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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
조회수 | 508
작성일 | 15.12.31
[인천]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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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교구청에서 근무했을 때의 일이 하나 떠올려 집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나와 역전에 있는 서점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점으로 가던 중에 제가 잘 아는 청년 하나를 만났어요.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계속해서 시계만을 바라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 기다리니?”하면서 물었지요. 그러자 그 청년은 “네, 애인을 기다려요. 그런데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나오네요. 전화도 안 받고요. 사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30분밖에 안 기다렸는데,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봐 걱정되네요.” 라고 답변을 하더군요. 저는 “금방 오겠지 뭐. 그럼 나는 간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서점 앞에 도착한 저는 또 아는 청년을 하나 만났어요. 저는 “누구 기다리니?”하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네, 친구 기다려요. 그런데 자그마치 20분이나 기다렸는데 안 오네요. 전화도 받지 않고, 그래서 이제 그냥 집으로 가려고요.” 저는 “오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단호합니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할 수 있어요? 이제 더 이상은 못 기다려요. 신부님, 저 갈게요.”하면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더군요.

한 명은 기다리는 30분이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또 한 명은 그보다 적은 20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기다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30분이 더 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차이를 보이더군요. 그런데 이런 차이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30분이라는 시간도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그보다 적은 20분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생각과 함께 엄청나게 긴 시간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 날 성전에서 비둘기를 봉헌하는 한 부부와 그 부부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를 보게 되지요. 사실 비둘기를 봉헌한다는 것은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는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은 소, 양, 염소를 봉헌하였거든요. 따라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부부와 갓난아기를 보고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라고 한 번에 알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단번에 알아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릴 수 있으며, 또한 그 그리스도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까요? 바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생을 기다릴 수 있었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나요? 주님의 구원 업적을 진즉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기도한 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님을 원망하는 행동들, 이웃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이웃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아픔을 주는 모습들……. 그 모든 것이 진정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진정한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시메온처럼 주님을 알아 뵙고 주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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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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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메온, 만민에게 베푸신 주님의 구원을 보다!

"척 보면 압니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척 보고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고 또 봐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문가의 혜안이 있고 지식과 경험이 깊으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사람도 첫 눈에 대충 파악이 되지요. 어느 정도의 느낌이 있고 그 다음에 대화를 통해서 첫눈에 알았던 내용들을 확인해 나갑니다. 통달한 사람이라면 더 잘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 사람이 속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것뿐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척 보면 알 수 있는 이런 혜안과 지식의 은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메온입니다. 시메온은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보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노인은 평생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머물며 산 사람입니다. 그는 성전을 찾는 수 많은 순례객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십 만, 수백 만의 사람들 중에서 어린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보았지요.

어떻게 시메온은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메온은 한 눈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감격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에 겨워 그 유명한 시메온의 노래를 부르지요. 구세주를 알아보는 시메온의 시각과 혜안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는 시메온이 어떻게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 알려 주셨다."(루카2,25-26)

그렇습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이었고 성령이 그에게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것이 단번에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시메온의 관심은 오로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확신을 가지고 그 분이 가져다주실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의 삶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믿음이 충만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은 시메온을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요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2,3-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고, 바로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살면 하느님의 사람이 보입니다. 세상에 살면 세상 사람이 보일 뿐이지요.

사람은 자기의 관심이 가는 대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적이고 하느님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면 그런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또 그들과 어울리게 되지요. 그러나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데에 집중되어 있으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느님에 대한 관심은 없고 다이어트에만 관심이 있다면 누가 몇 kg의 살을 어떻게 뺐다는 소식만 들리고 보입니다. 하느님께 관심과 초점이 맞춰져 있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누가 살을 얼마나 뺐는 지에는 관심이 없지요. 하느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느님의 영 안에 살아가게 되고, 또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판관들 같이 지혜로웠던 구약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믿지 않았지요. 자기의 경험과 지식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일 뿐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을 믿습니다. 그 결과 늘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의 삶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판단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 성령의 흐름 안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시메온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뵐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성전 안에 머물러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성전에 자주 오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십 년, 이십 년 냉담한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조배실에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또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난 시메온은 감격의 노래를 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루카2,29)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잃는다는 것에 쫓겨 늘 불안하고 근심과 걱정 속에 번뇌하게 됩니다.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삶이지요. 시메온이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았고, 또 얼마나 거룩한 죽음을 맞았는지를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장례식에 더러 가 보신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거룩하게 살았던 사람과 믿지 않거나 혹은 믿어도 건성으로 믿었던 사람들은 그 표정부터가 다릅니다. 참으로 거룩한 죽음을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과 불안에 떨다가 가는 사람들도 있지요. 또 가끔 돌아가신 분이 한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한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열심히 쌓아놨던 것을 그대로 놔두고 가는데 어떻게 한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죽으면서도 결코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편안한 마음, 기쁜 마음, 그리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시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어야할 것입니다. 우리 성당에도 시메온과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춥거나 덥거나 미사와 기도에 열심인 할머니들과 열심한 신자들이 바로 그 분들입니다. 하느님을 알면 성당에 계속 머무르게 됩니다. 바로 시메온이 그랬지요. 계속 성당에 머무르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자주 머물러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체험은 내 안에만 담고 있으면 자라나지 않습니다. 내가 처한 위치에서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을 실천할 때 나의 신앙은 더욱 풍요롭게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메온은 한눈에 주님을 알아 뵙고 벅찬 감동에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거룩한 현장을 직접 보게 해 주신 하느님께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역시 성령 안에 머물러 살 때 하느님의 구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을 이끄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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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원의 목격자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2월 나치 독일군한테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콜베 신부가 있던 감방에서 탈출자가 생겼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 명을 뽑아 굶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게 했다. 그때 뽑힌 유다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때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그 행동은 독일군한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콜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었다. 콜베 신부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의 길을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콜베 신부는 스스로 희생과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었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보는 순간 성령이 그의 입을 움직였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저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시므온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다. 믿음이 충만한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서 본 아기가 구세주임을 알아보았다. 성령의 비추임을 받았기에 시므온은 구원의 사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므온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자세, 곧 적극적인 수동의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적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충만히 살아가는 시므온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식별하고 볼 수 있는 은총, 그리고 그 뜻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다.

