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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수원/원주] 고통을 극복하는 힘
조회수 | 132
작성일 | 22.11.23
[의정부] 고통을 극복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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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신앙상담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도 인생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특히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분들일수록 신앙의 위기를 더 크게 느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인생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때론 열심히 살지 않는 이들이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같아 우리를 더욱 속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제가 늘 하는 권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보호자를 얻게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갑자기 원하는 대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뀌어야 할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뀌고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각이 바뀌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의 인생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인생의 어려움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신앙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신앙이 이런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신뢰와 예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실 만큼 우리 각자가 그분께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이는 단순히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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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재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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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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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나는 표징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에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2-13절)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황제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죽음은 영혼에도 육신에도 올 수 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0-31)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굳은 신앙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 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고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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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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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분열과 박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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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친구와 친척들까지도 갈라지게 되어 잡아 넘기고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으로서는 불미스러운 일을 신앙 때문에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가? 이상한 노릇이다. 인간의 정으로 볼 때에는 서로 우애 있게 사랑의 정을 가지고 지내야 하고 하느님께서도 부모의 뜻을 따르고 효도하라 하셨는데, 다른 일로면 몰라도 믿음 때문에 부모와 집안 식구들이 서로 갈라져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러 갔을 때, 시메온 노인이 예수 아기를 받아 들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난 다음 말하기를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2-35)고 예언한 말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믿음을 가질 것이냐 배척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만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믿음은 하나의 지식과 교양으로서 알고 지내면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바쳐 실생활을 통하여 삶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믿음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과 배척의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떨어지는 곳마다 박해와 분열을 일으켜 왔던 것이고, 그것은 부모 자녀 간에도 생겨났던 일인 것이다.

이 분열, 박해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글자 그대로의 모습도 나타났지만, 자기 자신 안에 끝없는 갈등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연약한 인간은 그렇지 못하고, 옛날의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신앙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내적 갈등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모든 갈등은 그것을 이기고 난 다음에는 진정한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는 은총으로 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고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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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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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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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전문의 김해남 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학생 실습을 할 때 소아과에 네 살 된 사내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가 들어왔고 그 뒤로 어른들 대여섯 명이 함께 따라 들어왔습니다.

아이가 네 돌이 다 지나도록 기본적인 단어 몇 개 외에는 통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 원인이 어른들에게 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아이는 5대 독자였고 그 집엔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 둘이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워낙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어른들은 24시간 그 아이 곁에서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거의 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울기 전에 모든 것이 다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욕구가 다 충족되면 아이에겐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표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 우는 것은 편안한 곳에서 나와 원하지 않는 환경에 접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울음은 첫 번째 욕구불만의 표출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이의 허파가 작동하게 되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분명 상처가 되지만 그 상처가 아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아이는 각기 다른 울음으로 자신의 욕구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러면 욕구가 타인에 의해 충족됨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타인과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표현을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됨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고 나서는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을 통해‘나’라는 자아인식이 생겨나고 타인과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하나로 여기게 되어 자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과 내가 구별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표현하기 위한 더 고급수단인 언어의 사용이 전제됩니다. 언어의 구사와 사고체계의 형성을 통해 아이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바로 자아의 명확한 인식입니다. 이때를 사춘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욕구불만 때문에 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사고체계도 형성되었는데 더 큰 욕구불만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아가 욕구불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보자면 자아는 뱀이고 하느님께서 하와가 뱀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뱀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아의 욕구를 상징합니다. 이 자아와 접촉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자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유라기보다는 자아의 욕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자아로부터의 벗어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 안에 양심이란 것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양심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자아의 욕구와 반대됩니다.

인간은 자아와 접촉하며 이제 본격적인 선택의 자유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그 자유를 주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 맺기를 원하셨다면 사람을 못 나가게 집에다 가둬놓고 사귀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자아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욕구불만과 상처를 통해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습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부터 해 나가야하는 일은 다시 어린이와 같이 자아 없이 하느님과 내가,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되는 단계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뱀을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힘겹게 만난 자아를 통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앞으로 있을 박해를 예언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자신을 믿지 말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면 지금까지 자신을 더 믿게 만들었던 상처가 치유되어야합니다. 상처가 더 자아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상처를 받게 하셨음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덜 믿기 위해서는 어린이처럼 내 자신의 신뢰를 다시 누군가에게 온전히 두어야하는데 신앙인들에겐 그분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그 자리를 성령께서 차지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우리 자신을 다시 상처가 없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만들면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완전한 준비가 된 상태가 됩니다.

