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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주/광주/청주] 돌아봄의 눈은
조회수 | 578
작성일 | 15.12.31
[부산] 돌아봄의 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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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몇 걸음 두지 않은 이 자리에서 살아온 뒷날을 돌아보는 눈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자기가 보아왔던 눈을 성찰이라는 살핌으로써 시선을 닦고 정화하며 마음을 올바른 계명에 두어 지나온 세월을 자비의 손에 맡겨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 데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고 정결예식을 합니다. 그 와중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2,30)

눈이 볼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까요? 인류와 한 개인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계곡에서 미움을 선택 했음에도 세상에는 사랑으로 실천했다는 숨은 생각과 미움으로 시작했지만 사랑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구절양장의 세월 속에서 한민족들의 빛이 되실 표징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보았음은 그가 인생살이에서 '무엇을' 이라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냐?가 뒷받침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보는 눈이 무엇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어도 그“때”(루카2,25)를 맞이하여 자기 눈을 씻을 준비로써 하늘에 들어 올려 온전히 맡기는 봉헌이 그에게는 “죽지 않으리라”(루카2,26)는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 보고 있는 이 눈에 하늘의 계명이 온전히 담겨져 있는가? 과연 지난 한해의 세월에 시간을 있게 한 창조주의 원 이유와 합일 할수 있는가? 는 보고 있는 이 눈으로 보는 이 눈동자를 볼 수 없듯이 우리 인간 피조물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돌아봄의 눈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비참함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원래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며 이 사랑으로 우리는 하늘이 나를 내심과 합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때를 알게 하여 과거를 다시 사랑으로 합일하게 합니다. 현재의 사랑은 과거를 씻어준다는 눈을 갖게 해줍니다. 때로는 자기를 돌아보는 공간에서 가슴이 칼에 찔리듯 아픈 회상이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서 용서해 달라는, 용서를 청하는 숨은 생각이 하늘의 빛을 통해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바라보는 시간에서 자와자찬하는 분수 넘음에 우쭐거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자기 안의 숨은 생각은 작은 생명의 시작을 하늘이, 그 어머니가 어떻게 다루는 지를 보게 해주어 원래의 뜻인 하늘의 계명에 맡기는 겸손함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의 육안이 있기 전에 심안이 있음을 배우는 시간을 이 시기에 발견 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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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갑조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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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기다림의 끝

‘기다림’은 이야기가 되었건 영화가 되었건, 또는 다른 그 무엇이 되었건 간에, 한 중간 정도에 자리하는 내용입니다. ‘기다림’의 끝이 허무하기도 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 기다려 본 사람은 결국 헛수고 했다고 하기도 하고, 과연 보람이 있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말썽을 피우고서 혼날 것을 기다리기도 하고, 열심히 수고하여 칭찬받을 것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는 돈 받을 것을 기다리고, 이주노동자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농부는 수확을 기다립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아직 알 수 없는 그 끝에 있는 절망과 희망을 향한 불안이자 설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안하고 절망적인 끝이라고 해서 기다리는 것을 접을 수 없고, 설레며 희망적인 마감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해서 기다리는 과정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시므온은 죽음에 거의 다다를 정도의 기다림 끝에 아기예수님을 만납니다. 영광된 끝이었으니 행복한 결말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장차 ‘반대자의 표적’이 될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예언합니다. 기껏 기다려온 분이고 드디어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덕담은커녕 어쩌면 악담으로 들릴 수 있을 말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기에 ‘기다림’은 설레입니다. ‘반대자의 숨은 생각’은 결국 부활이라는 으뜸가는 결말에 가서 ‘기다림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박동진 신부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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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들은 제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말은 초등학생 자폐아를 둔 어느 어머니의 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얼마 동안은 그 사실을 모르다가 나중에야 자폐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마다않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때때로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계속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오히려 아들을 통해 삶을 배우고 인생을 알게 됐다고 할 정도로 예전의 시각과는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이제 마음의 그늘이 아니라 삶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선물은 참으로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삶의 축복과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찮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조금이라도 고통이 따르게 되면 그것을 선물로 여기기는커녕 생각조차 하기 꺼려합니다. 그러나 세상엔 고통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마치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듯이 말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던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사랑(구원)과 고통, 생명(아기)과 죽음(십자가)을 동시에 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고난까지도 함께 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시므온의 심안을 꼭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적지 않은 본당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을 부활하신 예수님상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어둡고 우울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이미지가 신자들이 누려야 할 부활의 기쁨을 감소시킨다는 이유에서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부활의 영광과 기쁨의 원천이 바로 십자가로부터였다는 것을 영영 보지 못할까 봐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 광주대교구 김정용 신부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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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세상에 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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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한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기다림이 컸으니 그를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품에 안았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 끝들이(세상 구석구석)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 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 보면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9-1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빛이신 주님은 이웃사랑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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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22년 12월 29일
  |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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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온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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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루카 2,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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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성모 마리아에게 처음 알려 준 이는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를 만나고 계시를 들은 일은
성모 마리아 혼자만의 체험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계시가 그것으로 끝났다면,
마리아 혼자서 증언해야 하는, 무척 외롭고 힘든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을 통해서 그 계시가 진리이며,
마리아의 믿음과 응답이 옳은 일이었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뒤에는 목자들을 통해서, 또 동방 박사들과
시메온 예언자를 통해서 또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 과정은 ‘예수님의 복음’이 마리아 한 사람의 체험으로 시작되어서
여러 사람의 증언을 거쳐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확산된 과정입니다.
사적인 일에서 공적인 일로, 한 지역에서 온 세상으로......
그 일에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루카 12,3).” 라는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초대이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신앙인은 ‘듣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들은 것을 믿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 다음에,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와 목자들에게는 ‘천사’가 나타났고, 엘리사벳과 시메온의
경우에는 ‘성령의 힘’이 작용했는데,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천사가 나타났든지 성령의 힘이 작용했든지 간에
그 일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할 때,
천사가, 또는 성령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시메온의 입장에서는 평생 갈망하면서
기다리던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니,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 종교와 참 신앙을 찾아 헤매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시메온과 같은 심정이 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라는 말은,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이기도 하고, 감사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보다.’ 라는 말은 ‘구경하다.’가 아니라,
“나에게서 이루어지다.”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구경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고,
내가 구원에 참여하고, 내가 구원을 받아야만, 그것이 진짜 구원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라는 말은,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증언이기도 하고, 앞으로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이라는 말은, 루카복음에서는 처음 등장하는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말입니다.
<시메온은 ‘예언자’ 라고 공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고,
그의 예언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한 일입니다.
사적인 장소에서 개인적으로 전해지던 복음이
이제 공적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라는 말에서 ‘다른 민족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즉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계시의 빛’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으로
해석됩니다(요한 1,4).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고, 앞장서 가시면서 우리를
데려가시고, 우리가 그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인데,
‘걸어가는 일’ 자체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감사드리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도 사도들도 성모님도 모두
유대인들이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한 민족을 증오하고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놀랐다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세주”라는 말에 놀란 것으로 해석됩니다.

34절-35절에 있는 시메온의 예언은, 예수님과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실 일의 결과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자들’은 결국 ‘박해자들’이 될 텐데, 그들 때문에 성모님도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고통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희생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난다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을 못 받을 사람이 드러난다는 뜻인데,
심판보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과 성모님의 희생 덕분에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는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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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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