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평일강론 (홀수해)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8 98.4%
[인천/서울] 생명의 빵
조회수 | 1,484
작성일 | 09.05.03
요즘 저는 어떤 책만 보면 아주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책은 글씨도 몇 자 적혀 있지 않고 주로 그림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멋진 그림과 감동적인 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진과 그림만이 있을 뿐인데 이 책만 보면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집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책일까요?

이 책은 다름 아닌 지도책입니다. 사실 다음 달에 몇 명의 신부님과 휴가를 맞춰서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있거든요. 비록 3일간의 짧은 자전거 여행이지만,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도만 펼쳤다하면 마치 지금 제가 자전거 여행을 하는듯한 착각을 느끼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있지요.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전거 여행이 그렇게 편한 여행도 아닙니다. 그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아서 분명히 쉽지 않은 여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마음이 가득한 것은 작년 여름에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통해서 그 맛을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마음이 맞는 신부님과 함께 한다는 것도 저의 기분을 더욱 더 좋게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런 감응 없이 볼 수 있는 지도책이 저에게는 커다란 설렘을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책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따지고 보니, 우리의 삶 안에서는 지도책 말고도 설렘을 가져다주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특히 고통과 시련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러한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마음만을 부각시키다보니 나를 살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시기만 되면 많은 신부들이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빵에 대한 복음말씀이거든요. 오늘도 빵, 내일도 빵, 또 그 다음날도 빵……. 계속되는 빵 이야기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편적으로 복음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메시지가 인간의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똑같은 복음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지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빵 이야기만 계속된다면서 강론할 내용이 없다고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이 듣기 거북하다고 말하는 유다인들처럼 말이지요.

앞서 세상의 모든 것들에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그 의미를 찾아나갈 때, 우리들은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에 대한 체험, 그 체험은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 가득합니다. 그 체험을 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내가 접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에서 의미를 찾아보세요.

조명연 신부
468 98.4%
말끝마다 “당신이 뭘 알아요?” 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이 부인에게 전화가 온 것입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었지요.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해보니, 남편이 이미 죽어서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허구한 날 남편을 구박하기는 했지만, 막상 남편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지요.

이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천을 내리며 말합니다.

“여보, 사실 나 아직 안 죽었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보려고 연극을 했던 것이지.”

그러자 깜작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잘 듣고 실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면서, 보이는 사람의 말은 왜 들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바로 나만이 옳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윗자리에 서야 한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러한 착각과 이기심 때문에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까지 듣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 또한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만을 강조했었고, 윗자리에 올라갈 생각만 했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각종 핑계를 대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우리 역시 내 뜻과 내 생각만을 주장한다면 또한 나를 높여서 윗자리에만 서려는 욕심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뜻이 아닌 주님 뜻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또한 윗자리가 아닌 낮은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방심하고 있을 때 드러난 사소한 것들이 그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 준다.(존 로크)

조명연 신부
  | 05.03
468 98.4%
어떤 형제님이 무척 아픈 것 같습니다. 새빨갛게 변하였고 끊임없이 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요. 지나가면서 이 형제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 형제님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 무엇을 먹는가 싶어서 유심히 쳐다보았지요. 그것은 바로 그렇게 맵다는 ‘청량고추’였습니다. 쉬지 않고 ‘청량고추’를 먹어대고 있으니 얼굴 표정이 고통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고통스러워 한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스로 매운 청량고추를 먹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형제님에게 물었지요. “아니, 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청량고추를 먹습니까?”

그런데 이 형제님의 답이 가관입니다. “혹시 달콤한 청량고추가 있을까 싶어서요.”

그러한 고추가 있을까요? 요즘 개량된 고추 중에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청량고추 중에서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지요. 만약 달콤한 청량고추를 찾는다면, 지금 당장 입에 넣고 있는 청량고추를 그 자리에 내려놓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일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엉뚱한 곳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많은 물질적인 것들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데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것들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 안에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하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들은 만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늘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달콤한 청량고추를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것처럼, 이 세상의 것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를 자청하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달콤한 주님의 말씀만을 원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달콤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었을 때에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십자가를 질 수 없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묻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곧바로 답하지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이 바로 우리들의 진심어린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 안에서 행복을 찾지 마세요.

