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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청주] 예루살렘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
조회수 | 2,011
작성일 | 08.11.27
루가복음이 기원후 80-90년, 즉 예루살렘이 실제로 멸망한 70년 8월 29일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마르코복음(13,14-20)의 같은 대목과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종말 직전의 징조로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루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역사적 사건으로 열거하여 평가하고 있으며, 이를 확대하여 세상종말에 대입시키고 있다. 루가는 또한 세상종말의 징조로 우주적 파국을 제시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종말의 목적은 완성이요, 인자의 재림이다. 인자의 재림은 곧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낸 사람들이 구원받는 때이다.(28절)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모으듯 예루살렘을 품으려 했으나(루가 13,34),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들을 향한 당신의 비통한 눈물조차도(루가 19,41)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자신의 구원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되도록 먼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하고, 성도에 있는 자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며, 시골에 있는 자는 성도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21절) 상황이 이쯤 되면 거동이 불편한 임부(姙婦)나 젖먹이를 가진 산부(産婦)가 불행한 것은 뻔한 일이다.(22절)

기원후 70년 2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당도하였고,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성도를 포위하여 일전일퇴를 거듭하면서 8월 29일 성을 함락시킨 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버티던 960여명이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 그날까지 이스라엘은 매일 세상의 종말을 눈으로 보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대장군으로서 로마군에 항거하여 싸우다 굴복한 후,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로 개명(改名)한 ‘요셉 벤 마티아스’(37-100년경)가 직접 기술한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유대전쟁사는 75년부터 7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의 유대 역사를 기술하고 기원후 66-70년의 유대반란, 70-73년 로마군의 침략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 체로 씌어진 이 전쟁사에는 유대의 애국주의자들에 대한 저자(著者)의 반감이 드러나 있으며, 로마의 군사전략과 병법을 높이 평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5개월간 예루살렘이 고립되자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고 다녔으며,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급기야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마군에게 투항해 오던 자는 산채로 배가 갈리고, 수많은 자들이 체포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쳤던 그들 스스로가 매일 400-500명씩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끝내 항복을 거절한 독립당원들 때문에 성전은 불타고, 예루살렘은 송두리째 폐허가 되어버렸고, 투항한 자들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 세계에 팔려 나갔으니, 그야말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유대전쟁사)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그때가 바로 성서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22절)이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귀담아 들어야 할지를 깨우쳐 준다. 다음 구약성서의 구절을 묵상하면서 교회 전례력 마지막 주간이며 성서주간을 더욱 열심히 지내도록 하자.

“그러나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중략) 마침내 너희를 쓸어버리시리니, 너희는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너희를 원수에게 패하게 하실 것이다. (중략) 저주가 너희를 덮쳐 사로잡는 날, 너희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그가 지시하신 계명과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너희는 마침내 굶주리고 목이 타며, 헐벗은 몸으로 아무 것도 없이 야훼께서 보내신 원수를 섬겨야 하리라. (중략) 너희 원수가 이렇게 너를 포위하고 몰아치면 너희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소생,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아들과 딸을 먹게 될 것이다. (중략) 자기가 먹는 자식의 고기를 아무에게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아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궁한 나머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탯줄 째 몰래 먹어 치울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치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땅에 있는 만백성 가운데 너희를 흩으실 것이다.”(신명 28,15-64)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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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부터 제1독서로 요한 묵시록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 묵시록만큼 알아듣기 어렵고, 오해를 많이 받는 성서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종말을 이야기 하고, 이상한 표현들도 많이 나오고, 구원 받는 사람의 숫자니 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도 등장하다 보니, 요한 묵시록의 참의도와 내용들이 왜곡되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박해가 날로 심해지던 시기에 서술되었다는 사실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박해아래서 신자들은 날로 위축되고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공공연히 신앙생활을 격려하고 북돋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고통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하느님이 주시는 힘과 사랑이 더욱 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말들을 상징과 암호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늘 나오는 바빌론의 표현입니다. 바빌론은 바로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로마제국을 상징하고 자신을 우상화시키는 황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무너졌다 엄청난 탕녀가 심판 받았다는 말은 신앙인들의 신앙이 축복을 받는다는, 믿음과 신뢰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멸망의 날, 종말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포로가 되어 여러 나라에 잡혀 갈 것이다.”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루가 복음서는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된 70년 이후에 기술되었습니다. 즉 복음사가는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한 자입니다. 그래서 전쟁과 그로 인한 약자의 참혹함을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특히 약자들을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최근 이라크에서 벌여지고 있는 대규모 지상전이 떠오릅니다. 그 전쟁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고통 받는 이는 바로 약자인 어린이와 여인, 노인들일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복음인 루가복음은 오늘날의 이 현실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무참한 살육 사건을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이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의 모습과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날,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사람들도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그 날은 희망과 구원의 날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이 세상의 가치로 살아간 자들일 것입니다. 지금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키며 약자를 공격하는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자신을 우상화 시키고 약자를 박해하는 현대판 바빌론일 것입니다.

