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평일강론 (짝수해)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8 100%
[수도회] 알아들어야 할 진실
조회수 | 1,735
작성일 | 08.11.27
오늘 복음은 빌라도 앞에 서 계신 예수의 침묵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죄목으로 고발당하면서도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러나 빌라도는 그 침묵을 알아듣지 못했다. 빌라도는 ‘진실’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 진실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그 자체이시고 생명을 주는 친밀함이니 이 친밀함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그런 재앙에서 구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런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곧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

빨리 산으로 달아나라는 말은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이다.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더이상 죄를 짓는 예루살렘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는 말은 악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요,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죄짓는 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에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옛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살기 위해 옛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복음의 말씀을 살아야 할 때라는 말씀이다.

“오, 주님. 오늘 저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온 존재가 두려움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 평화, 아무 휴식도 없이 다만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정신적 몰락, 잘못된 삶을 살아간다는 두려움, 거부와 심판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에 대한 두려움뿐입니다. 오, 주님. 당신도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당신은 깊이 번민하셨고 당신의 땀과 눈물은 당신의 두려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 주님. 제 두려움이 당신의 두려움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두려움이 저를 암흑이 아니라 빛으로 이끌게 하시고 당신 십자가의 희망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이끄소서.”(헨리 나웬, 「자비를 향한 외침」 중에서)

최기도 수사
448 100%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 하면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수상이자 명정치가였습니다. 문학적 소질도 탁월하여 수많은 어록을 남겼으며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생존 당시 처칠 수상은 많은 의사들의 연구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아주 고령인 65세에 수상에 취임한 그는 당시 시국이 시국인 만큼(2차 세계대전)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는 술을 즐겼습니다. 즐길 정도가 아니라 도를 넘어섰습니다. 그 독한 스카치위스키를 밤이면 밤마다 물마시듯이 마셨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실에 바늘 가듯이 술 마시면 땡기는 것이 있지요. 담배인데, 그냥 담배가 아니라 제일 독한 시거를 늘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보고, 회의, 결재, 시찰...그에게는 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비만이었습니다. 이런 처칠 수상이었지만, 그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아주 건강했다고 합니다. 그런 건강을 바탕으로 90세 넘게까지 장수했습니다.

그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 특유의 유머, 불굴의 의지 등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길어져만 가는 전쟁으로 지쳐가는 국민들에게 한 짧은 연설은 그의 낙천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Never, never, never give up!)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과의 사이에서 오고갔던 ‘전설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둘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살았습니다. 당시 둘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 내용입니다.

“처칠, 당신은 제 안의 태양이예요!”

“클레멘타인,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행운이라오. 당신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일까요? 은행계좌일까요? 유산일까요? 아파트일까요?

사랑,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사랑만이 전부입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했던 사랑의 몸짓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향해 바쳤던 사랑의 표현들, 바로 그것입니다.

왜들 그렇게 미워합니까? 왜들 그렇게 싸웁니까? 왜들 그렇게 아웅다웅합니까?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1.27
448 100%
구원받을 때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란 연대기적인 시간의 의미로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란 시간은 비록 흘러가는 것이지만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마치 역사의 의미를 ‘히스토리에’(Historie: 조사나 탐구에 의해 기술된 순수역사)와 ‘게쉬크테’(Geschichte: 풀이역사)로 구분하듯, 시간의 두 가지 그리스적 개념은 ‘하느님의 시간, 섭리’를 이해할 때 참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적어도 성경에서 쓰이는 시간의 개념은 ‘카이로스’에 가깝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받을 때’는 2천 년 전에 선포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지금 다시금 ‘그 시간’이 재현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카이로스의 ‘때’일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언제고 이루어질 일이지만, 그 종말을 앞당겨서 미리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은 종말론적 희망에 가득찬 시간입니다.

한 개인의 내면 안에서도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기존의 삶의 가치가 붕괴되고 홀연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은 지금도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고난회 서현승 신부
  | 11.27
448 100%
머리를 들어라


