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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주/마산/대전/대구] 오늘의 거울 속에 내일이 보인다.
조회수 | 2,113
작성일 | 08.11.28
매일 거의 비슷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이 전혀 다른 하루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어제의 결과요, 내일은 오늘의 투영(投影)이다.”고 말한다. 내일이 오늘의 투영이라는 말은 ‘오늘이 내일을 미리 비춰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① 하나는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오늘이라는 시점에서 계획하여 추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D-Day’를 정하거나, 정해진 ‘D-Day’에 맞추어 준비하며 사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다’는 단언(斷言)은 유효하다. 시험을 치루기 위해 시험날짜에 맞추어 공부하거나,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공부를 한다거나, 결혼식이나 잔치 등을 준비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통상 준비한 만큼의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가 주어진다. ② 다른 하나는 스스로가 계획한 적이 없는 예상치 않은 일에 벌어짐으로써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경우이다. 뜻밖의 사고를 당하거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성공이나 실패, 또는 선택이나 거부 따위의 단어는 설자리가 없다. 여기에는 불응(不應)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말없이 따라야 하는 순응(順應)만 있을 뿐이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내일이 들이닥쳐, 이를 선택, 혹은 거부하거나, 이에 불응할 수 없고, 순응해야만 한다면, 그런 내일을 오늘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고, 또 대비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현명한 일이다. 세상의 종말이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가 계획하지 않았으면 네가 계획한 것이고, 네가 하지 않았으면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다. 자연의 섭리도 그렇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기 마련이다.(30절) 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성서적 언어에서 여름이란 곧 열매를 맺는 때를 말하며, 이는 곧 수확이 멀지 않았음을 뜻한다. 수확의 때는 바로 심판의 시기를 의미한다. 성도 예루살렘의 멸망도 하나의 심판이었으며, 계획된 하느님 왕권의 계시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정확한 세상종말의 때를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으시다. 그러나 봄 안에 여름이 포함되어,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자연의 섭리와 같이 오늘 안에 이미 내일이 포함되어, 종말의 내일은 분명히 온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은 종말을 맞이해야 할 만큼 익었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 비리와 부정부패, 매관매직과 청탁과 향응, 황금만능주의와 한탕주의, 자연파괴와 인명경시풍조,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天災地變)과 인재(人災) 등이 세상종말의 징조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이런 모습을 관상(觀想)하면서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세상과 거래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몸을 사리고 엎드리며 피하여 숨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럴 때일수록 “몸을 세우고 머리를 들라.”(루가 21,28)고 말씀하신다. 몸을 세우고 머리를 드는 것은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남아 있을 주님의 말씀(33절)을 따라 사는 것이다. 내 발의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신(시편 119,105)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옳게 사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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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부는 차가운 바람이 겨울의 문턱에 온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과 앙상해진 나뭇가지를 보면서 죽음과 이별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인생의 무상함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런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서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이제 내일 저녁부터는 대림주간이 시작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맞게 됩니다. 연중 마지막 시기에 계속 봉독되었던 종말에 관한 성서 말씀은 대림과 새로운 한 해라는 빛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간에 계속 들었던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루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다 되었음을 아시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입성 뒤에 하신 가르침들은 바로 그분의 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으시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의 가르침들을 집약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그냥 죽으시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을 그렇게 집약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부활하리라는 것을, 죽음과 죄의 굴레를 쳐부수고 마침내 승리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확신하셨기에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삶의 원칙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거나, 변화와 혼돈의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하는 것 속에서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을 붙잡고, 거기에만 매달린다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변하지 않고, 우리가 매달릴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어두움과 혼돈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잡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잡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알기에, 그곳은 적어도 세속의 판단기준이 판을 치는 곳이 아님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허리끈을 단단히 조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품고 살아갈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변화지 않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새 하늘 새 땅을 희망하며 다가오는 대림 시기를 기쁘게 맞이합시다. 아멘.

이재원 다미아노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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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유효하다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와 있다. 계절이 때맞춰 오듯 어김없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은 음악회가 열리는 극장에 앉아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무대에는 육중한 커튼이 드리워져 청중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청중석에서 자리를 찾고 프로그램을 뒤적이는 무질서와 소란함이 가라앉으면서 신선한 긴장과 흥분이 무대를 향해 쏠린다.

무대 가까운 쪽에 앉는다면 커튼 밑을 살짝 젖혀보고 싶은 유혹이 들게끔 그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연주자와 스태프의 발걸음도 보이고, 악기의 음을 고르며 일으키는 불협화음도 귀를 자극한다. 그 소리는 다가올 음악의 향연을 기대하는 마음을 더욱 벅차게 부풀리는 매력이 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불이 꺼지며 장막이 걷힌다.