그 날 정말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들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을 느끼는 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있을 것입니다.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아멘.

이재원 다미아노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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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어제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의 박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참생명을 얻기 위해서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라며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돌연 종말의 때와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는 무서운 재난과 하느님의 분노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복음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시대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기원후 70년 경 로마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예루살렘의 종말의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은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상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사형과 낙태, 인권유린과 인종차별을 낳았으며,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풍조는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과 환경파괴로 지구의 온난화를 낳았으며 그 결과로 각종 홍수와 태풍, 지진과 해일 및 기온 이상현상을 유발했습니다. 또한 나와 우리만을 강조하여 너와 너희에 대한 무관심과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적 세계관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 곧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 특히 약소국과 빈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에 있을 이런 징조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종말의 시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 말미의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때 그 시간이 심판과 징벌의 시간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구원의 시간임을 알려 주려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속량을, 우리의 구원을 강조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은 세상의 공포와 엄청난 하느님 분노의 표현이기 이전에 이러한 종말의 징조를 보거든, 마음을 재빨리 돌려 회개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 잡기를 바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어제 강론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세상의 논리에, 바알의 논리에, 물질만능의 논리에 수궁하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곧 그동안 세상이 원하는 방법으로 세상이 바라는 목적으로 우리가 나아가고 있었다면 발길을 돌리고 머리를 돌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또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환경을 아끼고 보살피며,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루카 복음 25장 36절의 말씀처럼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실천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설사 실천할 수는 있어도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정해놓고 내가, 혹은 우리가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앉아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마음만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가, 우리가 정해놓은 장소와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아니라 하느님과 소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게 될 것이고, 또 마지막 날에 그분은 나를 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계획을 잡아서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해서 앉읍시다. 성령께서 나를, 또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손영배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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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 재난이 가까워지면 여러 징조들이 나타난다고 말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해와 달 그리고 별 등 천체가 흔들리게 되고, 무서운 재난이 닥쳐오고, 당연히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떨게 되겠지요. 만일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하나 여유 있게, 맘 편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주님께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실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큰 재난이 다가올 것이라는 말에 두렵고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감사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 방 책꽂이에 궤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유영을 하고 있는 모습, 지구를 떠났다가 다시 귀환하는 여러 우주왕복선에 관한 기록들, 우주왕복선이 지구를 돌면서 수집한 여러 가지 실험 모습들에 관한 자료와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를 촬영한 사진 등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설명이 곁들여진 사진 책자입니다.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여주고 있는 모든 행동들을 품고 있는 지구. 그 지구를 보면서 우주를 다녀온 한 우주비행사는 이렇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파란 구슬 속에 들어 있더라.” 라고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를 쓰면서 싸우고, 때로는 죽이고, 험담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지구, 또 한쪽에서는 희생과 사랑을 펼치고, 생명의 주인을 찾고, 선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 남에게 얘기하기에 창피하고, 감추고 싶은 치부들, 어리석고 모자란 모습들까지도, 인간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지니고 있는 지구.

사진을 통해서 새롭게 다시 보게 된 그 파란 구슬이 ‘우리 인간들의 추하고 나쁜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을 저 아름다운 지구가 덮어주고 있었구나! 인간의 온갖 것들, 진?선?미도 저 속에 함께 있고, 인간이 저지른 죄악과 어두운 모습들까지도 모두 가려주고, 덮어주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저기에 함께 계시구나!’ 그렇게 묵상을 하면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이 아침, 오늘 복음은 징벌의 날을 보여주면서 다소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지만, 무작정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께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날이 오기 전까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더 많이 기회를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정화되도록 기다려주신 후에 영광을 떨치면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이웃을 사랑하면서 친절을 베풀면서 감사 드리면서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도정호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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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를 준비할 시간

