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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조회수 | 95
작성일 | 18.07.11
[부산]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이 특별히 선발되어 사도로 임명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리옷 사람 유다가 뽑혔다. 사도행전은 추가로 유다를 대체한 마티아(사도 1,16-26), 그리고 바울로와 바르나바(사도 13,2)를 사도로 소개한다. 그들은 학생의 신분과도 같은 제자(弟子)였다가 이제는 전권대사의 의미를 가진 사도(使徒)로 임명되어 파견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이 파견되는 장소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도 아닌, 오직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로 국한되었다. 그들에게 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오복음의 독자(讀者)가 우선적으로 유다인, 또는 유다인 계통의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 끝까지를 대상으로 한 복음선포를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주실 것이다.(마태 28,19)

사도들에게 대한 예수의 파견설교(10장)가 계속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인 예수께서 해오시던 일과 같다. 우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표지로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행하게 될 기적의 능력은 예수께서 거저 주신 것이므로 그들도 거저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성과도 얻겠지만 실패도 맛보아야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주 엄한 여장규칙(旅裝規則)을 제시하신다. 이 규칙에 의하면 어떠한 여벌의 것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철저한 청빈(淸貧)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의무도 암시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격은 철저히 복음선포에 메여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비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시기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교에도 똑같은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전성기를 맞이한 중세시기 이후 교회 안에서는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선교규칙(宣敎規則)을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 있다. 교회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는커녕 거저 받은 것을 미끼로 부(富)를 축적하였다.

가난하고 길 잃은 양들을 찾기보다는 있는 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정치와 경제에 크게 관여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신약성서 시대까지 있었던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능력도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일만큼은 잘했다는 것이다. 단죄하고 파문하는 일이 교회의 일상(日常)이 된 셈이다.

현대의 교회 모습도 중세기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선포자들에게 구마의 능력도 치유의 능력도 없어 보인다.

둘째, 선교상의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원칙이 자기 합리적인 이유로 거세(去勢)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틀어 이 원칙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은 몇 안 된다.

셋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릴 정도까지의 단죄(斷罪)’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선교방법은 선교대상의 문화적 수용과 더불어 타협적으로 이루어지며, 오히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신자(信者)들과 ‘냉담자(冷淡者)’들에 대한 내부지향적 사목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회이며, 누구로부터 파견된 교회인지?” 교회는 오늘 복음의 선교규칙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지 않도록 다시금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오늘 복음에 자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야 하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기적보다는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가진 바를 서로 나누면서 세상에 정의와 사랑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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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 있을 자리를 명하시며 그 할 일을 정해주신 하느님의 크신 지혜 앞에 과연 어떠한 찬미가 걸맞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된 우리에게 참 좋은 약속을 들려주십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하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뽑아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1절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현존은 끊임없이 나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나 자캐오의 얘기에서 혹은 바오로 사도의 경우처럼 주님은 전혀 주님을 알지 못하는 ‘나’를 먼저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분명한 하느님의 선택을 밝혀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곱의 아들 요셉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농도 짙은 섭리의 손길은 오늘 나에게도 분명하게 다가와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그분의 섭리로 선택된 당신의 제자인 것을 깨닫는다면 결코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게으를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신 그 분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오늘 우리 에게 분명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탁받은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실행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분의 평화로 가득할 수 있다는 정말 좋은 약속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 베풀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참 기쁜 일 입니다. 그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위해 당신 몸을 사리지 않고 고쳐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선을 베푸시기 전에 그 무엇보다 앞서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칫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이 약자를 돌보고, 앓는 이를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에 더해서 성당에 나오는 이유가 나쁜 짓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니까 혹은 좋은 강론 듣고 착한 일 하면서 마음에 평화나 얻으려는 것 뿐이라고 아주 겸손하게 말하는 신자분도 만날 수 있는데 정말 그것이 전부라면 굳이 성당에 나오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해야 할 바’를 알아야 합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저 받은 평화를 거저 주며 함께 누리는 일이 가장 우선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건네준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발이 생각났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상대를 위해 빌어 준 평화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나에게 되돌아오는 하느님의 방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나발은 자기 재산을 지켜주면서 호의를 보였던 다윗을 무시하고 그가 빌어 준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서운하고 분한 마음을 하느님은 먼저 헤아리십니다. 다윗에게 죄를 피해가도록 마음 쓰시고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의 배려로 다윗은 완전한 평화를 맛보지 않았습니까 ?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아주 구체적인 평화를 느끼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믿고 택함을 받은 우리들이 그 명령에 따른다면 가장 안전하고 기쁜 평화가 내 앞에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강한 하느님의 용사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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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아버지의 발걸음

