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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수원/서울] 내가 받았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조회수 | 1,867
작성일 | 08.11.27
프랑스의 여류 작가 ‘골래뜨’는 자신의 생애를 담은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보던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을 보니 무척 행복해 보이는군요.”

이에 골래뜨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그때는 그것을 몰랐을까요? 참 애석한 일이예요.”

향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향수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좋은 냄새 가운데에서 생활했고, 자신의 몸에서도 그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시절을 행복한 줄 모르며 살고 있으며,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면서 삽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요.

“태양과 물과 공기는 인간이 그 가치를 모른다. 단, 그것들이 없어져봐야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이 없어지는 순간 인간은 생존할 수 없고 결국 영원히 가치를 모른 채 살다 죽어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으면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결국 후회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후회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과거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대신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욱 더 최선을 다해 생활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가 되지요. 그리고 그때 백만 명 이상이 적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며, 9천 7백 명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던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든 지키려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로움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더군다나 하느님의 집인 만큼 하느님께서는 이 집을 적군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피하라고 하시지요. 즉, 미련을 갖지 말고 끊을 것은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러다보니 지금이라는 현재에 내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지 못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또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간직하는 것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종말에 대한 준비이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인 것입니다.

내가 받았지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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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사실 저는 이 당시에 모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술, 담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유흥가로 놀러다는 것이 가장 저에게 중요했습니다. 공부도 그리고 성당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모습을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즐겨합니다. 보통 일주일에 2~3권 정도는 읽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는 습관을 거의 20년 이상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책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하고 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등학교 때에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 읽는 습관을 떠올려보니,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오랜 기간을 저와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단 기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힘들다고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한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 주님으로 나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간직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 세상 것들이 좋다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이 세상 것들 없이는 못살겠다면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을 첫째 자리에 놓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오래 갈까요? 과연 내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끔찍한 사건이고, 상상도 하기 싫은 세상 종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역시 전혀 다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꺼리는 세상 종말이지만 오히려 구원의 시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기다려야 할 시간은 세상 사람들이 피하는 세상 종말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순간에 내가 두어야 할 시선의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요? 바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어야 구원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릴 때, 시험 성적표를 받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 저리 주위를 배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어머니는 너무도 무서운 어머니였지요. 하지만 제가 성적이라도 잘 받으면 주위를 배회하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지요. 그때의 어머니는 정말 사랑스런 어머니입니다. 종말에 만나게 되는 주님도 나의 준비 정도에 따라서 무서운 주님으로, 혹은 사랑의 주님으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멀리하면서 과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내 삶을 뒤돌아보는 하루 보내세요.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세요.

조명연 신부
  |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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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루살렘 파멸에 대한 예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무서운 파멸을 예언하시면서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명하셨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이 처음 하신 것은 아니고 그보다 500년 전에 다니엘 예언자도 말했음을 다니엘 12,11 이하에서 볼 수 있다. 정기 제사가 폐지되고 파괴자의 우상이 선 다음...끝이 온다는 것이다. 다니엘의 이와 같은 예언은 기원전 170년경에 들어맞았다.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사람들은 잡혀가고 유대교를 전멸시키기 위해 그리스인들이 섬기는 헬라 종교와 헬라 관습을 정착시키려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음 성전 뜰에다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의 제단을 쌓고 그 제단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죄악시하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들의 방과 성전 안의 작은 방들을 창녀들의 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 하신다. 200년 전에는 그래도 마카베오 형제가 일어나 그들을 구해주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구원해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포위되면, 산으로 도망하고 성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 등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예언은 기원 후 70년에 로마 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오히려 유대인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참상이 더 컸었다. 로마의 공격과 무서운 굶주림으로 더 컸었다.

사망이 11만 명이고 포로가 9만 7천 명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기근이 널리 확대되어 모든 집과 식구들에게 덮쳤다.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다. 이들을 땅에 묻으려 해도 병자에게는 힘이 없고, 튼튼한 사람들은 시체가 너무 많아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들 역시 죽을지 몰랐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을 앞에 놓고 사람들은 먼저 죽은 사람들을 보고 울 눈물도 없고 할말도 없었다. 깊은 침묵 죽음의 밤이 그 도성을 덮어씌우고 있었다. 로마 군인이 집들을 약탈하기 위하여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전 가족이 다 죽어있고 다락에는 죽은 시체가 가득 차 있는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떤 물건에도 손을 대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경고가 바로 그러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인간은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바로 그러한 파멸을 당하리라는 것이다. 그토록 사랑을 받고 은총을 받았던 예루살렘도 하느님을 외면하였을 때, 그토록 무서운 벌을 받았다면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가 문제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같이 멸망한다는 말씀 잘 생각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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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종말의 참된 의미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무서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논리에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두려운 감정에 이끌려 그들의 말에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합리화하는 그들의 세계에 빠져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의외로 똑똑하다고 불리는 사람들과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약하고 두렵게 만드는 말이 종말입니다. 하지만 종말의 다른 표현은 하느님의 재림이며,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 가운데 오시어 그분의 정의대로 선과 악을 구분해주신다는 의미이며,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서막입니다.

