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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조회수 | 122
작성일 | 22.09.27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 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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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2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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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칼과 같아 쓰는 법에 따라 의사도 되고 강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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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ㅡ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피해자의 고통과 그것에 비해 약한 처벌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 가서는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마가 되어가는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보복하면 딸이 살아날까요? 그리고 그 보복은 그 사람 전체에 대해 행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식의 분노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어 나중엔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죄 안 지었냐?” 부모가 화가 많으면 자녀도 화가 많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방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금자 씨에 안 좋은 감정을 품고 다가온 목사님에게 금자 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적할 때 “그러면 너는?”이라고 자동으로 질문합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는 절대 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분노를 터뜨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명확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메스를 들었다고 다 의사가 아닙니다. 마구 휘두르면 강도이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화를 내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분노와 다릅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할 때,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들을 고치려는 의사의 분노였습니다. 성전 전체가 아닌 성전을 더럽히는 탐욕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전체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안의 사탄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그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의사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 수술을 받아들이면 고쳐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사의 분노를 터뜨리는지 강도의 분노를 터뜨리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에게 성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탄에게는 화를 내도 됩니다.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화를 내도 되고 죄에 대해서도 화를 내도 됩니다. 예수님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전체에 대해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넘겨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분노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자에게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그렇게까지 이끈 사탄에게 분노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트레이 알렉산더 랠포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어서요.내가 도와주고 싶습니다. 선량한 시민으로 자라도록 아들을 도운 것처럼요. 살라후딘이 여기 있었다면, 살아 있었다면,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아들의 방식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 아들을 해쳤다고 해서요. 나는 악마에게 화가 납니다. 악마를 탓합니다. 당신을 잘못 이끌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인도했으니까요 .당신 탓이 아닙니다.당신에게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걸 꼭 알아주세요.”

우리가 화를 터뜨릴 대상은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사탄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도시와 같아서 사람 전체에 분노하면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하느님은 그 안에 살던 롯의 가족은 빼내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좋은 것도 분명 들어있는 사람 전체에 분노하지 맙시다. 그러면 의사가 아닌 강도로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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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2년 9월 27일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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