모든 상처는 흉터를 남깁니다. 그러나 그 흉터는 다 필요가 있어서 생긴 것입니다. 김혜남 씨의 딸아이도 심장수술 자국이 가슴에 길게 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흉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불만족과 상처를 통해 자신 속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김혜남 씨는 딸 아이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흉터는 바로 네가 큰 병을 이겨냈다는 징표란다. 어린 나이에 그 큰 수술을 견뎌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난 네 흉터가 오히려 자랑스럽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자랑스러워하실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만나게 하신 자아를 우리가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말을 들어도 되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에 대해 아파하는 것보다 상처가 더 큰 축복의 준비단계였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치유되었다면 앞으로 받을 상처도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상처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서 상처와 치유를 통해 당신께로 이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끊임없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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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18년 11월 28일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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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는 반대 받는 표적인 우리를 이 세상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끝까지 참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참아나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을 참아내는 힘은 무엇일까요? 제가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니 대학에 다니며 저와 같은 동년배들이 TV에서 잘나가는 것을 볼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도 돈을 벌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돈 500원이 없어서 학교 구내식당에서 파는 점심을 굶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휘재 씨 같은 경우는 “그래, 결심했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말도 안 되게 웃기고 또 말도 안 되게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처지로서 어떤 벽을 느꼈습니다. 언젠가 노력하면 무엇이든 다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런 사람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짓눌렀습니다. 이러한 절망감이 저를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서는 희망할수록 희망의 힘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56회에 일찍 성공을 거둔 후 실패를 맛보고 오랫동안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온 태사자 김형준 씨가 나왔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어느 정도 실패하기에 우리가 실패했을 때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형준 씨는 공부를 매우 잘해서 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획사에서 큰 계약금을 준다고 하며 김형준 씨를 불렀습니다. 그에게 돈과 인기는 매우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금을 부모님께 돌려주지 않고 친구들과 돈을 쓰러 다녔습니다. 기획사에서 받을 계약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학기 학점 2가 안 되어 학사경고를 받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명해지면 되니까. 하지만 계약 자체가 자신에게는 거의 배분되지 않는 계약이었습니다.

인기는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매달 80만 원씩 받아서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 안 좋아진 것은 태사자까지 해체하게 된 것입니다. 김형준 씨는 사람들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으며 나이가 46세가 될 때까지 자발적 외톨이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자기 모습을 알고 있던 이들로부터 전화 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 우울한 나머지 뭐라도 해야 하겠기에 택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일찍 성공했지만 오랜 시간 살아갈 힘을 잃었던 김형준 씨가 다시 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는 또 다른 희망이 생겼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쳐가던 대학시절 힘을 얻게 해 준 것은 종교였습니다. 저는 그때 잘나가던 저의 또래들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만약 내가 천국 가고 저들이 지옥 간다면?’이라는 몹쓸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은 저에게 다시 살 힘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해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희망할 때는 오히려 희망의 힘을 잃습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야 힘을 얻습니다. 땅에 묻히면 힘을 잃습니다.

희망도 총량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를 희망하면 하나는 덜 희망하게 됩니다.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을 때 나비는 더는 나뭇잎을 희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꽃을 희망합니다. 그래서 나뭇잎이 없어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내가 희망하는 대상이 있는 곳에 나도 살게 됩니다. 천국을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천국에 가면 우리는 우리가 잃었다고 착각한 것까지 다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죽음 뒤의 세상을 희망하라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희망하며 희망을 잃고 사는 삶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기도 아주 쉬워집니다.

지옥문 앞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이는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희망하면 희망을 잃습니다. 항상 나와 비교되고 내가 범접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희망은 절망의 씨앗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을 희망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힘들어지고 행복 지수가 떨어집니다. 심지어 자살률이 1위입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라고 하는 이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힘들게 살도록 만드는 이들입니다.

희망은 하늘의 것입니다. 그 희망이 이 지상의 것에 쓰인다면 힘을 잃습니다. 마치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경유 차에 휘발유를 넣어도 괜찮을까요? 다 망가집니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빼내고 다시 경유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희망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상의 것을 희망하면 고장이 납니다. 연료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바뀌어야 합니다.

