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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주/마산/의정부/대구] 일상(日常) 속에서의 최후
조회수 | 1,759
작성일 | 08.11.26
예루살렘 성전이 무참히 파괴되고, 도성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며,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이스라엘의 운명(기원후 70년 8월 29일)은 곧 세상의 종말로 확대해석 된다. 예수께서 세상 종말의 시기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피하셨지만, 그 때 나타날 징조들을 말씀하셨다.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과 민족들 간의 전쟁, 반란과 지진, 기근과 전염병, 천체에 일어날 대변화가 그런 징조들이다. 그런데 이런 징조들이 있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 있다. 오늘 복음은 세상종말의 징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일들을 전해준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박해와 고발, 체포구금과 재판, 항변과 증언, 그리고 고문과 죽음이다. 이는 예수의 제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신자라면 누구나 거치고 치러야 할 마지막 숙명적 단계이다.

복음서가 보도하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예언과 세상종말과 종말징조에 관한 예언, 그리고 그 전에 선행될 제자들의 박해에 관한 이야기를 대면할 때,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해석을 시도할 수 있다. 첫째는 복음서 안으로 뛰어들어 역사적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제자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모든 말씀은 즉시, 또는 머지않아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현실감 넘치는 예언으로 다가온다. 둘째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의 어느 시점, 예를 들면, 복음서가 집필된 시점(80~90년)이나 복음서를 읽는 공동체의 시점이나 아니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박해가 한창인 시기로 옮겨간다면 더욱 좋다. 루가복음의 경우,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이미 과거사가 되어 성취된 예언으로 남게 되며, 박해시기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 때문에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의 일을 당하였다. 셋째는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에 그대로 있으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박해상황도 아니고, (물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종말이 목전에 임박한 그런 시기도 아니다. 그저 교회 전례력상 한해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가 제시하는 박해와 종말에 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양상은 다르지만 믿음을 위협하는 유혹과 박해는 늘 우리 곁에 있으며, 세상의 종말 또한 언제든 분명히 올 것이다.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세상의 종말은 완성의 때가 될 것이다. 종말이란 세상을 끝장내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완성을 위한 하느님 계획의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사건이다. 이는 곧 참고 견디어낸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사건이다. 일상의 박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인자의 재림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마침 교회 달력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을 착안하여야 한다. 사람은 무엇이든 마지막에 이르면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리면 손을 쓸 수 없다. 일상(日常)의 모든 것을 최후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성의를 다하여 사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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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말씀은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에 대해서, 주님께서 힘을 실어주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의 3년간 同苦同樂하면서 함께 지냈습니다. 길다면 길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동안 제자들과 숙식을 함께 하시고, 당신의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 당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뭔가를 느끼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현장을 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씀 한마디에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눈먼 사람의 눈이 뜨이고, 악령이 달아나고, 풍랑이 잠잠해 지고, 그리고 사람들이 놀라고, 감동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만 따로 특별교육을 시키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떤 때는 먹혀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많은 경우에는 완전 자기들 개성대로 놀았습니다. 한번은 하늘나라에서 누가 주님 오른편에 앉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어린이처럼 다투기도 하는 한심한 모습을 드러낸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도, 한 명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죠. 그러니,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찹잡하셨겠는가 하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미리 제자들에게 일리리 당부의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님이 하루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음이 안 놓여서 자식에게 일러주는 말씀과 비슷합니다. 밥은 전기밥솥에 있으니 어떻게 하고, 반찬은 냉장고 안에 있으니 어떻게 하고, 설거지는 내가 돌아와서 할테니 너는 옆에 모아두기만 하면 되고, 보일러는 어떻게 하고, 가스불은 어떻게 하고, 낯선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고, 모르는 것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내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하면서, 하나하나 일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하나 일러주고 계십니다. “내 제자들아, 나중에 내가 없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아라. 나중에 너희는 잡혀서 박해를 당하고, 회당에 끌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할 것인데, 그때 내가 없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단다. 차라리 이때가 바로 복음을 증언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라. 이전에 내가 줄곧 해온 말들, 그리고 죽은 사람도 살리던 모습을 보지 않았느냐? 내가 언제나 너희들 곁에서 지혜도 주고,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다 가르쳐 주마. 그러니 너희들이 너희를 박해하는 임금들이나 총독들 앞에서, 학력도 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부출신이라고 해서, 하나도 기죽을 필요는 없단다. 내가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도록 해 줄테니, 끝까지 참고 견뎌라. 그러면 참생명을 얻을 것이다.”

네, 이 당부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과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부활하신 주님만을 믿고, 그분께만 바라라고요. 주님을 향해 깊은 신뢰심을 지닌다면, 그때그때에 맞는 지혜와 힘을 주신다고요. 그 힘이 비록 어려운 시련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포기하지 않는 힘은 주신다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는 힘은 주신 다는 것입니다.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주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해주신 다짐의 말씀을 되새기며, 오늘도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삶의 지혜를 청하면서 성실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전동기 유스티노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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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에 이르면

오늘 복음을 읽으며 4년 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열렸던 미국 CLC(Christian Life Community)의 전국대회에 참가했을 때가 떠올랐다. 대회 프로그램 중 사회정의 사도직 체험의 일환으로 현지의 빈민구제와 난민보호사업 견학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조금 벗어난 거리에 들어서자 이곳이 미국 땅인가 의심이 들었다. 야자수만 무성한 먼지투성이 길에 갈색 피부의 하이티 출신 난민들 모습을 보니 가난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카리브해 섬나라의 살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듯싶었다.

