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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다양성 안의 일치
조회수 | 1,497
작성일 | 09.05.03
몇 년 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지친 다리를 끌고 어느 절에 들어가니 대웅전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궁금해서 안내자에게 질문을 했더니 함께 간 보좌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수녀님, 딱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고, 웃는 것을 보면 무언가 기쁜 일이 있는 건데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잠시 후 안내자가 그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고 오더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마룻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새 생명이 앞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고 미리 울어주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기도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웃는 것은 집안의 어느 분이 돌아가셔서 이 세상의 고통이 끝났으니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웃으면서 사시길 비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표현이지만 공통점은 둘 다 행복을 빌어주는 것으로, 겉모양을 보고 자기 나름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을 깨뜨려야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설명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장난 섞인 질문을 한 것이 의외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도 베드로처럼 성당에 와서 기도를 드리지만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 사람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정작 주님께서 영원한 말씀을 지녔다는 중요한 사실은 망각하고 고정된 시각으로 표현 방법에 중점을 두고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표현하든지 상관없이 신앙하는 것입니다. 믿고 받드는 것. 그것은 다양성 안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이세영 수녀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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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6,60-69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미국에 사는 한 어머니의 소중한 체험입니다. "아이들 셋이 다 겨울 코트가 필요했지만 그것을 살 돈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신문을 읽다가 할인 매장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저는 좋은 기회다 싶어 얼른 가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바로 그때 시어머님이 전화를 하셔서 저희 집에 와도 좋은지 물으셨습니다. 보통은 그런 전화를 하지 않으시기에 저는 즉시 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돈을 절약해서 아이들 코트를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잃으면서 시어머님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해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약간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을 크게 먹고 아이들 코트를 사는 대신 시어머님의 코트를 한 벌 샀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오시는 시어머님의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하신 코트 세 벌이 들어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을 보십시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좀 손해 본다는 느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좀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마음 크게 먹고 양보하고 물러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때로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쫀쫀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어도 양보하지 않고 세상이 두 쪽 나도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목숨 걸지 않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기에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보너스는 또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매일 자신을 덜어내는 사람이기에 매일을 아주 홀가분하게 살아갑니다. 행동거지가 떳떳하며 매사에 자신이 있습니다. 내면이 늘 자유롭고 평화롭지요.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내면이 자유롭고 평화롭기 때문에 소화도 혈액순환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따로 피부 관리나 모발관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내면에 충실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수용합니다. 자신의 외모가 어떠하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며 살기에 그의 세상은 온통 장밋빛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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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칠 때 누구를?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을 주시는 빵과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4장 6절에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는 빵과 말씀이시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즉 나는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나는 생명을 주는 존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나는 곧 생명이라고 얘기할 수 없고
나는 생명을 지닌 존재라 얘기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지니고 있을 때는 살아 있지만
생명을 잃으면 우리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명이 아니기에
생명을 받아야만 생명을 지니는 존재이고
생명을 받아야만 지니는 존재이니
누군가 생명을 주어야 받아 지니는데
그분이 바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빵(Life giving Bread)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말씀(Life giving Word)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생명을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지 않고
썩어 없어질 빵에서 얻으려 합니다.
이 빵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의 육신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육신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썩어 없어질 빵은
그렇게 애써 얻으려 하면서도
영적이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은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피둥피둥 살이 쪄도 영은 시들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찾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지칠 때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얻기보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위로와 격려를 얻고자 합니다.
물론 사람의 위로와 격려도 필요하고
우리도 힘들고 지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위로와 격려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와서 부쩍 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에부터 아는 분이 오시는 경우도 있지만
아는 분을 통해서 처음 찾아오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인생 상담하러 오시는 것인데
어떤 경우에는 저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딱한 처지의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경우 이분들이 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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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만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의 삶은 늘 피곤에 찌들기 마련입니다. ‘노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노란색이지요. 부정적 사고의 소유자들은 ‘삐딱함’이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이 다 삐딱하게 보이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누가 활짝 웃고 있으면, 나를 비웃는다고 생각합니다. 몇 사람이 오순도순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으면 자기를 씹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부정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은 실패한 한 가지 일을 전반적으로 확대시키는 ‘과잉일반화’(overgeneralization) 경향이 많습니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무한한 가능성, 그 탁월한 장점들은 지나치게 평가절하하고 하찮게 여기면서 자신의 결점이나 단점은 극대화시키며 자신을 쓸데없는 인간으로 몰고 갑니다.

