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평일강론 (짝수해)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23 99.2%
[청주/전주/광주/부산] 아기의 이름은 요한
조회수 | 687
작성일 | 15.12.20
[청주] 아기의 이름은 요한

----------------------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에게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요한의 이름은“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에 이름은 단순히 누군가를 부르는 데 쓰였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요한은 분명 하느님의 은혜 속에 태어났으니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였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였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요한은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남달랐습니다.

즈카르야는 조상들이 준 이름대신‘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 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5년 12월 23일
523 99.2%
[전주] 아름다운 조연

-------------------------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작자들이 그 영화의 핵심을 위해서 잔가지들을 쳐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구성하면서 미모 있는 영화배우를 쓰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큐멘터리 내용 자체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연이 돋보여야 하는 영화에 나오는 조연들은, 그 부인으로 등장하건 친구로 등장하건 하나같이 외모로 보나 설정 자체로 보나 주연보다는 못한 인물로 설정됩니다. 그래야만 영화의 내용에 초점을 맞출 수 있고, 의도한 바에 틀어지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삶은 다릅니다. 초라하게 보이는 조연이라도 그 안에 주연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담겨져 있을 수 있고, 주연을 보좌하지만 결코 이류나 삼류로 여겨지지 않게 존재의 의미를 소중히 일구어 내는 삶이 있습니다. 이류와 삼류의 인생 역시도 늘 ‘가장 소중한 것’으로 기억되는 하느님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이다’라는 모순된 최상급을 적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가 최고였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이미 하느님이 알아봐 주시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를 가지는 아름다운 조연인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름다운 조연이 됩시다.

-------------------------

전주교구 박동진 신부
  | 12.22
523 99.2%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은퇴 후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는 어느 유명한 학자는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길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름을 남겨야겠다는 욕망이 인간의 삶을 그르치는 원인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묵상해 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핏줄의 인연을 끊음’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을 때 이웃과 친척들은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천사가 알려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요한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한평생 핏줄의 품을 떠나 ‘주님의 손길’ 속에서 자라고 ‘주님을 찾는 이’(루카 7,18-­19 참조)로 머물렀던 사람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름 요한은 세상에 속해 있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름입니다.

요한, 그 이름은 ‘광야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는 소리입니다.(루카 3,4-­6) 요한은 황량한 광야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구원을 알리는 소리가 되어 따뜻함을 전해줍니다. 하느님의 온기가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66 참조) 그분의 소리는 과연 광야의 냉혹함을 깨고 흐르는 따뜻한 기운이었습니다. 그분의 소리는 예언적이었지만 자비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완고한 소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요한, 그 이름은 ‘주님의 뒤로 물러남’ 혹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끝자리를 마다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메시지입니다.(마르코 1,7;마태오 3,14 참조) 그의 이름은 자기 과시와 자기 도취에 곧잘 빠지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요한, 그의 이름은 다만 주님의 길을 닦는 소박한 일꾼으로 살다가 마침내 죽어 흔적 없이 사라진 이의 이름입니다. 요한이 죽은 뒤에 남긴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

광주대교구 김정용 신부
  | 12.22
523 99.2%
[부산]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

얼마 전 초등학생들에게 ‘성탄절은 우리에게 누가 오는 날일까요?’ 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그중 몇몇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상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에 큰 선물 주머니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어쩌면 학생들에겐 더 친근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탄절’ 하면 산타크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또 연말연시의 분위기에 젖어 성탄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성당에 꾸며진 구유 안에서 태어나셔서 성당에만 계시는 분이고, 성당을 벗어나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와있는 뭔가 의미가 달라진 듯한 성탄절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림 제4주간에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들 중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인데,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말을 못하게 된 즈카르야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정했을 때 그의 입이 풀렸고, 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있었던 요한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복음에 나오는 그의 설교와 삶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구세주 오심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 40장에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라는 내용처럼 요한은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소리로서 하느님께서는 꼭 오시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참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선포한 예언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루카 3장 7절의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을 향한 회개와 온전한 투신을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며,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합니다.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투신하고 절제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온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합당한 준비를 하라고 촉구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그는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6-28)라고 칭찬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시고, 가련한 이들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며, 그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십니다. 또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요한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진리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도 노력하고 기도합시다. 주님 성탄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요한의 삶을 본받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

부산교구 최재현 베드로 신부
  | 12.22
523 99.2%
세례자 요한의 출생

------------------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루카 1,57-63).”

