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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구원의 빛
조회수 | 479
작성일 | 15.12.31
[수도회] 구원의 빛 <루카 2,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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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트리에 빛나는 반짝이를 붙이고 색색의 빛나는 전구를 달고 빛의 향연을 보며 어둠을 비추려고 오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별을 보고 동방에서 주님을 찾아보는 삼 왕이나 어둠 속에 헤매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나 빛이 어둠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어제 아빠스님을 따라 영동에 자기 땅과 집을 수도원에 기증하겠다는 분을 만나러 가보니 옛날 1965년에서 1971년까지 본당신부로 있던 구미 원평 성당에 학생이었던 루시아와 모니카 자매였습니다. 그는 70이 되도록 독신녀로 살았고 농촌을 잘살게 하려고 복지 대학을 나와 여러 가지 농촌에 관계되는 포도즙 공장과 어린이집, 농촌여성의 집을 운영하다가 나이 들어 일도 사업도 하기 힘들어 6년이나 비워둔 집을 보여주고 수도원에서 피정 집이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하여 돌아보고 돌아와 생각하니 젊어서도 열심히 성당에 나와 기도하고 매일 미사 나오더니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려는 마음을 읽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속 말만 하였습니다. 아빠스님 앞에서 줄줄 자기 일생 이야기와 자기 소신을 말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고 힘 있을 때 어린이, 부인들 돌보았다는 모습에서 숨은 보물을 찾은 마음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빛이 여기저기 비추듯이, 영동 산골짜기에 빛이 빛나고 있듯이, 또 다른 곳에도 이런 빛이 비치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빛이 되어 자기 있는 곳에서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 몸에도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하시지 말고 당신으로 인하여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님처럼 구원의 빛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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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석진 신부
2015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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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

예수님의 일생은 첫 출발점인 탄생에서부터 고통스런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고 지속적인 하향성의 생애였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지극한 자기 낮춤과 겸손의 연속이었습니다.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극도로 자신을 낮추셔서, 작은 인간들 사이로 육화 강생하신 대사건인 성탄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릴 뿐입니다.

이왕 태어날 것, 저 같았으면 멋진 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구중궁궐 속 따뜻하고 안락하고 넓은 방에서, 주변 사람들의 큰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어촌에 살면서 외풍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강풍이 불고 강추위가 밀려오면 아무리 난방을 해도 효과가 미미합니다. 방에 누우면 외풍까지 느껴져 코가 시릴 정도입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방 한 칸조차 마련하지 못해 외풍 정도가 아니라 찬바람이 숭숭 아무런 여과 없이 들어오는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가난하고 겸손한 탄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유다 관습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주님께 봉헌하는 예식에 참여하십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바친 예물을 보십시오.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참으로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큼지막한 황소나 잘생긴 숫양이 아니라 고작 비둘기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탄생이요 봉헌 예식이었습니다.

이 땅에 탄생하신 메시아께서 너무 부유하거나 거창한 모습으로 등장하시면 가난한 백성들이 기가 죽을까 봐, 작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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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2년 12월 29일
  |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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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영속성을 보여주십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루카 2,22)
"주님의 율법에 ...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3)
"주님의 율법에서 ... 명령한 대로"(루카 2,24)
아기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율법에 기록된 것을 이행하기 위함이지요. 율법은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삶의 근간이고 정체성이며 이정표입니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루카 2,27)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영에 활짝 열린 그가 비로소 구원자 아기를 만나고, 알아보는 영광을 얻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2)

메시아를 기다리며 어둠을 견뎌온 이스라엘에 놀라운 보상이 주어집니다. 빛이신 분이 길었던 어둠을 가르며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지요. 그렇다고 구약 시대까지를 어둠이라, 신약 시대부터 빛이라 칼로 베듯 단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빛은 성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미리 준비하신 구원의 절정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옛 계명과 새 계명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3)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이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준비시키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친히 보여 주신 율법의 완성을 살되, 문자 자체에 매여 있지 않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완성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무르익어오던 율법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통해 정점에 이른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사랑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이 생생히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1요한 2,7-8)