또 재미있는 것 한 가지는 이런 사람이 또 완벽주의 경향을 많이 지닙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완벽하길 바랍니다. 절대로, 단 한치도 실수하면 안 된다, 늘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이민규, ‘긍정적 심리학’ 원엔원북스 참조).

이러니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나겠습니까?

반면에 긍정적 사고를 지니고 살아가시는 분들의 삶은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단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관대합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극도로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여유롭습니다.

그 유명한 헬렌 켈러 여사가 그랬습니다. 혹독한 중복장애로 인한 그녀의 삶이 온통 가시밭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다. 나에게 어떤 것들이 없는지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는 부정적 사고방식 소유자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 늘 분개했습니다. 자신과 동족이 처한 비참한 운명이 늘 슬펐습니다. 예수님의 급격한 쇠락과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 한 가지를 더 했습니다. 극심한 자책감에 빠져 비관을 거듭하다가 삶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삶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긍정적, 낙관적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의 삶이 한때 인간적 나약함으로 인해 심하게 요동쳤지만, 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그가 지니고 있었던 사고방식이 긍정적이었기에, 낙관적이었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우리 매일의 삶 역시 수시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때로 우리의 죄가 진홍빛보다 더 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처럼 다시 한 번 주님께 돌아서길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외치기 바랍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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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머무르시는···

오래전 판공성사 면담 때 본당 신부님이 ‘남매는 용감하다!’라는 말로 고교생 오빠와 여중생인 나를 맞아주신 적이 있다. 그 당시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은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첫영성체 후 기도는 일생을 통해 꼭 들어주신다는 대모님의 권고대로 세 가지 기도를 했는데 모두 이루어졌다. 몇 년 후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고, 오빠는 신학교에, 나는 수녀원에 입회했다. 뒤늦은 신앙이었지만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며 가족 모두 우리의 봉헌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이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은 것처럼(66절) 오빠는 부제품 전에 스스로 신학교를 떠나 신앙생활을 등지고 쉬는 교우가 되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선뜻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 복음 묵상에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던 예수님을 만난다.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주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모두 떠나갔다. 나 또한 그럴듯한 고백을 하면서도 어려움을 겪거나 자신의 뜻과 다른 일이 생기면 주님으로부터 저만치 도망친 적이 얼마나 자주 있었던가? 무엇이 진정한 머무름인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떠나갔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건네시며 친히 다가오셨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은 연약한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늘 머물러 계신다.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품으로 달아들어 진심 어린 오롯한 봉헌을 할 수 있는 복된 그날을 그려본다.

김연희 수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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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오늘날 한 사람의 수도자가 나오기까지,
그리고 한 사람의 사제가 나오기까지,
최소6년에서 10년정도 걸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 양성기간을 3년으로 잡으신 것 같다.
지원기 1년, 수련기 1년, 유기서약기 1년
그렇게 3년과정으로 당신 제자를 양성시키고자 하였다고 보자.

처음에는 지원자가 그렇게도 많았다.
5천명이 넘는 군중이 떼거리로 몰려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중에 대부분은 병을 고친다거나
무언가 기적을 바라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중 일부만이 <그래 이분의 제자가 되자> 하고
따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원기 1년을 보낸 후
아마도 72명의 제자단이 남게 된 것같다.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또 여럿이 떠나게 되고
유기서약 때까지만 해도 꽤 많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이제 종신서약을 앞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중요한 가르침을 전수하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그 빵을 추구해야 한다고...
썪어 없어질 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제자들은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그 빵은 다름아닌 당신 자신이라고...
그러니 당신 자신을 뜯어 먹어야만 한다고...
제자들은 여전히 현세적인 관심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이 영적인 말씀을 못알아듣고
하나 둘씩 떠나버린다.

