 그분과 나, 나와 너, 이런 일치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분이 내게 오시어, 내가 그분을 알게되고, 마찬가지로 내가 그분 안에 있어, 그 분이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내가 너 안에 있어, 나를 알게 되고, 너가 내 안에 있어, 너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곧 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이 내가 되는 것이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치가 우리들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하고, 이런 일치가 완전한 신앙이고 완전한 일치이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아니 모든 인간들은 이런 일치를 추구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치가 가능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의 일치가 가능합니다. 그때 모든 것이 바로 섭니다.

자기 혼자서만 사는 것은 그 안에 그분도 없이 다른 사람도 없이 사는 것이므로, 그 누구와도 일치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지 않으면,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분이 사셔야 합니다. 아멘.

김형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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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식인종이란 말인가?

사실상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예수님의 폭탄선언이 있었다. 그 구절을 한번 더 읽어보자.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생명의 빵이 곧 사람이신 예수님의 자기 살이라는 엽기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 또한 만만치 않다.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유다인들의 반응과 예수께 대한 호칭을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호칭을 보자.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를 만난 군중은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25절)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선생님은 무슨 일(기적)을 하시겠습니까?"(30절)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운운하셨을 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하고 청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다"는 말씀에 못마땅해하며 웅성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서 유다인들의 불만은 '생명의 빵'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42절) 하며 돌연 예수께 대한 호칭을 바꿨다. 선생님에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직접적인 호칭은 아니다.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며 하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이 반응으로 유다인들은 예수로부터 거의 등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데도 이유가 있지만, 이젠 생명의 빵이 자기 살이라는 말에 유다인들은 거의 구역질이 날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하고 노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는 없지만 이 구절 다음에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란 말인가?" 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우리들 사고의 지평을 넓혀보자. 식인종(食人種)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는 미개인종(未開人種)을 일컫는 말로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뜻한다.

우리는 통상 인육(人肉)을 음식(飮食)으로 먹는 개화(開化)가 덜된 인종들을 식인종이라고 알고 있다. 왜 식인종들은 인육을 음식으로 먹었을까? 일용할 양식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적대자나 원수를 잡아죽인 다음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했던 것일까?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인류문화사 계통의 학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이런 풍습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미개한 인종들 사이에서 굶주림이나 복수, 종교의례나 효행 등의 이유에서였다고 하나,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종족에서도 가끔 제례의식과 관련하여 행해진 흔적이 있다. 카니발리즘은 대략 뉴기니 내륙지방, 서부 및 중앙아프리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수마트라의 바타쿠족,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부족, 북극지방의 에스키모 등지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지역에 따라서 인육은 굶주림 때문에 실제로 음식이 되기도 하였고(북극지방 에스키모), 식품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으며(바타쿠족), 멜라네시아에서는 동물의 고기와 같이 취급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의례적 살인과 식인(食人)은 종종 사술(邪術)이나 요술(妖術)의 관행과 결부되었고, 병자(病者)가 그의 친족에 의하여 잡아먹히는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에는 승자(勝者)가 싸움에서 죽인 자의 살을 베어 승리의 축하잔치에 썼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일부에서는 영혼(靈魂)을 배당 받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고, 그 뼈를 보존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종교·의례적인 의미에서 사자(死者)의 특정 부분 또는 내장 부분을 먹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먹은 사람은 사자의 영혼과 힘을 얻는다는 생각이 학자들의 통설(通說)이다.

결국 카니발리즘은 사자(死者)의 영혼(정신)과 힘을 이어받고자 자민(子民) 보호적 차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관행이라는 말이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밀림 한 가운데서 맹수나 적대자로부터 부족을 지키던 한 용사(勇士)가 목숨을 바쳐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종교적 의례를 거행하였을 것은 매우 있을법한 이야기다. 이 자리에서 다음 용사가 죽은 용사의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의 부족을 위한 정신과 힘을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 육신(肉身)을 위한 양식이 되든, 영혼(靈魂)을 위한 양식이 되든 간에 예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행위는 카니발리즘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강행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하게 당신 몸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실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는 살뿐 아니라 음료로 자신의 피까지도 내어 주신다.(55절)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부(全部)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를(나를) 먹는 사람도 예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사가가 제시하는 성체성사(聖體聖事)의 설정이다. 공관복음이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마태 26,26-30; 마르 14,22-25; 루가 22,15-20; 1고린 11,23-26),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공생활 한 가운데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있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단순한 육체를 위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영원의 양식으로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더라도 육의 식인종이 아니라 사랑의 식인종일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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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
'밥 이야기'라는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참으로 우리 어머니들의 밥에 관한 짤막한 철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식구들조차 먹기 힘든 부족하고 없는 가운데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꺼내어 푸짐한 상을 차려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모습을 떠올리니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로는
가족 외에 밥 때를 맞추어 찾아오는 일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시기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 합니다. 그러니 어린 자식들에게는 궁핍한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은 썩 반갑고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많을 경우 그 만큼 자신들이 먹을 것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손님이 가시고 나면 야단 맞을 각오를 하면서도 서로 많이 먹으려고 젓가락 숟가락 전쟁이 치열했던 시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들의 '밥 철학'은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음식 차별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라는 것과 밥상 인심을 보면 그 집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인즉 "밥 인심이 사람살이 원천"임을 어머니들의 소중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날
일부 몰상식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아가 참된 나눔의 기쁨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대목이었습니다. 힘있고 가진 자들이 진정한 밥의 소중함을 이제는 알았으면 합니다.

