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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의정부]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조회수 | 1,709
작성일 | 08.11.26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가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가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가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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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전례는 이제 한 해를 마무리 지으면서, 세상의 종말을 계속 이야기하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 기도하고, 그리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간절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번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반성하게 하고, 참회하도록 해서,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도 우리의 좋지 못한 행실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옷을 입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 21장 이하의 내용을 통해서, 다가올 세상 종말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에 감탄해 하니깐, 예수께서는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전이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기원 후 70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포위공격으로 110만 명이 죽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예루살렘은 철저히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흔히 예루살렘하면은, 聖都 즉 거룩한 도시,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등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고, 그래서 이곳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는, 하느님의 궤를 성전 안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독하는 듯 한 표현을 쓰셨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지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지 않다 보니, 당시 예루살렘이 온갖 부패와 불의의 온상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하느님의 도시라 하더라도, 참회하지 않는 삶,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경우,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시라면 다른데 보다도 오히려 더욱더 모범을 보여서 봉사하며 하느님다운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들이 기득권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 죄는 오히려 더 크다는 것,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을 때,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을 때, 그들을 꾸짖으신다는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자는 하느님을 믿는 자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다워야 하고, 수도자는 수도자다워야 하고, 평신도는 평신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워야’ 한다는 말은, 권리도 당연히 주장해야겠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책임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그럴 때 ‘답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요즈음,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고,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간직한 바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

▮ 부산교구 전동기 유스티노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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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나를 허무는 것들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무서운 적인지도 모르고 함께 삽니다. 정말 무서운 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독소가 온 몸에 퍼져서 죽음에 임박해서야 알게 됩니다.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적이 아닙니다. 설사 적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겉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지만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견고함에 도취되어 안으로부터의 허물어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성전이 안타까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눈물 흘리면서 한탄합니다.(루가 19,41)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폐망이 훤히 보입니다.AD66년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닙니다. 내부로부터 이미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을 로마제국이 발로 찼을 뿐입니다. 독선과 오만으로 하늘을 외면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욕망과 아집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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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달콤한 속삭임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광고는 이것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좋은 환경의 아파트, 성능 좋은 자동차,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고 젊음을 유지해 주는 화장품, 맛좋고 건강을 보장해 주는 음식, 각종 가전제품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다양한 금융상품과 보험, 좋은 성적을 보장하는 교육방법 등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이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런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것들이 진정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까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많겠지만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작품인 아름다운 건물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라고 자처하며 다가오는 각종 우상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슬기롭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이재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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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리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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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 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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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8년 11월 27일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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