그런 거리 한가운데 건축이 장엄하고 내부 장식이 화려한 코퍼스 크리스티 성당이 난민들의 보호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그곳 신자들의 99퍼센트가 불법체류자라고 했다. 50년 전만 해도 이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의 비벌리힐스처럼 미국에서 손꼽는 부촌이었으나 쿠바와 하이티 등에서 난민이 밀려오고 슬럼화되면서 부자들이 떠난 자리를 가난한 이들이 대신 차지했다. 아름다운 성당은 이제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수용소, 구호기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처음 건립할 때는 부유층 신자들을 위한 성당이었지만 반백 년 세월이 바꿔놓은 것이다.

사람이 처음에 꿈꾸던 목적과 계획대로 모든 게 이루어진다면 과연 하느님이 계셔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과 하느님 생각은 다르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히 멀 듯 그 단절된 거리를 한달음에 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비록 마지막 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그분이 예시하는 것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성급한 호기심에 애탈 필요도 없다. 다만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알고 삶을 기도처럼 수행할 뿐이다. 그러면 그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손길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일어날 일들이 다 일어난 후에 종말은 올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신뢰하며 순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단련하는 것뿐이다.

▮ 원영배(미국 로스앤젤레스 대교구 종신부제)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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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광과 보상으로 주어지는 주님의 심판

요한은 환상 중에 흰 구름 위에 앉아계신 분을 본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신데 심판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흰 구름은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1,7; 마태 24,30). 금관은 부활을 통해 사탄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세상에 대한 그분의 영원한 통치권을 상징하며(6,2; 19,12), 손에 낫을 드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권을 상징한다(요엘 3,12-14).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신다(15절; 마태 13,37-43; 요한 4,35-38). 추수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는데(호세 6,11; 요엘 3,13), 여기서는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을 모음으로써 구원하는 것을 뜻한다.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포도 수확의 비유로 묘사된다(17-19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심판하도록 하실 수도 있으나, 성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친히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천사가 수행하도록 하신다(18절).

불(마태 18,8; 루가 9,54; 2테살 1,7)과 포도를 추수하는 것(이사 63,2-3; 요엘 3,13)은 성서에서 심판을 상징한다. 포도가 다 익었다는 것은 악한 자들의 불신과 죄악이 절정에 달하였고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하느님께 상달되어 최후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가리킨다. 땅의 포도는 하느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며 짐승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포도는 수확의 때에 하느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지게 된다. 수확된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고 포도즙을 짜는 행위는 성서에서 하느님께서 적대자에게 진노하시어 심판하시는 것을 상징한다(19,15; 이사 63,3; 애가 1,15). 짐승과 사탄의 추종자들이 이 땅 위에서 성도들을 무참히 박해하여 피를 흘리게 했듯이 그들도 하느님의 혹독한 심판을 당할 것이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을 준다.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누리고 이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면서 세상을 심판하실 준비를 다 마치셨다. 그리하여 당신의 길을 걷는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다. 심판이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징벌이요 멸망이 된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심판이 두려움과 공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심판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기쁨이요 상급이다. 마치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시험은 걱정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되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심판은 지상 삶에 대한 보상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듯이 주님의 지체인 우리도 마땅히 영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을 통해서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뵘으로써 행복을 누리고, 심판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 것이다. 심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산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미래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앞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하느님 나라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미래에 우리에게 영원하고 완전히 주어질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을 보장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비록 현세의 삶이 고통스럽고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어 나가자. 현세에 여러 가지 유혹이 우리를 뒤흔든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나가자.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자.

▮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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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예수님께 귀의(歸依)하기

오늘 독서기도의 제2독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라는 키잡이를 모시지 않은 영혼은 비참합니다. 그 영혼은 바다의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욕정의 파도에 떠밀리고 겨울 폭풍우처럼 악령에게 얻어맞아 끝내는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성 마카리우스 주교가 한 것으로 보는 강론에서)

우리 인생살이는 피안(彼岸)을 향한 항해(航海)입니다. 잔잔한 파도와 순풍으로 평화로운 항해를 할 때도 있지만 폭풍우 몰아칠 때도 있고, 높고 험한 파도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봉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키잡이가 우리 인생의 배를 운항(運航)한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온전히 맡겨도 좋을 키잡이입니다. 그분은 어떤 적수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우리에게 주실 뿐 아니라 사나운 이리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고 끝내 좋은 목장으로 이끄시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0,1-18)예수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 안에 인생의 뿌리 내린 사람은 박해와 시련, 유혹과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돈과 권력, 지위와 지식 따위에 기대서려는 사람은 작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즐길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 인생을 지켜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발밑을 보시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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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고통을 극복하는 힘

