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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수원/서울]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입니다
조회수 | 1,701
작성일 | 08.11.26
저는 요즘에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사제관 안에서 처박혀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 미사 때 신자들에게 “요즘 춥지 않지요?”라는 말을 했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지요.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니 추운지 안 추운지를 잘 몰랐던 것이지요. 아무튼 제가 왜 사제관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을까요? 사실 이틀 동안 소설책을 3권이나 볼 정도로 책 읽는 것에 푹 빠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소설책의 마지막을 보고서는 아쉬움과 함께 또 다른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책의 마지막에는 의미심장한 말이 이렇게 적혀 있었거든요.

“4권에서 계속됩니다.”

알 수 없는 4권의 내용. 그 내용이 과연 어떨지를 상상하면서 큰 기대감과 더불어 아쉬움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4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릴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들에게 다가올 미래 역시 이러한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길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매 순간을 기쁘고 활기차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미래는 절망으로써 다가오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희망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바로 미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면서 미래 역시도 그러한 절망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지레 겁을 먹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똑같아 보이지만, 정말로 똑같은가요? 주님께서는 똑같은 삶을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오늘이 어제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새로움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박해를 당하는데,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우리를 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우리들의 미래는 이렇게 어둡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말라고, 어떤 적대자도 맞서가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지요. 또한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으로 새로운 희망을 건네주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성인 성녀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 박해를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겪듯이, 박해를 통해서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느님 나라가 태어나는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함께 하는 한, 그 시간은 항상 활기찬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보세요. 주님과 함께…….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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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분열과 박해의 시작

하느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친구와 친척들까지도 갈라지게 되어 잡아 넘기고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으로서는 불미스러운 일을 신앙 때문에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가? 이상한 노릇이다. 인간의 정으로 볼 때에는 서로 우애 있게 사랑의 정을 가지고 지내야 하고 하느님께서도 부모의 뜻을 따르고 효도하라 하셨는데, 다른 일로면 몰라도 믿음 때문에 부모와 집안 식구들이 서로 갈라져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예수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러 갔을 때, 시므온 노인이 예수 아기를 받아 들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난 다음 말하기를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2-35)고 예언한 말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믿음을 가질 것이냐 배척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야만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믿음은 하나의 지식과 교양으로서 알고 지내면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을 바쳐 실생활을 통하여 삶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믿음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과 배척의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떨어지는 곳마다 박해와 분열을 일으켜 왔던 것이고, 그것은 부모 자녀 간에도 생겨났던 일인 것이다.

이 분열, 박해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글자 그대로의 모습도 나타났지만, 자기 자신 안에 끝없는 갈등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연약한 인간은 그렇지 못하고, 옛날의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신앙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내적 갈등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모든 갈등은 그것을 이기고 난 다음에는 진정한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는 은총으로 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고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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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다니면서 하느님께 축복과 평화를 바라며 신앙 생활을 합니다. 축복을 바라고 평화를 간구하며 환난과 재난이 생기지 않기를 원하지만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삶의 여정에 환난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똑같은 삶을 살고 똑같은 어려움에 처해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느님 때문에 더 큰 환난을 겪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 때 평범하게 살다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음으로써 혹독한 시련을 겪고 목숨까지도 잃어야 했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신앙을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많이 있지요. 바로 우리와 맞닿아 있는 북한에서, 또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드러나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들로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시련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2-15)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이 말씀대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갇히고 죽는 박해와 시련에 맞서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계속 드러나고 있음을 우리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선포되자 바로 박해가 시작이 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스테파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평화를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스테파노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증거로 박해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이 스테파노의 죽음이 오히려 복음이 점점 더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고 로마, 아프리카,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등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 일들은 과거의 일들만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도 하느님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세를 받음으로써 부딪히는 일들도 있고, 신앙이 다른 곳으로 시집 장가를 가서 마음 고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등하고 개종을 강요받는 일들이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요. 신앙이 가정 불화의 원인이 되는 집도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들려 주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21,14-15)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평화와 축복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어려움도 겪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 허공을 울리는 빈 말이 아니라 사실임을 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들을 통하여 체험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어려움을 승화시킬 때 그 시련보다도 더 큰 은총의 결실이 맺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언변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시며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교회법으로 신자와의 결혼을 원칙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예외적인 일로 반드시 '관면혼배‘를 하게 되어 있지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으로, 또 신앙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방황하며 고생하는 시련의 시간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세속적인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빨리 접고, 하느님의 축복 안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부모로서의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참고 견디고 기도하면서 시련의 시기가 성숙의 시기를 거쳐 축복이라는 결실로 맺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어른들의 역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어려움이 없는 축복만을 바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또 그런 우리의 현실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21,17-18)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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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연히 텔레비전의 지난 방송을 보다가 흥미를 끌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제목은 모르겠지만, 연예인이 나와서 50명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 때의 친구 5명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 친구들이 그 연예인의 학창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줍니다. 정말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긴 그 친구를 잘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도 아닌데, 불과 10년 전의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찾지를 못합니다. 아쉬워하는 친구의 모습…….

