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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
조회수 | 548
작성일 | 15.12.20
[수도회]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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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서로 하나 되려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같아야 합니다. 오늘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말 못하던 즈카르야와 일치한 것은 두 분이 하나 된 생각, 말, 행동에 따르는 자연적 결과입니다.

어떻게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서로의 생각을 대화를 통하여 일치되고 행동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는 길이 서로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 가는 방향이 다르기에 대화를 나누어도 언제나 불발 아니면 불완전한 결론과 행동의 불일치를 보게 됩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포를 쏘거나 뒤에서 음모를 꾸미면 생각이 같아질 수 없습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부부이면서 서로 불일치가 일어나고 계속 충돌을 하는 이유는 서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폐쇄적 선입관과 이기적 야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손해 보아도 해야 할 일을 하며 어떤 때 일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주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관심과 능력을 갖추고 너를 대하고 사랑하는데 체면도 버리고 시기심 질투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도 언제나 주님 안에 하나 되기 위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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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빛이 빛을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알게 됩니다. 탄생이 있기까지는 탄생에 따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통과 탄생은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게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가장 가까운 관계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을 때 주님의 뜻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자신의 길을 세자 요한처럼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우리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탄생은 얼마나 풍요로운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자신의 탄생과 삶에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우리 모두를 돌보고 계시듯 우리 모두는 사랑하기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감히 줄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서 오늘도주시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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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 있는 삶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하는 삶 -

오늘 강론 주제는 ‘터무니 있는 삶’입니다. 도처에 널려있는 터무니 없는 삶입니다. 터무니 없다는 말의 뜻은 도저히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터무니 있는 삶은 각자의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할 때의 조화롭고 균형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을 말합니다. 각자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할 때는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선물’이 되지만 제자리를 떠나 떠돌때는 자기에게나 이웃에게나 ‘짐’이 됩니다. 얼마전 읽은 터무니와 관련된 컬럼을 소개합니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시라. 그 지도 속 우리의 땅은 산과 계곡이 분명하며 물길과 양지바른 터들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 곳이다. 이 터에 새겨진 무늬가 바로 터무니이니 이 단어는 우리의 존재와 이유가 모두 터에 있다고 믿은 우리 선조들의 관념어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서양화가 근대화인 줄 착각하며 서양식 도시를 흉내 내고자 서양에서 폐기된 마스터플랜을 가져와 우리 땅에 앉혔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 땅에 평지는 귀한 경작지이므로 산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신도시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이 있으면 깎고 계곡은 메워야 하며 물길은 돌려야 했다.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키며 신기루 같은 신도시가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모두가 터에 새겨진 무늬를 깡그리 지운 결과여서 이른바 터무니없는 도시였다. 특히 아파트가 그러했다. 지형을 바꾸면서 지은 집들이니 터무니없는 집이며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게 말장난일 뿐일까.-

‘정주하지 못할 때는 존재하지 못한다’라는 하이데거 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구체적 터무니 있는 땅에서의 정주의 삶이,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서원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습니다. 예전 농경시대에는 참 아기자기한 조화의 터무니 있는 땅에서의 정주의 삶이 었는데 요즘은 많은 이들이 터무니 없는 땅에 터무니 없는 삶이라는 존재상실의 삶을 살아갑니다.

지형상의 터무니는 잃었어도 삶의 터무니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괴테의 말이 생각납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참으로 공감하는 말입니다. 한계를 벗어남이 자유인 듯 하지만 결국은 자기존재의 상실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하여 주어진 또는 선택한 한계안에서 한계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수행의 요체입니다. 우리 삶의 일과표가 하루 삶의 한계를 말해주며 이런 한계들은 삶의 터무니를 이룹니다. 바로 삶의 터무니 안에서의 제자리의 한계에 충실함이 바로 지혜로운 정주의 삶입니다.

이런 터무니-한계-제자리의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말라키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바로 말라기 예언에 근거하여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 예언자의 귀환으로 확신했습니다. 구약을 신약의 빛에서, 그리스도화하여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영적 삶의 터무니를 깨달아 살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요즘 말씀에 등장하는 모든 거룩한 조연들의 주님을 중심으로 한 터무니가 참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모두 각자의 제자리에서 제 몫에 충실합니다. 요한의 작명 과정도 신비롭습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터무니에 맞는 이름이 요한임을 계시받은 엘리사벳의 강력한 항의에 즉시 하느님 섭리의 터무니를 깨달은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씁니다. 순간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삶의 터무니가 회복되자 놀라운 기적의 발생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이들은 이 사건을 마음에 새기며 말합니다.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What then will this child be? -

말마디를 바꾸어 오늘의 나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대체 무엇이 되도록 불림 받았나? “What then am I called to be?”-

전체와 조화된 터무니 있는 제자리에서 제몫에 충실한 정주의 삶인가 묻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와 그의 아들 세례자 요한은 각자 제자리에서 제몫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터무니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삶의 터무니를 회복해 주고 각자 제자리에서 제몫의 삶을 충실히 살게 해 줍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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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되풀이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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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에 담긴 의미, 특히 성탄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고고 또 묵상해야겠습니다.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짧막한 예화 하나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하느님 육화강생의 신비, 예수님 성탄의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금술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큰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해도 왜 계속 그렇게 슬퍼하오?”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여보,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눈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당신이 나를 덜 사랑할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잠시 외출을 나간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내는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나도 당신과 같이 되었소. 나도 이제 외눈이라오.”

우리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예화입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수천 번 반복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탄에 아무리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내 영혼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하고도 장엄한 드라마인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눈여겨봐야 할 중요한 조연들로 엘리사벳, 그리고 즈카르야가 있습니다.

아들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메시지에 즈카르야는 살짝 의혹을 품었습니다.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지요. 즈카르야는 10달 동안이나 말 한 마디 못하는 언어장애자로 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심연의 침묵 속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베풀어주셨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고목(枯木)과도 같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였지만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새싹을 틔워내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당하고 부족한 자신들을 당신의 인류 구원사업의 중요한 도구로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의 입을 열어주시자 마자 그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운 좋게도 ‘침묵의 10개월’을 통해 그토록 고대했던 ‘구원’을 온몸으로 맛보았습니다.

강렬하고도 짜릿한 구원체험이 즈카르야의 내면 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은혜롭게도 이미 낡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암흑에서 빛으로 건너오는 파스카 체험을 맛 본 것입니다.

그 행복한 체험으로 인해 즈카르야 삶의 태도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어두웠던 그의 낯빛은 기쁨과 설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세월은 희망의 나날로 변화되었습니다. 우울하고 어두웠던 그의 일상은 화사한 봄날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체험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즈카르야가 맛본 구원 체험입니다. 파스카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선물로 주시는 보편적인 구원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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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2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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