---------------------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표징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으면서도
아직 ‘이웃과 친척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의 이름 때문에 생긴 논쟁은 ‘믿음’과 ‘무지’의 충돌입니다.
(‘믿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의 충돌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라는 말은,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고
생각했지만, 만일에 그들이 ‘메시아 강생 소식’을 알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그들 자신들에게(우리 모두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것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는 “그를 축하했다.”입니다.
‘메시아 강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요한의 출생은 ‘남의 일’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이 아기의 이름을 지으려고 한 것은, 아버지 즈카르야가
의사 표현 자체를 못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권리 행사를 못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친척들이 즈카르야 대신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으려고 했을까?
당시의 관습이 그래서 그랬다고 해석하긴 하는데,
그 관습은 널리 통용되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지은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따라야 할 ‘사회 규범’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아기 이름에 관한 논쟁은, 즈카르야가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상황 설정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기 어머니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은,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을 전해 들었고,
그 말을 믿고 있었음을(‘확신’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일은,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기쁜 소식’을 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일은, 참되게 믿는 사람만이 ‘기쁜 소식’을
전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것은
‘믿음을 실행한 일’입니다.
아마도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게 되는 순간부터 천사의 말을 믿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단계였을 뿐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것은
그가 믿음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단계로 들어섰음을 나타냅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참된 신앙인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믿는 대로 살고, 믿는 대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마태 7,21).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다가 다시 할 수 있게 된 일을, 나중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되어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고,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리’입니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4-66).”

--------------

즈카르야가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을 때 첫 번째로 한 말은
‘하느님 찬미’입니다.
뒤의 68절-79절에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가 그 찬미일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그는 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루카 1,76-77).”

이 말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예언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메시아께서 하시게 될 일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메시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시게 된다는 것이 예언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이 말도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을 알아들은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아마도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라는 말은,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 말입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을 알아들은 사람이라면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나를)
보살피고 계신다.”라고 믿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신앙인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고 언제나 항상,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생활이고, 나의 삶입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2월 23일
  | 12.22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594   [수도회] 구원의 빛  [4] 480
1593   [부산/전주/광주/청주] 돌아봄의 눈은  [4] 579
1592   [수원/원주/대전]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3] 78
1591   [인천/서울]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  [5] 509
1590   (백)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독서와 복음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  [8] 2262
1589   [수도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77
1588   [광주/부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1] 550
1587   [수원]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65
1586   [인천/서울]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2] 686
1585   (자) 대림 12월 24일 독서와 복음 (즈카르야의 노래)  [8] 2214
1584   [수도회]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  [3] 549
  [청주/전주/광주/부산] 아기의 이름은 요한  [4] 687
1582   [의정부/대전/수원] 그리스도인의 현실  [3] 68
1581   [서울/인천] 이제 곧 성탄입니다  [4] 685
1580   (자) 대림 12월 23일 독서와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지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  [6] 2500
1579   [수도회]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8] 126
1578   [광주/전주/부산/청주] 마리아의 노래가 현대 여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4] 128
1577   [수원/의정부/대전]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3] 105
1576   [인천/서울] ‘성모찬송’(Magnificat : 찬미하다. 찬양하다)  [5] 126
1575   (자) 대림 12월 22일 독서와 복음 (마니피캇 ; 성모님의 노래)  [8] 149
1 [2][3][4][5][6][7][8][9][10]..[80]  다음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3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