본당에서 사목하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성당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전화로만 가끔 안부를 묻곤 하셨는데 그날 제가 사목하는 곳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셨습니다. 미리 연락을 하면 혹시라도 “몸도 불편하신데 오지 마십시오.” 할까 봐 조용히 오신 듯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투병 중이셨는데도 불편한 몸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오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뵙자마자 마음과 달리 “가능하면 다음에는 오지 마십시오. 제가 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고향 집에서 제가 사목하는 곳까지는 제주도 내에서 가장 먼 거리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발했을 것이고, 차도 여러 번 갈아탔을 것입니다. 저는 내심 ‘아버지의 병환이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본의 아니게 섭섭하게 들리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신부님 얼굴을 보러 왔는데, 이제 보았으니 됐습니다.” 하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사제관으로 모시려 해도 굳이 사양하며 돌아서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힘든 몸을 이끌고 아들을 보러 오셨는데, 아들한테서 들은 첫마디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무척 죄송합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는데, 아버지께서 드러나지 않게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례 후 제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제게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슬픔을 가누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지워질지 모르나 생전의 아버지 모습은 기억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깨닫는 것은, 세상에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과감하게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그 길이 사랑을 전하는 길, 화해하러 가는 길, 위로하는 길, 용서하는 길, 용기를 주는 길, 격려하는 길이라면 다른 일을 무릅쓰고서라도 나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나는 제자들이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을 제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서는 길은 복음의 길이고, 우리가 길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 여정 자체가 복음의 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 제주교구 송동림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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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거저 주어라

사도들은 앓는 사람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등 여러 가지 권능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진리임을 입증하는 수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권능을 감탄하면서 사도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권능을 사고 싶어 돈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8).

복음선포에 있어서 물질에 대한 탐욕은 금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밤에는 호구지책으로 일하고 낮에는 복음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이 긍지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1고린 9,15)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아무런 대가없이 일한다는 원칙이 사도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신자들이 알아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선교사가 돈에 욕심을 부리면, 구설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이 못 하는 것을 선교사들이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어긋날 때는 실망합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외치는 선교사들의 생활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예수께서 선교사들이 돈에 욕심을 낼까 걱정이 되셔서, 배낭, 여벌옷, 신발, 지팡이도 가져가지 말라(9)고 하십니다.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할 때, 하느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것도 금하십니다. 여러 집을 다닌 만큼 구설수는 더 많아질 것이며, 한 집에 있으면 사람들이 필요할 때 선교사를 쉽게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전파에 방해되는 어떤 요소도 다 배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 챙기면,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 없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 대구대교구 김경식 몬시뇰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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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12사도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어라.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주고, 마귀는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돌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사도들은 그 일을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 일을 그 일을 합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 8) 하셨습니다. 권능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일한 대가로 단지 음식, 양식을 얻음으로 만족해야합니다. 그 외에 대가를 받아서도 안되고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거저’의 그리스 원어는 δωρεαν입니다. δωρεαν이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의 δωρεα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δωρεαν의 의미는 ‘선물로’ 또는 ‘값없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선물로 받았으니, 선물로 주어라” 또는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어라”

사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선물로 주어야 합니다. 값없이 주어야 합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가진 것을 선물로 주어야 합니다. 값없이 주어야 합니다.

거저 주는 것은 이익이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저 주는 사람은 이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선물로 주면서 돈을 받지는 않습니다. 이익을 남기는 것은 장사이고 상업입니다. 이익을 남기는 사람을 기업인, 상인, 장사꾼이라 합니다.

교회가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이익을 생각하고 이윤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하나의 기업이라 하겠습니다. 봉사자가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하면서 이익을 챙긴다면 그 봉사자가 아니라 장사꾼일 것입니다.

교회는 사심 없이 욕심 없이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봉사자는 선물로 받은 것을 선물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것을 값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 대구대교구 박재현(요셉)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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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평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면 나누는 인사말이 바로 평화, 곧 ‘샬롬’입니다. 배고픈 시절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일상적인 인사였던 우리들처럼 수백 년간 나라 없이 떠돌아다닌 그들에게는 평화가 가장 절실하기 때문에 그런 인사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이라는 단어를 평화의 인사말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본다면 ‘샬롬’은 평화의 인사가 아니라 그들을 약탈해서 얻은 평화를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에게 ‘샬롬’은 억압을 요구하는 인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사용하는 ‘평화’라는 단어에 이중성이 있음을 진즉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저 편하게 대충대충 사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치열한 영적인 싸움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평화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조건을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평화를 원합니까? 시련과 어려움이 뒤따르더라도 참된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원해야겠습니다.

▦ 청주교구 여성국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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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미국으로 교포사목을 떠날 때 제가 가진 것들이 너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큰 가방 두 개에 넣을 수 있는 것말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처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는 복음 말씀대로 적게 가졌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가졌지요.

그런데 어느날 성체 앞에 앉아 있다가 ‘적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이처럼 적게 가지고도 홀가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필시 저처럼 혼자 사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을 부양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겠지요. 아니면 가는 곳마다 필요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거나.

그러고 보면 적게 가졌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 비해 참 팔자 좋게 사는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게 지녔다고 흐뭇해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삶만이 온전히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음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주님, 제 삶이 가식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청빈의 정신을 알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도와주십시오.

▦ 마산교구 백남국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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