조명연 신부
  | 05.03
468 98.4%
걱정도 팔자

교구청에 있다 보니 미사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는데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본당에 도착한 뒤, 화장실에 들렀는데 화장실 문 앞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군요. ‘문을 꼭 닫아주세요.’ 비록 근처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신사답게 문을 꼭 닫고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을 다 본 뒤에 나오려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난처했지요. 초조한 마음에 문을 세게 두드리며 외쳤지요. “여기 화장실에 갇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런데 몇 번을 이렇게 외친 뒤, 문득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핸드폰이 있었으니까요. 성당 사무실에 연락하면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 일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으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떠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보며 열두 사도들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따를 때 세상의 참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나지 않습니다.

정병덕 신부
  | 05.03
468 98.4%
오늘 복음 역시 어제와 같이
예수님이 구세주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 떠날 수도 있겠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는 말씀에서처럼
“영”은 하느님 또는 예수님한테서 오는 “영”을 가리키고 “육(또는, 살)”은 자기 자신에게만 내맡겨진, 제한된 가능성 안에 갇힌 인간이란 의미이겠지요.

‘육’으로서의 인간은
혼자 힘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믿지도 못합니다. 반대로 ‘영’은 인간을 비추어 주는 생명의 힘으로 그의 눈을 열어주고 예수께서 표현하시는 ‘말씀’을 식별하게 해줍니다.

성령께서 내리시면(요한 7,39)
그 모든 의미가 밝혀지게 된다고 했으니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과 십자가를 꿰뚫어(13,7 참조) 그분의 영광을 식별하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의 진실성과 권능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예수님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시는 분인가를,
곧 하느님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당신이 기적을 통해 증명하고 보여주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성령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것이니 정말 간절하게 알아보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믿음으로 고백했듯이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 순간을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김수빈 - 서울대교구 명동 성당
  | 12.17
468 98.4%
우리는 부활 3주간 평일미사 복음을 통하여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을 계속 들어 왔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매 미사 때 마다 받아 모시게 되는 영성체의 신비와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해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인 성체가
당신 자신의 살아 있는 몸이라는 것을! 또 왜 우리가 받아 먹어야 하며, 받아 먹음으로써 어떠한 영신적인 은혜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가를 이해시키시기 위하여 먼저 같은 복음인 요한 6, 1-15에서 유다인들의 명절인 해방절이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도 5,000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나 남게 하시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기적을 목격한 그들은
자기들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이므로 예수가 바로 그가 아닌가 하고 예수를 왕으로 추대할려고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서둘러 호수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배를 태워 보내시고, 당신은 피하시어 산에서 기도하신 다음 물 위를 걸으시어 건너가셨습니다.

다음 날 군중들은,
없어진 예수님을 찾아 가파르나움까지 쫓아왔습니다. 그러한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내가 너희에게 베푼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쉽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만을 보고 온 것이 아니냐? 한 평생의 허기를 채워주는 썩어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그 기회에 일러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그러한 빵은 어디서 구하며, 그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것이며,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육신을 살리기 위한 빵을 기적을 통해 마련해 주신 다음에 이제 물질적인 빵에서 마음을 들어높혀,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이룩되는 우리 영혼의 음식이 될 당신의 몸과 피를 마련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이제 그 말씀을 받아드리기가 어렵다고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 드리려 않는 태도를 책하시지 않으시고, 앞으로 장차 그 증거를 보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당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천하심으로써 당신이 전에 있던 곳인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가는 것을 보게되면, 그때 가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결국 예수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시는 분인가를 즉, 하느님께로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그리스도임을 기적들을 통해서 증명하고 보여 주었는데도 받아드리지 않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의 복음 앞에,
우리에게 당신 몸과 피인 성체성사를 주시며, 우리와 일치하시며,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사도 베드로가 믿음으로 고백했듯이 "주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하는 믿음의 고백을 더욱 깊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 12.17
468 98.4%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정답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너는 네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누구이며 뭘 하는 사람인가?
“나는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님은 바람 속에서」, 57쪽)라고 말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나는 오늘도 보람과는 먼 일상의 일들에 빠져 ‘성당 짓는 일’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있다. 믿고 안다는 것과 땀 흘려 일하는 것과의 차이를 느낀다. 돈에 눈이 먼 생활이 아니었나 반성한다.