왜 찾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친구의 얼굴이 바뀌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친구가 기억하고 있는 그 에피소드를 연예인은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친구에 대한 기억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찾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50명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친구 5명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과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즉, 엉뚱한 사람을 보면서 “반갑다. 친구야~~”를 외치고 그 상대방으로부터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듣는 연예인의 모습처럼, 엉뚱한 곳에 가서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따라서 내 주변에 계시는 주님을 척척 찾기 위해서는 주님과 잊지 못할 추억이 많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라는 친구를 잊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세상 가운데 숨어 계신다고(숨어 계시지는 않지요. 우리가 세상만을 쳐다보니 주님을 못 볼 뿐이지요) 주님을 못 찾는 어리석음은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박해의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분명히 무서운 순간입니다. 무섭다고 두렵다고 주님을 모른 척 하시겠습니까? 혹시 주님께서 먼저 “반갑다. 친구야~”라고 말씀하면서 손을 내미시는데, 사람들의 박해를 무서워하면서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외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말씀처럼 사랑하지 못하고 나만 살겠다고 나만 잘되겠다고 세상의 악과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 박해를 이기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반갑습니다. 주님~~”을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환한 미소로 나를 안으면 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반갑다. 친구야~~~”

오랜 옛 친구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연락을 해봅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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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받아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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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전문의 김해남 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학생 실습을 할 때 소아과에 네 살 된 사내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가 들어왔고 그 뒤로 어른들 대여섯 명이 함께 따라 들어왔습니다.

아이가 네 돌이 다 지나도록 기본적인 단어 몇 개 외에는 통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 원인이 어른들에게 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아이는 5대 독자였고 그 집엔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 둘이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워낙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어른들은 24시간 그 아이 곁에서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거의 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울기 전에 모든 것이 다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욕구가 다 충족되면 아이에겐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표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 우는 것은 편안한 곳에서 나와 원하지 않는 환경에 접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울음은 첫 번째 욕구불만의 표출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이의 허파가 작동하게 되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분명 상처가 되지만 그 상처가 아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아이는 각기 다른 울음으로 자신의 욕구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러면 욕구가 타인에 의해 충족됨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타인과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표현을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됨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고 나서는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을 통해‘나’라는 자아인식이 생겨나고 타인과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하나로 여기게 되어 자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과 내가 구별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표현하기 위한 더 고급수단인 언어의 사용이 전제됩니다. 언어의 구사와 사고체계의 형성을 통해 아이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바로 자아의 명확한 인식입니다. 이때를 사춘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욕구불만 때문에 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사고체계도 형성되었는데 더 큰 욕구불만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아가 욕구불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보자면 자아는 뱀이고 하느님께서 하와가 뱀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뱀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아의 욕구를 상징합니다. 이 자아와 접촉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자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유라기보다는 자아의 욕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자아로부터의 벗어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 안에 양심이란 것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양심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자아의 욕구와 반대됩니다.

인간은 자아와 접촉하며 이제 본격적인 선택의 자유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그 자유를 주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 맺기를 원하셨다면 사람을 못 나가게 집에다 가둬놓고 사귀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자아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욕구불만과 상처를 통해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습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부터 해 나가야하는 일은 다시 어린이와 같이 자아 없이 하느님과 내가,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되는 단계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뱀을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힘겹게 만난 자아를 통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앞으로 있을 박해를 예언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자신을 믿지 말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면 지금까지 자신을 더 믿게 만들었던 상처가 치유되어야합니다. 상처가 더 자아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상처를 받게 하셨음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덜 믿기 위해서는 어린이처럼 내 자신의 신뢰를 다시 누군가에게 온전히 두어야하는데 신앙인들에겐 그분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그 자리를 성령께서 차지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우리 자신을 다시 상처가 없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만들면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완전한 준비가 된 상태가 됩니다.

모든 상처는 흉터를 남깁니다. 그러나 그 흉터는 다 필요가 있어서 생긴 것입니다. 김혜남 씨의 딸아이도 심장수술 자국이 가슴에 길게 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흉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불만족과 상처를 통해 자신 속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김혜남 씨는 딸 아이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흉터는 바로 네가 큰 병을 이겨냈다는 징표란다. 어린 나이에 그 큰 수술을 견뎌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난 네 흉터가 오히려 자랑스럽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자랑스러워하실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만나게 하신 자아를 우리가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말을 들어도 되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에 대해 아파하는 것보다 상처가 더 큰 축복의 준비단계였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치유되었다면 앞으로 받을 상처도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상처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서 상처와 치유를 통해 당신께로 이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끊임없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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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11월 28일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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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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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나는 표징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에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2-13절)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황제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죽음은 영혼에도 육신에도 올 수 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0-31)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굳은 신앙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 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고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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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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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   [부산/인천] "늘 깨어 기도하여라"  [4] 1856
1503   (녹)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깨어 기도하라]  [1] 1496
1502   [인천/수원/서울] 주님의 작은 스파크  [2] 1732
1501   [수도회] 기다림의 행복  1798
1500   [부산/전주/마산/대전/대구] 오늘의 거울 속에 내일이 보인다.  [7] 2144
1499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내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1592
1498   [인천/수원/서울] 내가 받았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6] 1868
1497   [수도회] 알아들어야 할 진실  [8] 1736
1496   [부산/마산/청주] 예루살렘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  [7] 1974
1495   (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예루살렘 파괴]  1707
1494   [부산/전주/마산/의정부/대구] 일상(日常) 속에서의 최후  [7] 1777
1493   [수도회] 일상 안의 박해  [3] 1609
  [인천/수원/서울]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입니다  [5] 1701
1491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1] 1581
1490   [부산/마산/의정부]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4] 1728
1489   [수도회] 파멸의 때 우리는  [3] 1725
1488   [인천/수원] 생각의 전환  [4] 1596
1487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세상의 종말-징조]  [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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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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