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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정부] 깨끗하게 되어라
조회수 | 112
작성일 | 22.01.12
[수원] 깨끗하게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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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코 1장 40절) 하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코 1장 41절) 하셨다.
그러자 나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나병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그분은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티토서 1장 15절)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 있는 불결이 다른 사람에게 옮지 않으며,
외적인 불결이 내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나병은 사라져 버린다.
주님의 손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코 1장 40절)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나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또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천사들도 많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코 1장 44절)

주님께서는 나병환자를 사제에게 보내시어 사제직을 존중하셨고,
치유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셨다.
(마태오  8장 4절 / 마르코 1장 44절 / 루카 5장 14절)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이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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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1월 16일
505 7.6%
[수원] 순종보다 큰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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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도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군인의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평가하실 때도 같은 방식으로 하실 것입니다. 더 많이 선교하는 사람보다 순종하여 선교의 길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죽이는 것만큼 큰 선교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을 치유 받은 사람은 너무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이 알리고 퍼뜨렸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순종하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더 깊이 감동합니다.

요즘 순종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의 책을 정말 많은 분들이 읽어주십니다. 그러다보니 그 내용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시는 분들도 생겨납니다. 가장 큰 거부감을 일으키는 부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사람이 하느님이라 믿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기존 교리에 익숙하신 분들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지 하느님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인간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체로 영하고 그분과 한 몸이기 때문에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물 위를 걸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이 자신을 늑대라고 믿는 이상 인간처럼 두 발로 걸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가 믿는 본성 속에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유태인들이 큰 성과를 올리며 사는 이유는 자신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다가 있을 때 바다를 가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다 위를 걸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인간이란 믿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뗏목을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그런 식으론 베드로의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베드로 교회에 속하려면 먼저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어야합니다.

​하느님만이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소유하고 먹고 서로를 심판하였습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자신을 하느님처럼 만드는 이런저런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자아에 사로잡힙니다. 이미 하느님임을 믿어야 물 위를 걷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받은 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은 치유 받았지만 자신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가 마음까지 치유 받고 믿을 줄 알았다면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되어야 부족한 것이 없어지고 부족한 것이 없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보답하려 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신 것에 가장 합당한 보답이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무엇을 행해서가 아니라 순종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의 본성으로 올려주신 분께 보답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보다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 아타나시오의 말을 빌려 “그분은(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가르치며,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말을 빌려 “하느님의 외아들은 ...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항)라고 가르칩니다.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요한 10,35)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고 교리서가 가르치는데 내가 하느님이라 믿는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오히려 믿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교도권에서 “책을 이러저러하게 수정해라”, 혹은 “이 책을 더 이상 팔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럴 때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고치라면 고치고 책을 더 이상 인쇄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주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는 길임이 확실합니다. 순종보다 더 큰 복음적 가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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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1월 16일
  | 01.12
505 7.6%
[의정부] 예수님께…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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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주신 예수님께… 스승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당신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저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말상대가 되기는커녕 시선조차 주는 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제 팔자려니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날 당신을 만났습니다. 낫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한 청원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를 낫게 해주십시오.’ 라고 떼를 쓰고 싶었을 텐데.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향한 소박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외톨이로 당하면서 살아온 제가, 당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낯선 당신을 만나 드릴 수 있었던 말씀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랐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제 몸을 만져주셨지요. 저는 이미 그것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굳이 제 몸이 다시 깨끗해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제가 분명 살아있는 한 사람이라는 잊고 지내던 사실을 일깨워주셨기에 저는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온 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저를 향한 쌀쌀맞은 시선과 공동체의 냉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는지, 당신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을 만난 이후, 제가 새롭게 태어난 이후, 저는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저의 깨끗해진 몸을 보아야 할 제관이 아니라, 저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벗들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보잘것없는 이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 때문에 스승님께서 더욱 힘들어지셨다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했던 것 단 하나는 제가 받은 새 삶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었다는 사실만은 믿어주십시오.

어쩌면 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님 이야기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된 삶인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 못난이들, 부족한 이들을 철저히 내리누르는 현실이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스승님,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엄하신 말씀을 어기려는 생각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더 이상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언제 다시 스승님을 뵈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스승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심을 믿기에, 오늘도 당신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기쁘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언제나 함께하는 새로 난 그대에게…

그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용히 외딴 곳에 머물면서 이제까지 만난 이들을 떠올립니다. 물론 당신도 그 중에 하나이지요. 나는 그대들에게서 아름다운 생명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곱게 넣어주신 그 생명을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생명은 철저히 찢겨져 있었답니다. 찢는 이들, 찢기는 이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현실이지요. 찢는 이들은 고통을 못 느끼고, 찢기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기에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자신의 고귀함을 되찾기를 바랐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너무나도 절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대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 어느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그대와 나의 완전한 일치를 느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와 그대는 분명 그 순간 하나였습니다. 그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태어날 그 날을 향한 소중한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그대의 기쁨은 곧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기쁨이 퍼지고 퍼져온 세상을 가득 메울 날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내가 그대에게 왜 그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습니까.