그렇기에 종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에 맞게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 더 행복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수원교구 이승준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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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상의 멸망에 대한 예언

오늘 복음[루카 21:20-24]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무서운 파멸을 예언하시며, 당신이 이르시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명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이같은 파멸의 예언은 예수님이 처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보다 앞서 500년전 이미 다니엘 예언자도 이미 말했음을 다니엘서 12장 11절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멸망의 가증스러운 것이 성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와 같은 예언은 기원전 170년 경에 들어맞았습니다. 즉,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사람들은 잡혀가고 유대교를 전멸시키기 위해서 그리스인들이 섬기는 헬라 종교와 헬라 관습을 정착시켰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다음 성전 뜰에다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의 제단을 세우고, 그 제단에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며 죄악시하는 돼지를 잡아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들의 방과 성전 안의 작은 방들은 창녀들의 방으로 바꿔졌다. 이것은 유대교를 전멸하여 흔적도 없이 없애려고 고의적으로 행해졌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예언하신 말씀도 ‘200년 전 (170+30)이었던 바로 그와 같은 멸망이 예루살렘 안에서 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200년 전에는 그래도 유다, 마카베오 형제가 일어나서 그들을 구해주었으나, 이번에는 어느 한사람도 구원해 줄 자도, 성전을 정결케 할 자도 없고 완전히 파멸한다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포위 기간이 단축되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고, 그렇게 포위되면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을까도 미리 알려 주셨다. 즉, 산으로 도망하고, 성안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 등을 ....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두번째 예언인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원전 70년에 그들이 로마 군대에 의해 무참히 당했을 때 유대인들은 오히려 방방곡곡에서 성 안으로 몰려들어 혹독한 포위 공격과 무서운 굶주림으로 멸망의 참혹상이 더 크게 되었는데, 사망한 자가 11만명이고 포로는 9만 7천명에 이르렀다고 역사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참상을 당시의 인물이며 유대 역사가인 요셉푸스가 적은 기록에 의하면, "기근이 널리 확대되어 모든 집과 식구들에게 덮쳤다.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메 다가 쓰러졌다. 이들은 땅에 묻으려 해도 병자에게는 힘이 없고, 튼튼한 사람들은 시체가 너무 많아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들 역시 언제 죽을지 몰랐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되풀이 되는 전쟁이 인간의 무모한 교만과 보복, 그리고 이기심에 의해 인간의 존엄이 말살되는 비극을 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모두 세상에 평화가 오도록 서로 이해와 양보, 협력,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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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각종 정보를 얻고 있지만, 스마트폰이 그렇게 많이 보급되기 전인 2006년에 많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메시지가 발송된 적이 있습니다.

“저 민정인데요. 예전에 통화한... 잘 모르시겠어요? 그러면 사진 한 장 보내드릴까요?”

이 메시지에 자그마치 40만 명이 확인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 확인 버튼을 누르면 갑자기 이상한 사진이 뜨지요.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취소 버튼을 눌렀습니다. 하지만 한 ef 뒤에 휴대전화 청구서에는 정보 이용료 2,990원이 결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3,000원 미만 소액 결제의 경우 인정 번호가 필요 없다는 허점을 이용한 범죄였습니다. 아무튼 이 문자 메시지 하나로 10억 원이 넘는 거금을 챙겼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이야 보안이 많이 강화되어서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없고, 또한 워낙 인터넷 사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어서 쓸데없이 남 좋은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면 이러한 사기에 쉽게 휘말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앎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알아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알아야 실수를 반복해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지례짐작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에 가짜 뉴스가 문제라고 하지요. 정확하게 검증되지 않은 뉴스를 진짜 뉴스로 생각하면서 또 다른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맞춰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입장에 어긋나면 쉽게 주님을 부정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함락되어 완전히 망하지요. 이제 자기 삶의 터전인 이스라엘을 벗어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벌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신 것인가요? 고생과 시련 속에서 힘들게 살라는 것인가요?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더 주님 앞에 나아가는 힘을 얻으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도시가 멸망하고 무너지는 것이 종말이 아닙니다. 개인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앎이 중요합니다. 이 앎을 통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지금 내 자신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아는 만큼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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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29일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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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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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 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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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8년 11월 29일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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