이제 열두제자만이 남아 있다.
예수님은 남은 열두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어떻게 하겠는냐?
너희도 떠나 가겠는냐?> 고 물으신다.
그분은 남아 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으신다.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오직 결단하기를 촉구하신다.
왜냐하면 신앙은 본인 스스로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때에만 생생하고
새로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 5년마다 통계청에서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때문에
시끌벌적 했던 때가 있었다.
가톨릭 신자수가 500만을 넘었고
최근 10년간 그 증가세가 불교와 개신교에 비교해서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이상했던 것은
우리 교회에서 냉담자까지 포함해서 교적상의 통계보다도
더 많은 수가 가톨릭 신자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어떤가?
주일미사 참석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교구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평균 25% 정도 된다고 한다.
400만 신자라고 한다면
주일 미사 참석하는 신자가 100만 정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 100만 중에서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는 얼마나 될까?

앞으로 통계청의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의 예수의 제자입니까? 당신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라고...

오늘 세례서약과 수도서약을 통해
그분의 제자로 불림받은 우리 모두는
다시한번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 촉구의 질문을 받게 된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진정 나의 제자가 되겠느냐?>

베드로처럼 그분만이 유일한 나의 스승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신 분임을 확신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서약은 또다른 사치가 되고만다.

오늘
더욱 겸허하게
"나를 당신 제자로 받아주소서!" 하고
청하는 영혼을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신다.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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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한 주일
생명의 빵에 대해 지루하다싶을 정도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답게-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너절하게-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은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6장의 마지막인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드디어 도대체 뭔 얘기냐고 투덜거립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투덜거리니 주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이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많은 제자들은 아예 떠나가 버립니다.
눈에 보이고 배를 부르게 하는 빵을 달라고 하니
생명의 빵을 얘기하시고
알아듣게 해달라니 생명의 말씀에 대해 얘기하시니
이런 엇박자도 없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엇박자는
주님께서는 영적인 빵과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적인 빵과 말을 듣고자 하니
어쩔 수 없다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그때 제자들만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도 알아듣기 어렵지만
생명이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
영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생명과 생명을 사는 것,
죽음과 죽음을 사는 것.
살지만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다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은 숨을 쉬고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의식이 있건, 없건 숨을 쉬고 있으면
그래서 살아있다 합니다.
숨을 쉬어야지만 생명은 유지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아
생명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고,
밖에서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숨은 생명의 들이킴입니다.

창세기의 주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으심으로 존재를 있게 하시고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이 아담 안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숨으로 성령이 제자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담의 숨으로 하느님의 숨을 들이키고
제자들의 숨으로 예수님의 숨을 들이킵니다.

숨과 숨이 통함으로,
숨이 숨을 들이킴으로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숨이 막히면,
숨이 숨을 들이키지 않으면 생명은 단절되고 죽습니다.

같은 이치로
곡기를 끊으면 죽는 것처럼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존재가 생명을 지닙니다.
生命은 生기라는 命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떠나서는 존재도 없고,
존재한다 하여도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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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의 최종적 지향점, 관상

신앙생활, 기도생활, 영성생활을 바탕으로 한 하느님 체험은 지극히 개별적인 체험이기에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나 상황이 지극히 다양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 중에 자주 환시를 보기도 합니다. 은혜롭게도 어떤 분에게는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며 말씀을 건네기도 하신답니다. 어떤 분들은 관상 기도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묵주기도 중에 성모님께서 바로 옆에 앉으셔서 함께 기도하시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 체험,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주의할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체험은 사람마다 그 정도나 강도가 지극히 상이하기에 그런 체험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비체험, 영적체험 앞에 우리는 보다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이 근질근질해져서 함부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발설하다가는 ‘약간 맛이 간 사람’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사람’ ‘공주병이나 왕자병에 걸린 사람’으로 오해받거나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신비로운 체험이 도저히 혼자 간직하기 부담스러울 때는 현명한 영적지도자를 찾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왜냐하면 천상적 신비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 본격적인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특별한 체험은 거북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시기심을 발동하게 만듭니다. 투덜거리게 만듭니다.

