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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조회수 | 685
작성일 | 15.12.20
[인천]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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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던 이 남자는 차마 이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얼굴만 바라보는 것으로도 만족을 하면서 가슴 속에 깊은 사랑을 키워왔습니다. 사실 이 여자는 멀리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벽 하나를 사이에 끼고 살고 있는 옆집의 아가씨였지만, 그는 사랑 고백을 하지 못하면서 가슴앓이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의 그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아가씨는 숨을 헐떡이고 있으며,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이 저렇게 부정한 사람이라니…….’

그리고 사랑에 배신당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습니다.

이 유서를 본 경찰은 옆집의 아가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지요. 하지만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주인에게 부탁해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도 독약을 먹고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청년이 들었던 그 소리는 독약으로 괴로워하는 아가씨의 신음과 몸부림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아가씨의 유서에는 홀로 있다는 외로움 때문에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벽으로 인해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인해서 남자 역시 커다란 오해를 간직한 채 자신의 생을 마감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언젠가 읽었던 단편소설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즉,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방해하는 미움과 오해를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 인간들 삶 안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즈카르야도 이러한 벽을 하나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이 요한의 잉태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그는 믿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의심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통해서 그 벽이 완전히 치워졌음을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 미움의 벽, 불신의 벽, 오해의 벽, 불의의 벽……. 그 벽들을 차례대로 허물어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 우리 곁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도움을 주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벽을 허무시기 위해서 2000년 전,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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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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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노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부른 찬미의 노래입니다. 평생 고대했던 아들을 얻은 즈카르야는 감격에 겨워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평생 그토록 애를 쓰고 밤낮으로 기도하고 희망했던 아들을 마침내 보게 된 즈카르야가 그 아들 얻은 것을 노래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게 되어 너무 좋다는 표현은 한 군데에도 나오지 않고 성령 안의 충만한 삶을 노래하면서 오직 주님의 섭리에 감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성경 저자도 즈카르야가 성령을 받아서 기쁨에 넘쳐 노래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고 성령의 삶을 살게 되면 평생 소원했던 아들을 얻게 되었다고 희희낙락하게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건강의 좋고 나쁨에 희희낙락하지 않을 뿐더러 나의 재물이 많고 적음에 별로 좌우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면 건강에 애착하게 되고 자식에 연연해하며 끊임없이 재물에 집착하게 됩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자기의 안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기쁨을 즈카르야처럼 힘차게 노래할 수 있게 되지요.

엘리사벳과 함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뽑힌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으나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천사의 예언을 믿지 못하다가 그만 벙어리가 되었고 그 아들의 할례 날,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감격에 겨운 즈카르야가 처음으로 소리내어 하게 된 말이 지금 우리가 들은 찬미가입니다.

성령을 가득히 받은 즈카르야의 예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루카1,68)

이 찬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인 68절에서 75절까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이제 이루어졌다는 것을 노래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감사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둘째 부분은 76절에서 79절까지로 불신과 믿음을 오가며 힘들게 얻은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구자가 되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소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루카1,76-78)

이렇게 즈카르야는 아들 요한의 미래에 대하여 아버지로서, 또 성령을 받은 예언자로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제 곧 태어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즈카르야의 입을 통해 모든 백성들이 듣게 됩니다. 이 메시아에 의한 구원과 그 성취에 대한 즈카르야의 노래를 우리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매일같이 성무일도 기도를 통해서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격에 겨운 노년을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모습을 성탄을 즈음하여 우리는 계속 듣게 됩니다. 이 복음 말씀들을 묵상하며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만약 즈카르야가 아들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되기를 꿈꾸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 지를 한번 생각해본 것입니다. 그 당시 분위기로 봐서 그것은 욕심낼 만한 일이었지요.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알고 열정적으로 추종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비해서 사람들의 인기나 그 영향력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즈카르야가 아들이 메시아가 되기를 희망하여 교육시키고 노력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 것이지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즈카르야도 세례자 요한도 불행해졌을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허덕이면서 결국에는 그 길이 바랄 수 없는 길이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탈렌트, 즉 구세주 길을 닦아야 될 사람이 구세주가 되려고 한다면 교만하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 있어서 요즈음 우리 신자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기 욕심대로 성장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무리입니다.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아이를 부모는 계속 공부하라고 밀어 부치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이에게 주신 탈렌트는 분명 다른 것인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부모는 자기들 뜻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지요. 아이는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행 청소년이 생기는 것입니다. 반발하고 뛰쳐나오는 수밖에 없지요. 집에서도 있을 수가 없고 학교에서도 마음 붙일 데가 없으니 길거리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지금 우리 자녀 교육의 현실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부모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이 자녀들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요즘 부모들은 공부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면제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의 예의마저도 면제해 주고, 부모 형제간의 관계마저도 공부 앞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예의를 지킬 줄도 모르고 희생은 더더군다나 생각지 못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교육은 내 욕심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자녀에게 어떤 탈렌트를 주셨는지 선별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이지요.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녀가 힘들어하고 좌절할 때 인생의 경험이 많은 선배로서 용기를 주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부모가 해야 할 교육입니다. 요즈음 괴상한 교육으로 괴상한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30년을 키웠는데 부모도 형제도 모르며, 인간의 기본 구실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의 안위만 우선으로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내 욕심이 있다고 해서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집을 뛰쳐나가는 등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른 교육은 하느님이 내 아이에게 어떤 탈렌트를 주셨는지 선별하여 잘 가꾸어 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 용기를 주고 격려하여 잘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감격해하며 인간적인 것을 떠나서 참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아들 요한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묵상하고 염려하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길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거듭 축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자녀 교육은 하느님을 알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올바른 교육으로 우리 자녀들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고,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사회는 편안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평생 소원이었던 아들을 얻었으면서도 인간적인 것을 떠나 하느님 중신의 자녀 교육의 모습을 보인 즈카르야를 우리는 묵상하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지나친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새롭게 자리 잡는 계기를 오늘 즈카르야의 찬미에서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미하여라,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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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산하 전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 네트워크(SDSN)에서는 매년 ‘세계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서 한국은 전체 149개국 중에서 59위를 차지했습니다. 1인당 GDP가 35,000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이지만 행복 순위는 한참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행복한 나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유사시에 기댈 누군가가 있다.’

자신이 겪은 사고나 트라우마를 겪으며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왜 내게 발생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를 부정적인 틀에 가둬둘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쉽게 바꿔서 행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질문의 초점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계속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나의 삶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도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는, 자신들은 나이가 많다며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문이 닫혀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했던 말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에서 벗어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왜’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어디에 맞춰져 있습니까? 이제는 ‘나’에서 ‘우리’를, ‘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나’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간다면, 주님의 뜻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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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2년 12월 24일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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