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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수원] 예수님은 나에게 뭐라고 하실까?
조회수 | 162
작성일 | 22.01.09
[의정부] 예수님은 나에게 뭐라고 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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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우리를 경시하는 사람들은 예수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쟁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이 누구냐? 그리스도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누구라고 설명하시겠는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이, 악령에게서 예수님이 누군지 듣게됩니다. 물론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답을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님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누구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이나 글 안에 가두어놓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악령은 정답을 말했고, 그만큼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악령에게 내려진 예수님의 명령은 단호합니다. "잠자코 그에게서 떠나거라." 예수님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던 악령은 왜 이처럼 치욕적인 명령을 들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악령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분의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령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망치려는 훼방꾼이요 자신을 제거하러 온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몰랐더라면 대들고 싸웠을 텐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힘없이 물러나고 맙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한 마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만으로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삶의 힘이 될 수도 있고,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다가오시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힘이 되느냐 아니면 병이 되느냐는 우리의 삶에 달려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저는 예수님 당신을 압니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벗으로 받아들이실 지 아니면 ’입을 다물고 물러가’라는 참으로 당혹스런 명령을 내리실 지를 자신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자신의 삶을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에 맞추어 가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과연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실 지 묵상하면서 보내시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생활을 추슬러 좀더 거룩하게 우리의 근원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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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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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예수님과 더러운 영,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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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곳에서 당신의 첫 번째 적대자를 만나십니다. 사람 속에서 활동하면서 사람을 소외시키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더러운 영이 바로 그 적대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더러운 영을 가차 없이 쫓아내심으로써 사람을 온전히 자유롭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로 이 기적이 마르코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입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로서,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은 하느님 모습을 닮은 존엄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행위는 사람에게 자유를 선사하신 하느님께 대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다양한 얼굴을 한 더러운 영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연대와 참여를 호소하는 집회와 결사를 불법적으로 억압하는 것, 불의한 권력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 언론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 모든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국가권력을 소수가 독점하고 다수의 국민들을 두려움 가득한 침묵 속으로 몰고 가는 것, 남성과 여성의 차별, 노동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내국인과 이주민의 차별 등 이 땅에서 당연시되는 여러 차별들,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고유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길들여져야 하는 존재쯤으로 여기는 것, 이 모두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더러운 영의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과한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더러운 영의 활동들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더러운 영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더러운 영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입니다.

만약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면,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차라리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니 예수님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죄 없는 생명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비록 하느님께서 빚으신 피조세계에 경탄한다 해도,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탓 없이 일자리 보금자리 빼앗겨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생명을 내던지는 벗들의 피눈물을 씻어주지 못한다면, 비록 일용한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해도, 정의와 해방을 선포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에 깃든 신성함과 거룩함에 깃든 일상성을 외면하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여정을 단지 정해진 시간과 좁은 공간 안에만 놓는다면, 비록 매일의 기도를 통해 삶의 한 부분을 거룩하게 보듬는다 해도,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아주시려 오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을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당당히 고백하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며,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로부터 쫓겨났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 하고, 이 믿음은 오직 예수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따르며 예수님과 맺어진 관계를 이어감으로써만 온전히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때로는 움켜쥐고 때로는 내던지는, 살면서 하나쯤 지니면 좋을 폼 나는 장식품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임을, 머리와 입이 아니라 삶으로 묵묵히 드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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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2016년 1월 12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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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하느님처럼 되어야 악령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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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초기에 어떠한 권위로 가르침을 이어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악령 들린 사람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코 1장 24절)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자기를 들어 높이는 행위이고
그리스도를 자신과 한편이라고 말하며
그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하시며 악령을 당신 권위로 누르십니다.
사람들을 이것을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코 1장 27절)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에 대한 권위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악령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십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할까요?
당연히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악령도 하나의 영이기에 영은 영에만 반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원죄로 성령을 거부하였기에
쉽사리 악령의 노예가 됩니다.
악령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전능한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교만으로
유혹하는 악령 앞에서 언제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에게
웹 디자이너 ‘도츠’라는 남성이 상담하러 찾아왔습니다.
동거 중인 여자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쿠라이’라고 부르는 그 친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데 도츠는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집에 있으며 그녀를 맞이해야 한다고 합니다. 도츠는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이 있어 자신이 들어왔을 때 남자친구가 없으면 사쿠라이는 견딜 수 없어 하고 끊임없이 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도츠를 범죄자 취급하며 심하게 몰아세웁니다. 도츠는 사쿠라이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시간이나 사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도츠가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울렸고 그래서 받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화가 울려서 전화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회의실 사무직 여직원이 회의실에 들어오더니 “저기…. 혹시 도츠씨 계신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츠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여자친구가 사무실로 몇 번이나 전화해서 바꿔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츠는 어쩔 수 없이 전화해야 했고 흥분하여 막무가내인 그녀 때문에 회의를 중단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로 도츠는 회사에서도 조금씩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도츠의 노력으로 사쿠라이가 변할 수 있을까요? 사쿠라이는 왜 도츠를 ‘지배’하려 드는 것일까요? 도츠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쿠라이의 도츠를 통제하려는 마음은 바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쿠라이의 문제는 도츠가 아닌 자신의 어릴 적 상처 때문입니다.

사쿠라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관찰하는 여름방학 숙제를 위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와 동물원에 가기로 된 날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사쿠라이에게 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잠깐만 기다려. 꼭 끝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고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집을 나간 아버지가 계속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내가 숙제를 함께 하자고 하도 부탁해서 아버지가 그게 싫어서 집을 나가신 거야!”
몇 년 동안 후회와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고 그날 그 여자와 도망치기 위해 떠났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듣고는 이젠 자책이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제일 의지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기에 아버지도 싫고 그렇게 버려지는 존재인 자신은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친구도 자신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렇게 병처럼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악령은 이렇게 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쉽게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육체와 정신과 심지어 마음마저 점령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엔 마귀 들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쿠라이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보다 전능해져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부모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공부도, 힘도, 키도, 사랑하는 마음도 부모를 넘어서면 그 아이는 비로소 ‘겸손’의 길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부모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관계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넘어서서 전능한 존재가 되어보지 못하면 그 아이는 성장해서도 끊임없이 일단은 부모를 넘어서려 합니다. 한 번은 전능해져야 합니다. 그러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결국 악령의 힘까지 빌리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교만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악령에 휘둘리는 약한 존재로 머물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CCC, 460 참조).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느님처럼 되었다면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던 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령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마치 자신이 그렇게 고백해 주어서
예수님이 이득을 보는 것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덕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기에
더는 악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악령을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넘어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되려고 합니다.
자아의 욕심은 완전히 하느님처럼 되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전능해지라는 사탄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처럼 되었다고 믿지 못할 때,
사탄은 돈과 쾌락과 명예로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는 이에게는
그 유혹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만이 악령을 이기는 가르침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는 이는
그 모든 것이 주님 덕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로주 주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 가르침으로 사탄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처럼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를 영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코 1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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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2년 1월 11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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