물고기 153마리(요한 21,'11)를 볼펜 상표로 만든 분이 있다.
뵙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의 기업 철학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 기업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예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일곱 가지(마태 5-7장) 중
맨 먼저 것이 “성내지 말라”임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다가 진퇴양난에 처한 내 모습 ―'예수께서 이미 내 죄가 그 여인 못지않다는 사실을 알고 계심을 알았기에'―'과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3)라고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버릴 수 있음을 단언하는 나의 위선을 생각하면 믿고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신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옛 성인의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큰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며, 하느님을 닮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

서울대교구 김기문 형제
  | 12.17
468 98.4%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요한 6,60­-69)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특별히 예뻐한다는 이유로 반아이들 전체가 돌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한것입니다. 비록 어릴적 순수할 때의 기억이지만 외토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일인지를 깨달았기에 만나는 이웃과 다양한 사회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들과의 지혜로운 만남을 늘 생각할 수 있기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요즘에 새롭게 인간관계 갈등을 위한 통신 연수 3개월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람을 만나야하고 이웃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살아야합니다. 어느 누구든지 공동체 안에서나 인간관계 안의 갈등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이익과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서 이해와 양보를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며, 공동체의 악으로 작용하는 갈등을 극복하고 생명을 줄 수 있는지를 새롭게 배우고 있습니다.

평소에 잘아는 형제님은 오랜 냉담을 겨우 풀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 온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장으로 적격이라는 이유로 사전 말한마디 없이 전임회장은 회원들이 모여있는 날 공지를 하고 박수를 쳐서 성급하게 통과시켰습니다. 물론 전임 회장은 맡은 일이 많았고 적당한 사람을 만났으니 천만다행이다 생각하였을 것이고, 혹시 미리 이야기를 했다가 거절당하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형제님은 이런저런 일로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는지 또 다시 냉담하고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고 완벽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이모인 곳이니 많은 갈등과 시행 착오가 빈번할 것입니다. 때로는 일좀 하려고 하면 어떻게든지 끌어내리는 시기와 질투 또 냉소적인 눈빛으로 상처를 주고 좌절시켜 신앙심 약한 영혼은 어둠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주님의 ' 영’은 인간을 비추어 주는 생명의 빛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고 예수께서 표현하시는 ‘말씀’을 식별하게 해줍니다.

지금의 고통스러운 아픔이나 환경이 그분에게 영광이고 기쁨이며 권능임을 식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늘 나약하기에 주님을 두고 종종 떠나갑니다. 혹시 자신의 사소한 이기심이나 부족한 지혜 때문에 이웃이 좌절과 아픔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생명의 삶을 좌절하게 하지 않았는지... 세상적인 것에 눈멀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서 항구하게 주님만을 찾아가는 은총의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내일은 성소 주일, 착한 목자 주일입니다. 좋은 목자이신 주님께 일생을 바칠 젊은이들, 사제성소자들과 수도 성소자들을 위하여 정성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름답고 환한 세상에 봄의 향기가 힘들고 지친 영혼들에게 희망과 기쁨으로 전해지시길...행복한 주말과 주일 되세요.

---------------------------------------------

엘리 복음 묵상에서
  | 12.17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26   [의정부] 항상 감사하며 삽시다  1421
25   [수도회] 예수님 안에서  [2] 1573
24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1328
23   성체성사로 오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요한6장 묵상 전체)  1992
22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1405
21   [기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1] 1613
20   [부산/수원]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4] 1520
19   [전주]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1] 1337
18   [의정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1283
  [인천/서울] 생명의 빵  [7] 1484
16   [수도회] 다양성 안의 일치  [8] 1497
15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1299
14   빠스카의 신비에 대한 체험  1485
13   [기타]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1448
12   [부산/원주] 완전한 신앙, 완전한 일치, 완전한 사랑  [4] 1509
11   [전주]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1] 1553
10   [수원] 봉헌과 성체와 삼위일체  [3] 1506
9   [대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사랑입니다  1575
8   [인천/서울]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5] 1673
7   [수도회] 절대적인 신뢰  [7] 1523
 이전 [1]..[71][72][73] 74 [75]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1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