단편영화 ‘슬픈 남자’(The Sad Man)가 있습니다. 그는 늘 혼자입니다. 혼자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줍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남자의 가면을 벗기자 남자는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아이를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또 우울해합니다. 아니 그것을 행복이라 여깁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려면 좋아하는 것을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그 좋아하는 것에 맞게 나도 바뀝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계속 나뭇잎이 없다고 우울해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희망하는 것에서 천국의 것을 희망하는 것으로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그 즉시 다시 삶의 에너지가 솟습니다. 본래 희망은 하늘의 것이고 하늘의 것을 희망할 때 작동합니다. 꿀은 애벌레에게 어떤 에너지도 주지 못합니다. 먼저 나비가 되어야 꿀이 에너지가 되듯, 천국을 희망해야 희망이 나에게 에너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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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2년 11월 23일
  | 11.23
521 76.4%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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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 저자는 세상 징벌에 대해 일곱 천사들이 차례로 나팔을 불어 알려줍니다. 얼핏 보면 탈출기에서 열 가지 재앙들을 상기시키게 해줍니다. 물론 그 내용이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탈출기의 재앙과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묵시록 저자는 일곱 번째 천사가 마지막 재앙을 알려주는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난 사실을 설명을 합니다.

이제는 유리 바다 위에는 신앙의 시련을 견디어 낸 이들이 서서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묵시록 15,3)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이고 주님의 의로우신 처사가 드러나게 됩니다.

시련과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또한 박해와 미움을 겪지 않는 신앙이 또한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때문에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뿐 아니라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 갈 것이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 친구들까지도 자신을 넘겨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비록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통스러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이 세상이 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이 세상 논리에 맞지 않을 때가많겠지요.

세상은 어떻게 보면 재물 중심으로 아니면 기회 중심으로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해관계를 따지고 손해를 보거나 해를 입으면 내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논리에서 보면 신앙인들은 어리석거나 약삭 빠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보이는 아니겠어요?

거기다가 ‘자기 희생’은 말도 되지 않는 논리가 되겠지요. 신앙들은 미움보다는 업신여기는 것을 당하거나 바보 숙맥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 많은 성인 성녀들, 서양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신앙으로 옯겨 붙은 삶을 살았던 한국의 신앙의 선조들, 순교자들을 보면 주님께서 오늘 말씀대로 ‘나를 위해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이든, 종말론적인 무서운 징표, 형틀과 칼날의 두려움에서도 신앙인이 희망과 위로를 받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오늘 문득, 어린 시절부터 친숙하게 들었던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신앙인은 비록 세상에서 어지러움, 두려움과 고통을 살더라도 흔들림 없이 성실한 오늘의 삶을사는 사람들이지요.

우리 각자의 죽음 세상의 종말의 새기며 위령성월의 멋진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순간 하는 일,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를 헤아리는 깨우침이 있으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까요!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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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22년 11월 23일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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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수도회] 구원의 빛  [4] 468
1593   [부산/전주/광주/청주] 돌아봄의 눈은  [4] 570
1592   [수원/원주/대전]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3] 69
1591   [인천/서울]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  [5] 502
1590   (백)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독서와 복음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  [8] 2253
1589   [수도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66
1588   [광주/부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1] 542
1587   [수원]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62
1586   [인천/서울]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2] 680
1585   (자) 대림 12월 24일 독서와 복음 (즈카르야의 노래)  [8] 2205
1584   [수도회]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  [3] 543
1583   [청주/전주/광주/부산] 아기의 이름은 요한  [4] 680
1582   [의정부/대전/수원] 그리스도인의 현실  [3] 60
1581   [서울/인천] 이제 곧 성탄입니다  [4] 640
1580   (자) 대림 12월 23일 독서와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지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  [6] 2495
1579   [수도회]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8] 116
1578   [광주/전주/부산/청주] 마리아의 노래가 현대 여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4] 120
1577   [수원/의정부/대전]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3] 78
1576   [인천/서울] ‘성모찬송’(Magnificat : 찬미하다. 찬양하다)  [5] 118
1575   (자) 대림 12월 22일 독서와 복음 (마니피캇 ; 성모님의 노래)  [8]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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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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