▥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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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너무 좁아서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자리가 있을 뿐이었지요. 그리고 길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고요.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 중의 한 마리가 길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한 마리만 무사히 그 길을 지나가던지, 아니면 싸우다가 두 마리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누었거든요. 아래로 내려가던 염소는 그 등을 딛고 내려갔고, 그제야 누운 염소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습니다.

싸움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싸워서 힘들게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들이 만든 법칙인 정결례를 따르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사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낮추는 하느님의 사랑에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존경했던 영성지도 신부님이 계십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신부님의 영성지도 방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영성면담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도무지 말씀을 안 하세요. 말씀 좀 하셔서 제가 올바른 영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저 혼자만 말을 하게 합니다. 당시 저는 신부님의 이 모습을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사실 말로 지도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올바르게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말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들어만 주실 뿐이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말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데 있다는 것. 즉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추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을 계속 낮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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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개미를 쉬지 않고 일하는 성실의 아이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개미가 실제로 성실한지, 2002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한 생물학 교수가 90마리의 개미를 3개 조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인공 개미굴에 실험 카메라를 설치해서 개미의 일상을 관찰한 것입니다. 그 결과, 각 조 개미 30마리 중 20%는 일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거나 개미굴 주변만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는 이 개미를 ‘게으른 개미’라 지칭했습니다.

이제 연구진은 ‘게으른 개미’들에게 먹이를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부지런히 일하고 있던 개미들이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게으른 개미’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움직이자, 다른 일개미들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른 개미’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찰을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성실하게 땀 흘려 몸을 움직여 일하면 다 잘살게 될까요? 그런 사람도 필요하지만, 관리자를 비롯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역할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 균형 있는 발전 속에서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직 말씀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이십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지키고 계셨고, 오늘 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보게 된 시메온은 예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 되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각자의 역할에 의해 구원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생활한다면 하느님의 일은 완성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일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맞게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은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의 일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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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2년 12월 29일
  |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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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모건 프리먼이 설명하는 ‘우리의 우주’를 보았습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태양에서 오는 빛과 에너지를 이용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태양이 보내는 빛은 식물의 광합성으로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를 초식동물이 받아들이고, 초식동물이 받아들인 에너지를 육식동물이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결국 지금 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왔고, 태양은 최초의 ‘빅뱅’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성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계셨고, 세상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내가 숨쉬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은 하느님이 시작하신 ‘빅뱅’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빅뱅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기 1장)” 하느님의 백뱅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서는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성서의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 그리고 다시 질서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무질서의 시간을 질서의 시간으로 바꾸기 위한 하느님의 개입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보내셨는데 외아드님을 믿고 따르면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복음 1장)

지구에서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우리의 뇌세포는 하루 24시간의 지구 시계에 맞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잠자는 세포가 지구의 환경에서 적응하기 쉬웠다고 합니다. 하루 24시간이라는 기준은 그러나 지구에서만 적용됩니다. 우리 옆에 있는 ‘금성’은 하루가 243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성에서의 하루는 지구에서 1년과 비슷합니다. 금성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비슷하기에 매일이 생일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금성은 1년과 하루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시간의 기준을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 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시편 90)”

오늘 독서는 무질서를 행해서 나가는 시간을 질서를 향해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따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천년은 지나간 어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종말을 향해 나가는 무질서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가는 ‘은총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태양의 빛과 에너지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모두 종말로 향하는 우주의 시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창조의 시간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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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2년 12월 29일
  |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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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수원/원주/대전]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3] 78
  [인천/서울]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  [5] 508
1590   (백)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독서와 복음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  [8] 2262
1589   [수도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77
1588   [광주/부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1] 549
1587   [수원]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65
1586   [인천/서울]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2] 685
1585   (자) 대림 12월 24일 독서와 복음 (즈카르야의 노래)  [8] 2214
1584   [수도회]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  [3] 549
1583   [청주/전주/광주/부산] 아기의 이름은 요한  [4] 687
1582   [의정부/대전/수원] 그리스도인의 현실  [3] 68
1581   [서울/인천] 이제 곧 성탄입니다  [4] 685
1580   (자) 대림 12월 23일 독서와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지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  [6] 2500
1579   [수도회]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8] 126
1578   [광주/전주/부산/청주] 마리아의 노래가 현대 여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4] 128
1577   [수원/의정부/대전]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3] 104
1576   [인천/서울] ‘성모찬송’(Magnificat : 찬미하다. 찬양하다)  [5] 125
1575   (자) 대림 12월 22일 독서와 복음 (마니피캇 ; 성모님의 노래)  [8]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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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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