숨겨졌던 오케스트라가 흐트러짐 없는 정물처럼 반짝이는 악기와 함께 정돈된 모습을 무대 위에 드러낸다. 연미복을 입은 지휘자가 걸어 나오면 청중은 일제히 우레와 같은 박수를 터뜨린다. 단상에 올라 오케스트라를 향한 지휘자의 손에 들려 있는 지휘봉 끝이 서서히 올라와 허공에 멈춘다. 모두 숨을 죽여 지켜보는 정적이 절정에 도달한 순간 지휘봉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청중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격의 탄성에 오케스트라는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음악으로 화답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정하신 일들을 미리 알아내고 비밀을 캐고 싶어 씨름을 거듭한다. 유전자를 연구하고 생명체를 복제하는가 하면 고성능 망원경을 인공위성에 실어 올린다. 아득히 먼 우주 끝에서 천체가 영롱한 빛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하늘의 비밀을 엿본 흥분으로 위대한 인간 능력이 이룰 끝없는 성취를 확신하며 자만한다. 하지만 그런들 하느님의 때를 조금도 앞당길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셨다. 하늘과 땅은 서로 동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창조주의 말씀이 낳은 뜻에 따라 함께 관계 맺는 동반과 협력의 현장이다.

하늘의 뜻은 곧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당장 끝장날 듯한 재앙에 휘둘리더라도 구원의 약속은 말씀이 영원한 만큼 언제나 유효하다.

구원의 때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 지나갈 테니 어떤 경우에도 절망해선 안 된다. 잎이 돋으면 열매 맺을 것을 알아차리듯 시작을 보았으면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이 반드시 우리에게 미치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커튼 뒤에 가려진 오케스트라를 정해진 시간이 오기 전에는 볼 수 없지만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부단한 준비가 진행됨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사인이 움직이고 있다. 간절한 기대에 응답하는 나팔이 곧 우리에게 울릴 것이다.

▮ 원영배(미국 로스앤젤레스 대교구 종신부제)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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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행위로 심판하시는 하느님

요한은 한 천사가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다. 천사는 하느님께 대항하며 하느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용을 잡아 깊은 구렁에 던져 가두어 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탄이 잠시 동안 풀려나는데, 이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 주님께 충성한 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을 다스린다. 이들은 모두가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권을 가지고 천년 동안 통치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크고 흰 옥좌에 앉으셔서 당신의 권능과 영광, 거룩하심 및 위엄을 드러내신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어 타락하고 썩은 하늘과 땅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 하느님을 대적하여 죽은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다. 이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첫째 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다니 7,10)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 둘째 책은 생명의 책인데, 하느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으로(출애 32,32-33; 다니 12,1; 루가 10,20)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께 충성한 자들만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심판을 받기 위해 바다와 죽음과 지옥이 죽은 자들을 토해 낸다. 여기서 바다는 시체를 버리는 곳이며, 죽음이란 악을 상징하고, 지옥이란 의롭지 못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루가 16,23)으로 무덤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토해진 악한 자들은 부활하여 자신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그 후 죽음과 지옥도 유황 불바다에 던져지는데, 이것이 둘째 죽음이다. 둘째 죽음은 곧 악한 자들이 당하는 죽음이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적대시하며 짐승을 경배한 악한 자들은 사탄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처럼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그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된다. 이는 기존의 하늘땅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그분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다(3절; 2베드 3,13). 또한 거룩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새 예루살렘은 죄와 죽음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의 거처이다.

요한은 환상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은 영원히 멸망하고, 주님께 충성을 다한 자들은 영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 행위를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0-21)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할지라도 악을 일삼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마태 25,45) 하고 말씀하셨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듯이(마태 12,33) 사람은 그의 모든 것이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행위를 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믿음도 그의 행위로서 드러난다. 믿음과 행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행위를 가져온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다.”(야고 2,26) 믿음과 삶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참된 믿음은 사랑의 행위로서 표현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구원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움으로써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하자.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이 흘러들어오고,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자. 우리의 믿음이 삶으로서 드러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자.

▮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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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무화과 잎과 하늘나라(天國)

지금 창밖을 내다보시겠습니까? 무엇이 보입니까? 초겨울의 푸른 하늘이 보입니까? 푸른 하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입니까? 그 속에 하늘나라(天國)도 보입니까? 텅 빈 하늘이 온 우주를 감싸고 비어있기에 충만한 하늘은 하느님의 품이자 하늘나라(天國)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나는 새들을 보고(마태 6,25) 그것들이 심거나 거두거나 하지 않아도 먹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들에 핀 나리꽃들을 보고(마태 6,28) 그것들을 솔로몬보다 더 아름답고 화사하게 입히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새록새록 피어나는 무화과나무의 새순에서도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은행잎에서도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일상(日常)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당신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깨친 눈으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이웃 안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는(마태25,40) 당신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시련과 고통, 십자가마저도 하느님의 손길임을 아는 당신은 그 안에서도 부활(復活)의 기쁨을 누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나는 당신은 하늘나라에 머물고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오늘도 하늘나라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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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세상 종말

