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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수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조회수 | 43
작성일 | 22.01.17
[의정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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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비록 세상의 겉모습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세상이 지닌 의미, 세상이 구현해야 할 가치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로움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은 그 자리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이 없어 무시당하는 사람들, 불의에 억압받는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존엄하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정녕 희망 가득한 기쁜 소식이었지만, 부와 권력을 생명처럼 받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인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어부들을 당신의 첫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이전에 어느 누구의 눈길조차 받지 못했던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학식 있는 고상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그들이 온전히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과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던 회개하는 죄인들은 환호했지만, 이들을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의롭다 자처하던 사람들은 분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벌을 받는다고 여겨졌던 병든 이들을 어루만져주시고 이들의 몸과 마음이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주위의 차가운 시선에 움츠려 있던 환자들은 새롭게 살맛을 되찾았지만, 이들에게 손가락질했던 겉만 성한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일을 하셨습니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에 춤을 추었지만, 안식일 법 규정을 고집하며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던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움을 느끼고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높은 곳에 오르려 다른 이들을 짓밟던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았기에 오히려 세상 이치를 모른다는 비웃음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환한 웃음을 지었지만, 오직 자신의 삶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던 사람들은 머리를 떨구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기도하는 집인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던 이들을 채찍을 들어 흩으셨습니다. 타락한 종교적 관행에 짓눌려 신음하던 사람들이 하느님께 다시금 기쁨의 찬양을 드리게 되었지만, 하느님을 빌미삼아 제 배를 채우던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예수님을 죽이려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세상에로 모든 이를 초대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당신과 함께 새로운 세상에 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속되고 추한 삶의 방식을 내던지고 새로 태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함, 사랑, 진리, 정의, 헌신, 평화를 입고 나날이 새로 태어날 때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신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지나온 나날처럼 거짓과 불의를 일삼고 부와 권력을 탐닉한다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삶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는 불경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2000년 전이 아닌,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던지는 사랑 가득하면서도 엄중한 충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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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2016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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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는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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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양은 학창시절 “혜경아 공부해라.” “TV 좀 그만 보면 안 되니?” “학교 갈 시간이야.” 등등의 어머니의 잔소리가 매우 싫었습니다. 회사 다닐 때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어머니께서 무엇인가 물어보시면 나중에 얘기하자며 방문을 닫고 잠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건강하시던 어머니께서 갑상선 암으로 성대 제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듣기 싫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께 했던 행동들이 머릿속으로 하나둘 스쳐 지나갈 때마다 후회가 됐습니다.

그 후로 혜경양의 행동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입 모양을 보면서 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재활의학 박사로부터 희망이 담긴 말을 들었습니다. 기계를 이용하면 성대를 대신해서 그 부분을 울려주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혜경아, 일 끝나고 온 거니?”

비록 기계의 울림소리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로 목이 메었습니다. 혜경양은 어머니 목소리의 가치를 알고부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받는 은총의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로 증명됩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는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보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준히 청하라고 하시며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보물인 성령의 가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성령의 은총이고 새 부대는 그 은총의 가치를 아는 마음입니다.

같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그것으로 감동하여 인생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새 부대는 성령 받고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의 가치는 얼마로 평가하며 살아갑니까? 사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하느님의 목숨 값’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은 ‘성사’, 특별히 ‘세례’를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때는 그냥 단순하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구약에서 세례의 가장 큰 상징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紅海)’를 건너는 사건입니다(1코린 10,2 참조).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고해성사를 할 때, 성체를 영할 때도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러나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대가임을 알 때에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 죄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셔도 됩니다. 제 책에 대한 가장 큰 비판 중의 하나가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가 있느냐?’, 혹은 ‘어떻게 어떤 때는 아버지가 하느님이시만, 어떤 때는 아드님만 하느님이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부-성자-성령, 세 분이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삼신론이라는 삼위일체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생각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이 의문에 대한 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의견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하느님의 피’라면 당연히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는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선물은 성령이시고, 성령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주시는 하느님은 죽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삼위일체신비는 그 사람에게 뜬구름잡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가치를 모르게 되어 성령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음식에서 부모의 피를 발견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감사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이 부모의 살과 피임을 믿을 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씁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의 은총, 혹은 성사의 은총이 하느님의 목숨 값임을 알아야 성사생활을 통해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자 목숨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성령’은 ‘죄의 용서’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피’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은 숫자 ‘50’으로 상징이 일치합니다. 교회에 성령께서 오신 날이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이란 숫자상 오(五: 5)와 순(旬: 10)이 곱하여진 날로 ‘50’을 상징하는 날입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느님께서 죄로 가득한 소돔 땅을 유황불로 멸하시려 하실 때 아브라함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조카 롯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소돔 땅에서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6)라고 하십니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집니다(에페 1,7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의 피는 ‘50’과 연관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사람들을 ‘50’명씩 앉히신 것도 당신의 살과 피가 ‘50’과 관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루카 9,14 참조). 그리스도의 피가 곧 그리스도의 성령이기 때문에 오십 일을 나타내는 오순절에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오시는 성령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또한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시며,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항)