11월 마지막 목요일인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이다. 저녁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아 하느님께 한 해를 감사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푸근함이 넘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 추석에 조상을 기리듯 미국에 건너온 신앙의 선조들이 역경을 극복하고 뿌리내린 역사를 기념하는 의미가 각별하다. 신앙의 자유를 찾고 이상향을 건설할 꿈을 품은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다. 66일 동안 폭풍 때문에 배 밑창에 갇혀 지내며 그들은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로 용기를 북돋우며 견뎠다. 노아의 방주도 40일 만에 항해를 마쳤다는데 신대륙으로 향한 뱃길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험난한 모험이었다. 아메리카에 가까스로 도착했으나 전염병과 가뭄으로 그들 중 3분의 1이 넘는 44명이 첫해에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식량을 나눠주고 새 농작물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이듬해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질병과 굶주림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의 고난에서 지켜주신 하느님께 첫 추수의 감격을 돌려드린 감사의 축제는 오늘도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자연재해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변화로 예측불허의 정도가 더욱 심각해지고 인재의 규모도 확대된다. 올해도 지진과 태풍, 전쟁과 대형사고가 숱한 생명을 앗아가고 많은 사람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 몸도 벅찬데 태아와 젖먹이를 돌볼 힘 없는 여인들은 처지가 어떠할까? 그들의 시련과 불행을 마음 아파하는 예수님께서 지금도 가장 그늘진 곳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르신다. 혼란스런 재앙 속에서 무서워 떨지 말고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신다. 구원의 때가 가까워진 징조를 보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볼 기대를 품는다면 두려움은 설레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채찍으로 몸을 찢는 고행보다 고난이 끝나감에 기뻐하고 감사를 준비할 시간이란 가르침은 종말에 대한 우리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 준다.

▮ 원영배(미국 로스앤젤레스 대교구 종신부제)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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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구원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는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고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진이, 동남아에서는 쓰나미와 해일이 밀어닥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죽어가고 있고, 언제 조류독감이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습니다. 창세(創世) 이래 전쟁과 천재지변(天災地變), 기상이변(氣象異變)과 각종 염병(染病)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사실상 이런 일들은 일상적(日常的)입니다. 이런 사건과 징조를 보고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세로군!’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말세(末世)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日常)은 말세(末世) 즉 종말(終末)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은 ‘종말(終末)의 시간’입니다.

‘종말(終末)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말(終末)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디에 설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의 지금은 구원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종말의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탕진하는 것은 어리석음 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욕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사는 사람에게 지금은 심판이 시간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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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징벌의 날

바빌론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에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예레미아 예언자 시절에도 거듭 선포된 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나라들 가운데 보배요 칼데아인들의 자랑스러운 영광인 바빌론은 하느님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이사 13,19)고 말하였고 예레미아 예언자는 “너희는 바빌론 한복판에서 도망쳐 저마다 제 목숨을 구하여라. 바빌론의 죄 때문에 함께 죽지 마라.”(예레 51.9) 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에게 똑 같은 주님의 예언이 내렸습니다. 이는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멸망당할 악한 바빌론이 지금 이 세대에도 존재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노아시대의 물 심판 이후, 하느님의 심판은 계속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이 죄악이 너무나 무거울”때 (창세 18,20참조) 그 고장과 나라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 고장에서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을 때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빌론과 폼페이에서도 지금 이 시대에서 조차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온갖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르시는 멸망의 징조는 성경의 표현처럼 모든 자연계가 붕괴되는 바로 그 모습과 그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바빌론의 생각에 젖어 살고 있다면 어두운 바빌론의 행위를 버리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고 있다면 곧 멸망당할 바빌론이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맹렬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악을 애곡하고 세상의 죄에 통곡하며 세상의 상처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당부라 짚어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나타날 징조가 있는 바로 그 때 돌아서 회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지러진 민족들의 공포에 휩싸일 그 시간에 홀로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매일 매 순간 그분의 자애에 의지하여 그분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의 굳은 바빌론성곽을 부수어낸 사람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그 사악함 때문에 벌하고 죄인들을 그 죄악 때문에 벌하리라.”하셨으며 “오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고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꺽으리라.”(이사 13,11참조)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이사 22,13)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바빌론인 채로 주저앉아 삶을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치지 않고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으로 녹아지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리가 되어야 하며 그분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바빌론을 역행하는 복음을 살아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인’에게는 징벌의 날도 결코 두렵지 않은 까닭입니다. 아멘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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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은총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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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에서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관리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건강한 것도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 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에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 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 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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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8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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