속상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도대체 뭐냐’는 식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 신비로운 말씀 앞에 많은 제자들이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제대로 된 영성생활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사실 관상입니다. 기도 가운데 나란 존재가 사라지고 하느님만의 충만한 현존만이 내 안에 남게 됩니다. 내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하느님 그분께서 함께 해주시니 나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황홀합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관상이 아니겠습니까?

한 대 영성가는 관상기도 중에 황홀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자주 체험하곤 했었는데, 하루 온 종일 그런 상태에 머물러있을 수 있나요? 밥도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관상기도에서 현실생활로 빠져나와야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합니다. 감미로운 하느님 현존 체험 상태에서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 천상적 말씀, 영적 말씀에 거북해하고, 귀를 막았습니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거룩한 천상적 말씀, 영적인 말씀들은 대체로 설득력을 상실합니다.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에 속한 천상의 시민이기 때문에 꾸준히 지상생활을 넘어서고 극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천상적 삶의 양식에 대한 비아냥거림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고 마음먹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관상기도는 다른 무엇에 앞서 묵상기도를 잘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묵상기도는 우리 인간 측의 의지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묵상할 것인가? 제일 좋은 것은 그 날 그 날 복음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을 파고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한 관상 기도 전문가의 증언입니다.

관상기도 멀고도 먼 과제, 내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숙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복음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쓰고 또 썼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해서를 찾아보기도 하고, 말씀봉사자나 신부님들께 여쭤보기도 하면서 계속 파고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날 그 날 성경말씀과 내 삶을 연결시켜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그렇게 의지적인 노력을 계속했더니, 말씀에 맛이 점점 들어갔습니다.

그런 노력을 쉼 없이 계속하던 어느 순간, 이런 한 가지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내 노력은 줄어들면서 주님께서 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의지, 내 노력, 내 생각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그저 주님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관상기도는 철저하게도 수동적인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나 감정, 생각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활동하시는 기도이기에 그 맛이 각별합니다. 황홀합니다. 신비롭습니다. 감미롭습니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거기에 그렇게 머무르려고 해서는 망합니다. 관상은 반드시 일상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 현실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관상기도를 잘 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늘 눈을 하늘로 치켜뜨고, 성당에서만 죽치고 있다면 절대로 관상기도 잘 한 사람 아닙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었다면 그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삶을 더 열심히 살았다면 그는 분명 잘 하고 있는 관상기도자입니다.

성당에서 관상기도 확실히 제대로 한번 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는 완전히 돌변해서 며느리 쥐 잡듯이 잡는다면 그 관상기도는 헛것입니다. 관상기도는 특별히 친교의 영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박삼일 동안 관상기도 열심히 하고 돌아와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사람 저 사람 멱살 잡고 흔든다면 그 관상기도는 완전히 실패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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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 부활하신 주님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열두제자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하니,
주님의 처지가 참 외롭습니다.

무정한 인간 세태를 반영합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제자들의 믿음을, 신의를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지조(志操)니
절개(節槪)니
충성(忠誠)이니
신의(信義)니 하는 말이 사라져가는 오늘 날,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는 주님의 절박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바로 우리 모두의 대답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일편단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부활하신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 곳은 오직 하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부활하신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을 떠나 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얼마 전 써놓은, '아무데도 없구나!’ 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
아무데도 없구나!

찾아 갈 곳,
쉴 곳,
있을 곳,
말할 곳,
만날 이라곤

오직 하나
지금 여기 계신
부활하신 주님뿐!

이 세상
아무데도 없구나!

이래서 누구나의 근원적 외로움입니다.
주님이 아니곤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
우리의 실존적 체험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부활하신 주님 안에 뿌리를 둘 때
비로소 해결되는 외로움이요 영육(靈肉)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영(靈)과 생명(生命)으로 충만케 합니다.
이런 주님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려 하기에
허무만 가슴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부활하신 주님만이 활력의 원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중풍에 걸려 8년 동안 침상에 누워있던
애네아스를 한 말씀으로 치유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시오.”
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죽은 타비타를 살리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베드로입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를 영육의 질병에서 일으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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