우리는 오늘 복음을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며 동시에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곧 이미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예고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 이는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세례성사를 받은 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오면서 가꾸어 왔던 각자의 성전이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미사에만 참례하면서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만 말씀과 성체로 영적인 살을 찌우지 못하고 미움과 시기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느님께 대한 의혹과 불신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면 마치 예루살렘 성이 적들에게 포위되어 멸망하듯 어느 순간 우리의 신앙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열악한 상황과 한계로 인해 점점 나의 성전이 흔들리고 꿈과 이상이 무너져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젠 끝이다’, ‘이젠 죽었다.’ 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신다. 당신을 향하라고 하신다. 바로 이때야말로 우리가 속량될 때라고 하신다.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셨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는 용기와 믿음, 구원의 때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청해야겠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 11.27
448 100%
매주 수요일 저녁 시간 저희 집은 온통 시끌 시끌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떠나갈 듯한 아이들의 성가소리에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식당으로 옮겨와 벌이는 삼겹살 파티에 또 정신이 없습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 한 조각을 정성껏 상추에 싸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죽어 가는 병아리처럼 삐쩍 마르고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어 거칠거칠했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변한 아이를 보니 저는 밥 한술 안 떠도 배가 하나도 안고플 것 같았습니다. 삼겹살을 대충 구워먹은 아이들이 철판 비빔밥을 비빈다고 난리들이었습니다. 워낙 잘 먹는 녀석들이라 오늘은 밥이 다 부족했습니다. 너무나 영적으로 살아가는 저인지라(?) 식욕이 별로 없는 저는 대충 식사를 끝내고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었지요. 나날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은근히 샘솟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마지막 날의 우리 앞에 펼쳐질 현상이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 날이 우리 인생 최대의 날, 일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 보다 긍정적으로 성장하고 쇄신된 우리 자신을 보여주려는 노력 말입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보여 왔던 그저 그렇고 그런 삶, 지지부진한 삶,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삶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변화된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부단히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끝없이 변화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위선과 권위의식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언제나 새로운 복음적 가치관을 선택하는 사람들, 타성과 안주본능을 떨치고 끊임없이 일어서며 길 떠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1.27
448 100%
매번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좀 오래된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가 있다. 여객선 포세이돈을 타고 여행을 하던 사람들은 배 안에서 화려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해저지진으로 배가 침몰, 승객들은 우왕좌왕 탈출구를 찾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한 신부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사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최악의 상태에서 신부는 목숨을 던지고 6명만 살아남는 장면이 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이다. 문자 그대로 듣는다면 끔찍한 재앙만이 연상될 것이고 또 상징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시라는 것, 희망이 되신다는 것이다. 얼마 전 종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어서어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소리치던 종교집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그분을 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처럼 서로 비슷한 사람들 가운데 과연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또 비슷한 일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다. 매번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을 바라보며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오 마리아 수녀(성심수녀회)
  | 11.27
448 100%
황폐해질 때(루카 21,20-28)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 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 때가 바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도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말씀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다니엘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너는 똑똑히 알아라. 너희가 돌아 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 기름부어 세운 영도자가 오기까지는 칠 주간이 흐를 것이다. 그 뒤에 육십 이 주간 어려운 시대가 계속되겠지만, 그 동안에 성을 쌓고 재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육십 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 올 것이다. ”(다니엘 9,25-27)

왜 예루살렘이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인가? 그 이유를 다니엘의 기도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크고 두려우신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계약을 어김없이 지키시는 하느님, 우리는 못된 일만 하였으며 비뚤어진 짓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겼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저버렸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이처럼 얼굴을 들 수 없이 되었습니다마는 주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유다 사람이나 예루살렘 주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 주변에 사는 사람이나 멀리 온 세상에 흩어진 사람들이 모두가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배신하여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야훼여, 우리는 임금들이나 고관들이나 조상들까지 모두가 주께 죄를 얻어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애처로운 이 모양이 가엾어 용서해 주셨지만, 우리는 주께 반항만 하였습니다.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 우리 앞에 법을 펴시고 그대로 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주의 법을 어기고 말씀을 듣지 않아, 죄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내리시겠다고 하신 저주를 하느님의 종 모세의 법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큰 재앙을 그대로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천하에 다시 없을 재앙을 예루살렘에 내리셨습니다.”(다니엘 9, 4-12)

결국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그런 재앙에서 구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런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즉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빨리 산으로 달아나라는 말은 하느님께로 돌아 오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짓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는 말은 악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요,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는 것은 죄짓는 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죄의 상징, 온갖 악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악의 구렁텅이를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 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는 말은 예루살렘 도시가 온갖 악으로 가득차 있음을 말한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방탕과 악의 소굴로 포위되어 있으면 곧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빨리 그곳을 즉 죄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빨리 나와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못하는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왜그런가?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임신한 여자들이란 마치 여인이 아이를 임신한 것처럼 죄로 가득찬 사람들 즉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가리키며,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이란 여인이 젖먹이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데리고 다녀야 하듯이 그렇게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 도저히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옛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살기 위해 옛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복음의 말씀을 살아야할 때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11.27
448 100%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 곧 종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있을 무시무시한 표징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이는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를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1월 29일
  | 11.29
448 100%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

이렇게 가까이 온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올 것은 오고야맙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은총의 시간입니다. 위기가 은총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은총 안에 있습니다. 무너져야 제대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수록 빛나는 속량의 기쁨입니다. 이 모든 시간이 은총의 시간임을 믿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은총이 됩니다.

구원의 여정 안에서 맛보게 되는 우리의 속량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무너짐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를 향한 속량이 시작되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11월 29일
  | 11.29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506   [수도회] 마음의 세계  [3] 1690
1505   [수원/서울] 마지막 날  [2] 1718
1504   [부산/인천] "늘 깨어 기도하여라"  [4] 1855
1503   (녹)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 [깨어 기도하라]  [1] 1496
1502   [인천/수원/서울] 주님의 작은 스파크  [2] 1732
1501   [수도회] 기다림의 행복  1798
1500   [부산/전주/마산/대전/대구] 오늘의 거울 속에 내일이 보인다.  [7] 2144
1499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내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1591
1498   [인천/수원/서울] 내가 받았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6] 1867
  [수도회] 알아들어야 할 진실  [8] 1735
1496   [부산/마산/청주] 예루살렘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  [7] 1974
1495   (녹)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예루살렘 파괴]  1707
1494   [부산/전주/마산/의정부/대구] 일상(日常) 속에서의 최후  [7] 1777
1493   [수도회] 일상 안의 박해  [3] 1609
1492   [인천/수원/서울] 미래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입니다  [5] 1701
1491   (녹)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내 이름 때문에 미움을]  [1] 1581
1490   [부산/마산/의정부]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4] 1728
1489   [수도회] 파멸의 때 우리는  [3] 1725
1488   [인천/수원] 생각의 전환  [4] 1596
1487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세상의 종말-징조]  [1] 1510
1 [2][3][4][5][6][7][8][9][10]..[76]  다음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