교우들과 신앙상담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도 인생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특히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분들일수록 신앙의 위기를 더 크게 느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인생의 고통이나 어려움이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때론 열심히 살지 않는 이들이 더 편안한 삶을 사는 것 같아 우리를 더욱 속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제가 늘 하는 권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보호자를 얻게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갑자기 원하는 대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뀌어야 할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뀌고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시각이 바뀌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의 인생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인생의 어려움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입니다. 신앙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신앙이 이런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신뢰와 예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실 만큼 우리 각자가 그분께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이는 단순히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 의정부교구 이재화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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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주님, 당신이 저의 전부가 되소서

오늘 우리 예수님의 말씀은 왠지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특별한 순교자나 빼어난 성인들이 그 대상인 것 같습니다. 철이 없을 적에는 순교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지게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스테파노(제 수호성인이시지요)의 죽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수수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심에 골백번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겪게 되는 마음의 핍박에 대하여, 타인의 생각에 무시당하는 나를 위한 말씀이십니다. 물론 나의 생각과 말로 핍박한 이웃, 내 마음 바깥에서 서성이는 이웃을 되돌아보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하나 꼽으라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의 경우를 포함시켜보고 싶습니다. 우리 신자 분들,
자손을 얻으시면 유아 세례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 궁리 저 궁리해서 세례명도 골라줍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기 이름은 소위 유명한 작명가를 찾아가서 짓는다고 하네요. 그뿐입니까? 자녀의 결혼을 성사시킬 즈음엔 궁합인가요? 사주인가요? 아무튼 점쟁이가 골라준 그 날짜에 성당에서 혼배를 치룹니다. 정말 낯 뜨거운 처사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이신 여러분! “발람에게 속으신 겁니다”(묵시 2,14). 이웃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에 칭찬을 들을 수 있었던 티아티라 신자들은 이제벨이라는 예언자에게 “속아서 불륜을 저지른”(묵시 2,20) 탓에 질타를 당합니다. 속과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느님의 눈을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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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한 소년에게 자신의 키보다 한 두 배는 더 큰 십자가를 하나 맡기십니다. 그 십자가의 맨 위에는 화살표가 달려있고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표시하는 하나의 표지판 역할을 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맡기시면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푯대를 잘 지켜줄 것을 당부하십니다. 처음에는 그 표지판 역할을 하는 십자가를 들고 있던 소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하며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에서 표지판을 지탱하던 그의 역할에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가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그 길에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점점 힘이 들어집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보라가 치는 그 상황 속에서 표지판을 지탱하던 그의 얼굴에는 점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지나가지 않는 그래서 홀로 그 십자가를 버티고 있는 그의 모습은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그때 다시 바람은 심하게 그를 몰아붙였고 너무나도 힘들었던 그는 그만 그 십자가를 놓치고 넘어지게 됩니다. 너무나 힘이 들어 다시는 일어날 힘도, 일어서기도 싫은 그 상황 속에서 그 소년은 십자가를 맡기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서서 힘겹게 힘겹게 십자가를 세웁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서있을 기운조차 없었던 그는 십자가를 붙잡고 무릎을 꿇습니다. 초췌한 그의 얼굴과 무릎을 꿇고 겨우 십자가를 지탱하고 있던 그의 모습... 그런데 그런 그의 등 뒤로부터 그림자 하나가 다가옵니다. 그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그의 눈에 반가움과 기쁨이 어리고 지금까지 자신의 어려움을 모두 다 쏟아내는 듯한 그런 눈물이 맺힙니다. 그 곳에는 바로 예수님이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팔을 한껏 벌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눈에도 눈물이 살짝 비쳐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소년을 자신의 품에 가득 안아 주십니다. 예수님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 소년에게 예수님은 ‘그동안 힘들었지’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나와 영원히 함께 하자’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우리들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함께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고 감옥에 가게 되고, 부모와 형제와 친구들까지도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겠지만, 내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어놓고 계신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명의 삶을 약속하십니다. 가끔 우리는 신앙으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많은 유혹과 또 많은 시련들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복음의 말씀처럼 그분은 우리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당신의 힘과 은총을 나누어주십니다. 비록 그 힘과 은총을 정말 못느끼겠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이 오더라도,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들고있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이 다다랐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제 나와 함께 하자”는 말씀을 해주시며 나를 안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오늘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박재철(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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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내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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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   (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예루살렘 파괴]  1686
  [부산/전주/마산/의정부/대구] 일상(日常) 속에서의 최후  [7] 1759
1493   [수도회] 일상 안의 박해  [3] 1590
1492   [인천/수원/서울]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입니다  [5] 1687
1491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1] 1558
1490   [부산/마산/의정부]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4] 1709
1489   [수도회] 파멸의 때 우리는  [3] 1708
1488   [인천/수원] 생각의 전환  [4] 1577
1487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세상의 종말-징조]  [1]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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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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