오소서 성령님! 이번 주 내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 종말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종말이 올까요? 안 올까요? 오겠지요! 그럼 종말이 언제 올까요? 몰라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언제 올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오고 말, 종말의 때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 왔는지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만날 준비를 잘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나뭇잎을 떨구어 냅니다. 만일 나무가 여름 내내 자신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던 나뭇잎을 떨구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겨울 추위에 얼어 죽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나뭇잎을 떨어트리면서, 하느님께서 세워 놓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또한 하느님 만날 준비를 잘 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듯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날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하느님 만날 준비를 잘 해서, 벌이 아니라, 상을 받을 수 있는 기쁨의 날이 될 수 있도록 잘 해 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종말의 날은, 세상의 마지막 날임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세상 마지막 날>이라는 것은, 혼란하고, 무질서한 세상,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들의 마지막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셔서, 하느님의 뜻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의 질서를 올바로 다시 잡아 주시고,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하느님 뜻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 날>을 향해 사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 만날 준비를 잘 하고 있다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에게 다가올 종말을 위해서, 하느님에게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하느님 나라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겠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 대전교구 김종민 세례자 요한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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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이 돋으면

어느 봄날,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침엽수 세 그루와 이름 모를 활엽수 한 그루만이 덩그렇게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뒷마당의 잔디는 관리를 하지 않아서 가을 잔디처럼 누런 빛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바라보던 남편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저 옆집 잔디 좀 봐. 정말 파랗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더니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기 시작했다. 비료를 사다 뿌리고 잔디가 패어 나간 곳에는 씨를 심었다. 1주일쯤 지났을까? 잔디들이 파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젠 앞마당의 활엽수도 제법 그늘을 드리워서 화분 분갈이를 하거나 꽃모종을 할 때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무화과는 말 그대로 하면 꽃이 없는 나무지만 꽃이 가려져 있을 뿐이지 사실 인류가 재배해 온 가장 오래된 과일나무 중 하나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난 후에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 무화과나무 잎이었다(창세 3,7). 나무에 잎이 돋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와 봉사의 잎으로 무성해지면 우리의 믿음도 여름처럼 뜨거워질까?

이곳 캘거리는 유난히 겨울이 길다. 기나긴 겨울을 보낸 탓일까? 봄이 오면 집집마다 정원을 손질하는 손길이 무척 바쁘다. 동네마다 가장 예쁘게 꾸민 정원을 뽑아서 상을 주는 행사도 있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그 집 주인이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사계절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상태를 보면서 신앙을 점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나무에 물을 주듯이 기도생활을 좀더 열심히 해야지.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더 많이 방문해야지’ 결심은 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어제는 작은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한국 친구들끼리 모여 꽃다발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날 딸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 내 마음에 찍혀 눈물짓게 했다. 그 친구의 엄마는 한국에서 이민 올 때 근육암 수술을 받았는데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암이 재발했다. 앙상하게 마른 손과 발, 힘없이 웃으며 서 있던 모습! 야채전을 좋아하는 그 자매를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 신금재 (캐나다 캘거리 성 안나 한인 천주교회)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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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책 중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루게릭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죽어가는 노 스승과 미치라는 젊고 유능하지만 일상에 지친 한 제자가 만나 서너 달 동안 매주 화요일에 인생을 주제로 가진 수업의 내용을 적어놓은 글이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 자네는 아나? 난 질식해서 죽을 거야. 그래. 천식 때문에, 폐가 이 병을 제대로 견뎌낼 수 없거든. 이 루게릭병이란 놈이 몸 위로 차츰차츰 올라오고 있어. 이미 다리는 다 잡아먹었고. 이제 곧 팔과 손에도 올라올 거야. 그게 폐까지 올라오면... 난 끝이야.”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징조들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잘 받아들이는 그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미치라는 제자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쁘게만 흘러오던 자신의 삶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가는 스승의 모습에서 의문과 충격을 느끼게 되고,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를 이 만남이 매주 화요일의 만남과 수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에는 시한부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들 모두가 이 책에 나오는 모리처럼 죽음을 잘 준비하고 내 삶을 잘 돌아보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내가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왜 인간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떤 분들은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라고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오늘 암 선고를 받고 내일까지밖에 못산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래서 죽음이 실감이 나고,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러한 준비를 잘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징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봄이 지나가고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듯이 너희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러한 일들이란 그전까지 이야기되었던 종말에 관한 징조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리라는 것을 알아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종말이 끝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임을 알아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도 알고, 또 이 세상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앎 뒤에는 그로인해 모든 것이 끝나버리지는 않을지, 그 끝남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애써 외면하고 그 죽음을 준비하거나 대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 그분과 함께하는 나라에 대한 믿음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죽음과 종말은 공포와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과 기다림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 나는 정말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보는 오늘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박재철(안토니오)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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