두 번째로 성령이 하느님의 피, 즉 하느님의 생명인 이유는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성령을 받는 이에게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과 존재가 들어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실 때, 성자께서 그 성령을 통하여 당신 온 존재를 성모님께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성령 안에 하느님의 온 존재가 담기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넣어서 내어주시는 성체와 성혈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 안에는 하느님의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도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게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죄에서 치유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 생명이다. 이 은총은 세례로써 받는 성화 은총(聖化恩寵, gratia santificans) 또는 신화 은총(神化恩寵, gratia deificans)이다. 이 은총은 우리 안에서 성화 활동의 샘이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999항)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이 될 수 있다면 그 성령 안에 당신 온 신적 본성을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내어주시면 살아계실 수 없고, 신성을 내어주시면 계속 하느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피자조각처럼 성령을 나누어주신다고 생각하니 성령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온 존재를 성령을 통해 내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성체성혈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 값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하느님의 피이신 이유는 ‘계약’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계약은 쌍방 간의 필요에 의해 맺어집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모르는 두 사람이 땅을 사고팔기 위해 계약을 맺으면 새로운 관계가 맺어집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돈을 주고 땅을 주어야 하는 쌍방의 의무를 다할 때에만 유효합니다. 만약 이 두 관계가 영원하려면 영원히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관계가 되면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영원하려면 끊임없이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성혈이 든 성작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예수님의 성만찬 때 하신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미사는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가 맺은 혼인 계약을 잊지 않기 위해 계약서의 조항을 되새기는 시간과 같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이 낀 결혼반지를 보며 부부의 의무를 되새기는 시간과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서 피 같은 돈을 벌어와 아내에게 주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당신 피를 흘려 신랑으로서의 계약조항을 준수하십니다. 신부가 필요한 것은 신랑의 피입니다. 그러면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과의 계약을 유지합니다. 계약이 유지되어야 관계가 유지됩니다. 이웃을 미워하면 성령으로 맺어진 그리스도와의 계약이 끊어지기에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 3,6)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계약, 곧 성령으로 맺는 계약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유다인과 이방인 가운데에서 부르신 백성을 혈육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으시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781항)

모든 관계는 계약이고 계약 안에는 내어줌이 있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관계 안에는 이렇듯 오고가는 선물이 존재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오고가는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라 생명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며 숨을 거두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내어줌은 이렇듯 죽음을 전제합니다. 하느님은 살려고 해서 영원히 사시는 분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기 위해 죽으려고 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을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으시는 분이시고 죽으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없다고 말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사람이 죽으신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죽으신 것일까요? 사람만 죽고 하느님은 사셨다고 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어머니인가요? 인성과 신성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인간 예수의 어머니가 되신다면 동시에 하느님의 어머니도 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시라면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인간 예수가 죽으신 것이기도 하고 하느님 예수가 죽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 예수는 죽었지만 하느님 예수는 죽지 않으시었다고 말하면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을 구분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을 통해 당신 신부인 교회가 탄생하도록 분명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 오는 성사는 분명 그분의 목숨 값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면 하느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위해 죽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안에 하느님의 온 존재와 신성이 들어가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 되십니다. 물론 이 죽음은 인간처럼 죽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 죽음은 분명 죽음이지만 부활이 연계된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곧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시면서 부활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아버지도 성령을 주시며 아드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께 다시 돌려보내실 것을 아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렇게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선물로 내어주시며 다시 받는 계약의 관계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래야 삼위일체론적 이단에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삼위일체 이단은 양태론(樣態論)이나 삼신론(三神論)입니다.