행여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 그대와 내가 함께 나누었던 기쁨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이 지닌 깊은 뜻을 모르는 이들이 단지 겉으로만 변하려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생겨 나를 마치 현실적인 이익을 챙겨주는 이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나는 삶을 통해 내 자신을 서서히 드러낼 것이고, 시간이 흐른 후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편안함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날 일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지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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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2016년 1월 14일
  | 01.12
505 7.6%
모든 은총은 하나의 ‘시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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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이 받은 은총을 전하는 것이 더 주님께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퍼뜨립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분으로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총을 받는 것이 중요한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물론 은총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은총은 좋은 만큼 모두가 하나의 ‘시험’입니다.
세상에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시험을 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일류 대중 선동가이며 히틀러의 악행을 정당화하려 노력했던
‘악마의 재능’이라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기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입니다.

괴벨스가 모든 면에서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 않았고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소아마비로 오른발이 마비되어 여러 차례 수술하였지만 결국 평생 발을 절룩거려야 했습니다. 1차대전 때 독일군 입대를 신청했지만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가족의 굉장한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키는 163cm였습니다. 매우 작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열등감을 영웅을 찾아 극복하려 하였고 그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그가 히틀러를 만나기 전 쓴 소설이 있었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탓을 유대인에게 돌렸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반유대주의와 소설가적 재능을 보고 그를 자신의 목소리로 사용하였습니다. 나치 선전 책임자로 세워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영화와 팸플릿을 만들고 책을 쓰는가 하면 다른 책을 불태우고 독일인에게 유대인이 적이라고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그는 거짓말을 어떻게 대중들에게 세뇌할 수 있는지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영화산업을 장악하여 지독한 반유대주의를 담은 영화를 상영하고 언론을 통해 조장하였습니다. 역시 대중은 그의 거짓말을 듣다가 결국엔 믿게 됩니다.

1938년 기회가 옵니다. 유대인 망명자가 나치 외교관을 암살한 것입니다. 괴벨스는 이 사건을 유대인의 반란이라 날조하였고 열광적인 연설을 통해 잔혹한 복수를 요구했습니다. 무력을 동원하여 어느 날 밤 폭동을 일으켰는데, 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된 조직적 폭력이었습니다. 이날을 ‘깨진 유리의 밤’이라 부릅니다.

한 나라의 사람들을 일제히 선동하여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재능은 정말 천재적인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재능을 좋은 일이 아닌 히틀러를 위해 썼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히틀러를 위해 쓴 게 아닙니다.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쓴 것입니다. 히틀러도 외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깨진 유리의 밤’을 조장했던 괴벨스에게 화를 냈습니다.

괴벨스는 열등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속하려면 교회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나의 뜻을 바친다는 말입니다.
겸손해진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바탕이 된 안에서 은총이 와야 그 은총이 나를 망치지 않습니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2003)는 한 지방 방송국 앵커인 브루스가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브루스는 쫓겨난 직장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물론 잘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게 되는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였습니다. 잘 나가다 보니 지금까지 사귀던 여자는 그냥 소모품처럼 여겨집니다. 그렇게 바람을 피우다 헤어집니다. 세상 것을 다 얻었지만 한 여자의 마음은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얻어도 허전하기만 합니다.

한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것도, 교회에 머무는 것도 내 뜻을 봉헌하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준비 없이 받는 능력은 우리를 저절로 교만하게 만들어 누구도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공부할 때도 항상 ‘겸손과 사랑의 증가’에만 초점을 맞추어야지 저는 공부를 많이 해서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모든 은총은 교회에 순종해야 함을 잊을 때 은총이 아닌 저주로 변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 전체를 은총이 교회의 선익을 위해 쓰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러며 제13장에서는 은사 중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순종하는 겸손과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청해야 할 전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위해 이 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루터는 이 은총을 교회를 벗어나는 것을 위해 씁니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은총을 구합시다.
그러나 은총이 나에게 시험이 되지 않으려면 교회를 사랑합시다.
교회에 유익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합시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은 그 은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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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2년 1월 13일
  | 01.13
505 7.6%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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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코 1장 40절-45절)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보아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보아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들어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들어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말해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받아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받아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안아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안아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일으켜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일으켜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나에게 함께해달라고 하면
모든 것 잠시 멈추고 기꺼이 함께해주는 겁니다
그때 그곳 그 사람에게는 바로 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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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2022년 1월 13일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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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   [서울/인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5] 601
1394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6] 2157
1393   [수도회] 말씀을 지켜라  [4] 1010
1392   [부산/전주/청주] 들음  [2] 1021
1391   [수원]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1] 3
1390   [인천/서울] `말씀` 대로 살라  [3] 1321
1389   (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4] 2079
1388   [수도회] 알아보기  [6] 354
1387   [부산/청주] 그러나 우문(愚問)은 없다.  [2] 427
1386   [수원] 부지불식간  [2] 13
1385   [인천/서울] 주님을 아십니까?  [4] 306
1384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6] 1941
1383   [수도회] 3V이신···  [6] 455
1382   [청주/부산/전주] 흔들림 없는 믿음  [4] 7
1381   [수원] 침묵  [2] 557
1380   [인천/서울] 지금 당장 바꾸세요  [5] 439
1379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6] 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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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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