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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수원]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조회수 | 1,520
작성일 | 09.05.03
참으로 우리 사회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한없는 욕심과 극도의 이기심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현실을 볼 때마다 매우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아서인지 몰라도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반면, 자신들을 애타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자신과 집단의 이익과 권리만을 찾기 위해 소중한 일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데 분노와 울분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병자를 남겨 둔 채 떠나지를 않나,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의 노동자를 거리로 내쫓아 하루아침에 온통 집안을 풍비박살을 만들지 않나, 치매 걸린 불쌍한 노부모와 장애를 가진 가련한 어린아이를 버리지를 않나,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빈번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심각한 분열과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불행한 세상으로 점점 타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언제쯤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실현될 날이 올지, 정말 미래와 희망은 있는지 모두들 근심과 우려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위기 상황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먼저 앞세우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날 모진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참고 견디던 인내와 성실성은 온데간데없고 조금만 귀찮고 힘들고 어려우면 그냥 도망쳐 버리려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타인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해 주기를 원하면서, 왜 자신은 타인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려고 합니까? 희생과 인내가 따르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반드시 있어야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에 따른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참된 자유로움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질줄 아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제자는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줄 몰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을 배반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는 눈앞의 사리사욕에 빠져 그만 유혹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똑 같이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근범 신부
468 98.4%
떠난 자와 머문 자

지난 부활 제2주간 금요일부터 평일복음으로 듣기 시작한 요한복음 6장을 종결하는 부분이 오늘 복음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요한복음 3장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지어 결말을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신의 살과 피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난 자들(요한 3,5)을 위한 음식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당장은 그렇지가 않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하늘로부터 내려 온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사람들 대열에 드는 것이다. 아들은 이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려 아버지께 이끌어 갈 것이다.

누누이 밝혀 두지만 복음서의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러므로 복음서에 담겨있는 말씀은 그 목적상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는 복음말씀이 예수님 당대(當代)의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복음말씀이 예수님 후대(後代)의 사람들에게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상황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그분을 실제로 대면(對面)하였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는 공식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아들이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빵의 기적'을 통하여 육신을 배불렸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심을 믿고,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가 영생을 위한 양식이요 음료임을 믿는다면, 십자가상 예수의 한쪽에 달려있던 죄수의 경우와 같이 "오늘 너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는 말씀은 바로 그들을 향한 말씀이 되는 셈이다.

복음서의 독자와 우리들을 포함한 예수님 후대의 사람들은 복음서의 기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보게 된다. 이 경우에는 복음서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듣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는 공식이 적용되는 것이다. 세례를 받음은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새로 태어난 사람은 육적인 양식보다는 영적인 양식인 예수님의 살과 피(성체성사)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안에 사시는 예수님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키워가게 된다. 결국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비록 육신의 삶을 마친다 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아들에 의해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믿고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요한 20,29)으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대의 사람에게나 후대의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거나 그분의 말씀을 듣게되는 어떤 경우에든 그 자리에서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의구심을 가졌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고 12제자들도 포함된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나(66절), 12제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베드로의 단호한 신앙고백 덕분에(68절) 예수님 곁에 남게 된다. 그러나 두고 볼 일이다. 믿음이란 한번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는 영적(靈的)인 삶을 추구하는 자는 열매를 쉽게 맺을 수 있겠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육적(肉的)인 삶을 추구하는 자는 어려울 것이다.(63절)

박상대 신부
  |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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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번 주간의 복음을 통하여 요한 복음 6장을 계속 들었다.
그것은 예수께 서 빵의 기적을 통하여 계시하고자 하시는 성체성사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고 했고(15 절), 예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시고 서둘러 제자들을 배를 태워 가파르나움으로 보내시고(16절) 당신은 산으로 피하셔서 기도하신 다음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고,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19-20절).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는다(25절).

예수님은 군중에게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내가 너희에게 베푼 기적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26절)이라고 하시며,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27 절)고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33절)고 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하고 청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라고 하시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될 것이다(51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절)하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물러갔고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66절). 이 때에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67절)하고 물으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 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8절)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과 생명을 지닌 말씀이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의 말씀을 영이며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디에서 오셨고 어디로 가시는 분이신가를 당신의 기적들을 통하여 증명해 주시는 데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다인들과 같다.

우리는 이제 오늘의 복음 앞에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라고 믿 음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남겨주신 성체를 열심히 영할 수 있어야 한다. 성체성사는 어제도 말했듯이 교회의 심장이며, 우리 인간을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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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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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우리 사회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한없는 욕심과 극도의 이기심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는 현실을 볼 때마다 매우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아서인지 몰라도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반면, 자신들을 애타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죽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자신과 집단의 이익과 권리만을 찾기 위해 소중한 일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데 분노와 울분을 감추지 못하겠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병자를 남겨 둔 채 떠나지를 않나,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의 노동자를 거리로 내쫓아 하루아침에 온통 집안을 풍비박살을 만들지 않나, 치매 걸린 불쌍한 노부모와 장애를 가진 가련한 어린아이를 버리지를 않나,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빈번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심각한 분열과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불행한 세상으로 점점 타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언제쯤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실현될 날이 올지, 정말 미래와 희망은 있는지 모두들 근심과 우려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위기 상황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먼저 앞세우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날 모진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참고 견디던 인내와 성실성은 온데간데없고 조금만 귀찮고 힘들고 어려우면 그냥 도망쳐 버리려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타인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해 주기를 원하면서,
왜 자신은 타인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려고 합니까? 희생과 인내가 따르더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반드시 있어야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에 따른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참된 자유로움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질줄 아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 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제자는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질줄 몰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분을 배반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는 눈앞의 사리사욕에 빠져 그만 유혹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똑 같이 "자, 너희도 나를 버리고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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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근범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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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내내 요한복음 6장 생명의 빵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오늘 복음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해야겠습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뤄집니다. 지금까지 성찬의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오늘 복음은 말씀의 전례에 관한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 곧 복음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난무합니다. 언론매체, 대중매체에서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 중에는 진리를 거역하고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거짓 말씀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지요. 물론 평화방송은 예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육적인 지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좀더 편리하게 살고, 삶을 좀더 윤택하게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살찌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은연중에 세상의 지식들은 돈이 최고라고, 건강이 최고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육적인 지식에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요즘 <다빈치 코드> 같은 반그리스도교 서적들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짓종교로 몰아세우는 뉴 에이지 계통의 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수가 팔렸다고 하는데, 가톨릭 신자들도 접하고 나서 반신반의한다고 하니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거짓된 말씀에 속아 넘어가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적하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 논리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복음적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는 사람들입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믿음으로 듣는 말씀은 용서를 가능하게 하고, 두려움을 없애 주며, 내적 평화와 사랑이 넘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험하게 이끌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실천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한데 어찌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오늘 복음 말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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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영훈 미카엘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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