양태론은 성부-성자-성령께서 본래 한 분이신데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가면만 바꿔가며 나타나신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면 이렇게 양태론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 완전하게 구분이 되는 세 인격체이십니다. 한 분 안에서는 관계의 역동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 분 하느님은 각자 자유와 인격을 지닌 분들이시고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본성이 사랑이 되십니다. 내어주고 받음 없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태론을 극복하기 위해 관계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느님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제각각이시고 각자 신성을 지니신 다른 신이라는 삼신론에 빠집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시지만 동시에 한 분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성인 ‘신성(神聖)’은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성은 나눠질 수 없어서 마치 피자처럼 세 분 하느님께서 쪼개어 동시에 가지실 수 없습니다. 또 신성을 각자가 동시에 가지게 되면 동시에 세 분의 신이 생기게 되어 삼신론이 됩니다. 세 분 하느님이 동시에 신성을 가지셔야 한다고 여기면 신성에 셋이 되어서 삼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인 신성을 옮겨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무시하면 삼위일체는 이단에 빠집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이 지니신 신성을 서로 주고받으시며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세 분이 하나가 되심을 세상에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이것을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셔서는 안 됩니다. 그 전까지는 신성을 아버지께서 지니시고 계셨음을 보여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을 아버지께 돌려드리신 다음에는 무덤에 묻혀 죽어계셔야지 하느님으로서 다시 나와서 활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미 성령을 아버지 손에 맡겨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침묵하고 계셔야 세상에 하느님이 한 분뿐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염두에 두어두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정확히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주고받으시는 역동성을 고려해야 양태론이나 삼신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아버지가 하느님으로 계실 때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는 성령 하느님만이 신성을 지니신 것처럼 보이고 또 그 신성을 품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으로서 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역동성 안에서 세 분 하느님이 한 분 하느님으로 언제나 영원하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바람개비에 두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에는 붉은 점을 찍고 다른 하나는 텅 빈 채로 그대로 둡니다.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성령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게 합니다. 그렇게 붉은 점이 찍힌 날개는 바람의 힘에 의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날개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면 붉은 점이 있던 날개 위치는 이제 텅 빈 날개가 위치하게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지니신 신성이 아드님께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면 결국 그 주고받음을 통해 붉은 점은 하나의 큰 원을 만들게 됩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힘을 통해 아드님께로 향하고 아드님은 성령을 통해 당신을 아버지께 보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드님 안에 들어오시고 아드님도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에서 바라보면 끊임없이 신성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과정이 존재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면 이렇듯 하느님 안에서는 세 분이 항상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서로를 위한 내어줌의 역동성을 무시하면 하느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없애시기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죽고 부활하심을 반복하실 수밖에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실 필요가 없으셔도 삼위일체 사랑을 유지하시기 위해 영원히 죽으셔야 하고 영원히 부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선물 자체’이신 분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성령의 존엄성을 깎아내립니다. 그 방법은 성령께서 마치 하느님께서 가지신 소유물 중의 하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모독을 당하십니다.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성령님이 하느님의 생명이며 하느님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가 되시는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를 위해 죽지 않으신다면 사랑의 내어주는 본성을 깎아 내리게 됩니다.

또한 성령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비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 서로 자기합리화를 하다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교회에 성령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러셨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사이에서도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셔야 하는 것은 더 당연한 일입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성령도 생명이십니다. 성령은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십니다. 하느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시면서까지 생명의 은총을 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으실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성령의 가치를 떨어뜨려 그 선물을 모독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께서 그 사람을 절대 변화시킬 수 없으십니다. 선물의 가치를 알아야 받는 이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이 목숨을 내어주시며 주신 은총이 성령이고 정말 하느님의 피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믿어야 성령을 모독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성령을 주시기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 고해, 성체 성사 모두가 바로 그분 죽음의 값입니다. 인간을 위해 죽으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면 삼위일체 하느님 내에서도 이 신비가 일어남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니 저는 하느님께서 상대를 위해 당신 생명과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죽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해하자면 세 분이 동시에 신성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서로 내어주고 받음을 통해 순차적으로 하느님의 지위를 유지하신다고 감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이 사랑의 역동성의 진리를 무시하면 진짜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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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1월 20일
  | 01.17
505 7.6%
[수원]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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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은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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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1월 20일
  | 01.17
505 7.6%
헌 부대 새 부대 되는 법 : 새 포도주를 견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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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게 될 터인데 당신을 빼앗길 때라고 하시며,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잔치하는 중이라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며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지 못하고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새 천 조각이고 새 포도주라고 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새 옷이며 새 부대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신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우리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방식은 누군가를 자신 안에 담음으로써입니다. 누군가를 자신 안에 담는다는 말은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감사하며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부모를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이 낡은 부대로 있어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낡은 부대로 머무르는 합리화가 바로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입니다. 그 부모를 품고 있으며 자신이 낡은 부대로 변화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가 품고 있는 것은 상처받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자아가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를 품게 만들며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부모 탓이라고 여기게 합니다. 우리 뇌는 부정이 없습니다. 무조건 긍정입니다. 부모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해도 부모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 씨에게 고야라는 한 남성이 찾아왔습니다. 연년생 형 때문입니다.