수천 수만의 버림받고
소외 받은 소년 소녀 가장들과 오갈 데 없이 거리나 지하도를 전전긍긍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실직자들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늘 한 끼의 밥을 먹기 위해 걱정입니다. 하지만 한 쪽에서 수십 수백만의 호화판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면서 연말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일이 생기면 무슨 대단한 자선사업가가 되는 듯 생색을 내곤 합니다. 단순히 밥은 굶주린 배를 채우는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가장 기초적인 생활양식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당신의 살과 피는 인간의 논리로 보면 복음에 나타난 유다인들처럼 물질적인 음식으로만 생각하여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결코 '물리적인 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작은 나눔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일류 대학을 나와 돈과 권력이 있더라도
진정한 나눔의 사랑의 실천을 모른다면 배를 주리는 이웃의 괴로움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는 작은 나눔의 사랑의 실천을 통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고 겪는 이웃과 항상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거듭 새롭게 태어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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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근범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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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론도
어제에 이어 여전히 요한복음 6장, 곧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박과 주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으니 생명, 살과 피, 빵입니다. 모두가 성찬례와 직결되어 있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사실 실체변화,
즉 빵과 포도주가 형상은 그대로 이지만 본질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이성적인 논리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 신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과학적 사실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체험 속에서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가 하나의 실제적 구원사건이며
은총이라는 것은 신자들의 체험 속에서 드러납니다. 지난 3월 첫 목요일 제가 몸담고 있는 방어진 성당에서는 ‘성체성사의 밤’ 행사를 가졌습니다.

성시간과 성체조배,
늦은 시간 까지 많은 신자들이 함께 했고 반응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신자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성체조배 때 마음이 열리더니 완전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더랍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더랍니다.

분명한 것은
그 변화가 자기 힘이 아니라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성체와 무관하게 우연한 것으로 이해되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히 진리이고 사실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종전의 예와 같이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완전한 용서는 자기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나의 자리를 온전히 차지하실 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온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체성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자는 성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난 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 대회. 교황님의 두 번째 한국 방문이 있었고, 그 때의 모또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체성사는 하나의 심신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우리가 삶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성체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 된 우리는
또 하나의 생명의 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빵은 사람에게 먹히면서 자신은 철저히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빵은 비록 사라지지만 빵을 먹는 사람 안에서 살과 피가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납니다. 생명의 빵은 자신은 죽이면서 남을 살렸던 주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빵을 먹는 사람들이고, 그 힘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님처럼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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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영훈 미카엘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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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예수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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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과 목숨을 바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일치로 이끌어줍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죽어가면서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형제, 자매인 타인들을 위하여 살아갈 때 시작됩니다. 자신을 버리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드릴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성인들은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그들도 인간적인 뇌를 겪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알았고 그것은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처럼요.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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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형호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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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의정부] 항상 감사하며 삽시다  1421
25   [수도회] 예수님 안에서  [2] 1574
24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1329
23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요한6장 묵상 전체)  1992
22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1405
21   [기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1] 1613
20   [부산/수원]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4] 1520
19   [전주]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1] 1337
18   [의정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1283
17   [인천/서울] 생명의 빵  [7] 1485
16   [수도회] 다양성 안의 일치  [8] 1498
15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1299
14   빠스카의 신비에 대한 체험  1485
13   [기타]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1448
  [부산/원주] 완전한 신앙, 완전한 일치, 완전한 사랑  [4] 1509
11   [전주]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1] 1553
10   [수원]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3] 1506
9   [대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사랑입니다  1575
8   [인천/서울]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5] 1673
7   [수도회] 절대적인 신뢰  [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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