처음에 둘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공공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폭군으로 사소한 일에도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오면 폭력이 더 심해졌고 밥상을 엎거나 밥공기를 집어 던지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말 날마다 지옥 같았어요. 그래도 형과 저는 항상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어요. 언젠가 아버지에게 복수하자면서요. 그런데 대학생이 된 형도 주정뱅이가 된 거예요. 형의 술 취한 모습이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형을 보는 것이 힘들어졌고 그렇게 형과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어요.

형은 술만 마시면 친구들에게 아버지 욕을 하였는데, 아버지와 똑같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주먹을 휘둘러 싸움이 일어납니다. 얼마 전에는 술에 취한 형이 앞니가 부러진 채로 피를 흘리면서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저는 형에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지는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또 싸움이 일어나요. 어느 날 형이 토해내듯이 한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뭔가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어쩔 수 없다’라는 거였어요.”

“그럼 동생도 술을 마십니까?”

“아뇨, 저는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아요. 결혼해서 원만하게 잘살고 있지요. 그러나 형은 술 때문에 여성과 헤어졌어요.”

형도 분명 아버지처럼 되기를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되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의 모습과 반대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정에서 자라서 그렇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고 자신에게 상처 준 아버지는 그렇게 사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이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 부대로 있고 싶으니 헌 술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헌 옷이 되고 싶으니 헌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어떻게 아버지와 반대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나오지는 않지만 자신 안에 새 포도주를 담은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욕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욕구는 그 욕구를 가진 사람과 함께 자신 안으로 들어옵니다. 욕구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에게는 생존 욕구만 넣어져 있었습니다. 나머지 사랑과 관련된 모든 욕구는 내가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면서,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지만, 우선은 그분은 감당할 수 없기에 포도주를 조금씩 내가 견딜 수 있는 더 새로운 포도주로 넣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부대도 더 튼튼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내가 변화하는 방식입니다.

마레히사 씨에게 남편의 속마음을 듣고 싶다며 남편과 함께 상담실을 찾은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은 이구치 순스케로 29세의 공인회계사였습니다. 이구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침착하고 냉정해 보이는데, 조금만 기분이 언짢아지면 난폭하게 돌변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혼하고 싶은데 이혼 말을 꺼내면 손찌검당할까 봐 겁내고 있었습니다.

이구치는 앉자마자 한마디도 안 하고 마레히사 씨를 노려보았습니다. 마레히사 씨는 “혹시 아내가 왜 당신을 여기에 데려왔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계속 노려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아내는 남편분과 이혼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구치는 의외로 냉정하게 “그렇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왜 이혼을 원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알아요, 안다고요! 내 태도. 공격적이잖아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무시당하면서 자라왔어요. 부모에게서 사랑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요. 항상 방임 상태에서 자랐어요. 부모가 나에게 한 말이라고는 ‘멍청이’, ‘저리 가!’ 이런 말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사람을 보면 경계하고 공격하게 된 거고요.”

“그럼 개선하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개선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돼요. 나는 애초에 실패작이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구치는 아내의 이혼 생각을 이미 예상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아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약간 덜 새로운 포도주를 먼저 담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성장합니다. 이런 때 상담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잠깐 만나는 덜 새로운 포도주. 마레히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이구치 씨, 사실은 당신도 자신이 바뀌길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온 거고요.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인회계사는 되지 못할 겁니다. 공인회계사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공인회계사를 꿈꾸는 사람이 많다는 뜻은 그만큼 그 직업을 갖게 힘들다는 의미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공인회계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일도 잘하고 있으니까 당신에게는 훌륭한 능력이 있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요?”

“당신은 실패작이 아닙니다.”

마레히사는 이구치에게 존재의 신비함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태어나기도 힘들고 그래도 그 무한 경쟁을 뚫고 태어나 이 나이까지 잘 자란 신비. 그래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이 돌아간 뒤 아내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어요. 저는 남편이 선생님에게 폭력을 쓰지는 않을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줬어요. 지금까지 남편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남편이 상담 후 ‘오늘 상담 나쁘지 않았어’라고 말한 거예요. 무엇이 바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계속 이 상담사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를 견뎌내면 이제 다른 사람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아내를 견뎌내면 거의 부모의 상처로부터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견뎌내는 것이 힘이 들면 다시 부모를 되돌려 넣어놓고 자신이 변하지 못하는 합리화를 할 것입니다.

변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그 의지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 의지만 있다면 사랑이 점점 많이 필요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려 노력하면 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내 안에 담기고 그 사람을 참아내면 내가 변화됩니다. 변화는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새 부대가 되려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과거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새 부대가 되었는데 헌 포도주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는 사라집니다.

상처에 집중하지 말고 변화에 집중해야 합니다. 변하고 성장하면 상처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고 그 사랑의 완성은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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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2년 1월 17일
  |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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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6]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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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부산/전주/청주] 들음  [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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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4] 2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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