요한 서간의 저자는 옛 계명과 새 계명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품으신 그 사랑이기에 연속성 안에 있으면서, 율법을 전해 준 모세와 달리 예수님은 당신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새로운 사랑이란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1요한 2,9)

구원자께서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분과 제자들에게 살의까지 품습니다. 자신들이 수호해 온 율법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 계명을 대립각에 놓고 배척함으로써 눈을 감아버린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를 가로지르며 유유히 흘러오던 율법의 강물이 비로소 출구를 만나 온 세상을 향해 힘차게 뿜어나오는 완성의 때를 외면한 채 그들은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복음 속 시메온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앞에서 하느님 백성은 옥석이 가려졌지요. 사랑을 사랑으로 보는 이와 위험으로 간주하는 이로 말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우리의 신앙과 사랑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지금 이 세상에도 사랑을 두고 율법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재단하는 눈들이 없지 않습니다. 사랑할 마음은 없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불편해, "젊은 사람이 왜? 멀쩡해 보이는데 왜?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자신의 사랑없음을 율법으로 합리화하고, 행정에 떠넘깁니다. 사랑없음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흘러가는 사랑을 방해하고 차단해서 결국 사랑의 맥을 끊으려는 어둠의 힘이지요. 효율적이고 영리해 보이나 하느님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하느님께서 명하신 그 사랑의 완성임을 받아들이는 이는 자신이 받은 그 사랑이 또 다른 완성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길을 터주지요.그는 언제라도 사랑의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으려 영혼을 활짝 열고 이웃과 세상을 살핍니다. 마치 감독의 Q 사인을 기다리며 Stand by 상태에서 대기하는 연기자처럼,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하나인 것처럼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사랑의 법이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통해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되 문자에 매이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자유로이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탄은 하느님 사랑의 축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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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2022년 12월 29일
  |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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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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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굳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4,4-5)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루카 2,27-28)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여기서 세 가지를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루카 2,27)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부추김 받고 있는지요?
성령에 이끌려 다니는지요?
혹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쫓아다니지는 않는지요?
대체 나는 지금 무엇에 깨어있는지요?
영의 움직임인지요?
아니면 내 마음의 움직임인지요?
그러니 자신이 무엇에 기대어 있는지?
무엇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 무엇인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둘째,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루카 2,27-28)

그런데 지금 내 팔에 무엇을 안고 있는지요?
아기예수님인가요?
아니면, 다 큰 자기 자신인가요?
혹 한 팔에는 아기 예수님을,
다른 한 팔에는 자기 자신을 안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공동체와 형제들을 안고 있기는 하는지요?
그래서 누구를 찬미하고 있는가요?
아기예수님인가요?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요?
그러니 진정 나는 지금 누구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셋째, 시메온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나의 눈은 대체 무엇을 보고자 찾아 헤매는지요?
어디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요?
타인들인가요? 자기 자신인가요?
아니면, 진정 하느님인가요?
혹 겉의 화려함만 바라보고 탓만 하는 세속의 눈인가요?
속을 꿰뚫어보고 찬미와 영광을 노래하는 맑고 순수한 영의 눈인가요?
혹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희미해져가고 늙어가는 육체의 눈인가요?
아니면, 늙어갈수록 맑아져 가는 영의 눈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눈(관점)을 내려놓으면 신비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맑은 영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처럼 열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상의 눈이 열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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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신부 2022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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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루카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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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와 요셉이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주님께 바친 것은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인간의 질서와 법 안에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다른 면에서 이는 하느님 친히 사람의 손에 자신을 맡기시어 사람들 깊숙이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모는 일 년 된 어린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칠 수 없을 만큼 가난하여 비둘기를 정결례 예물로 바쳤다(루카 2,24). 그들이 속죄의 행위로는 필요치 않은 성전으로 아기를 데리고 감으로써 아기가 속죄되는 대신 하느님의 일을 위한 성별이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속죄된 것이 아니고 주님께 성별되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손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셨으며, 다른 이를 위해 ‘피를 쏟아’ 봉헌되며 구속하실 분이시다. 인간의 법규와 제도에 복종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가난 속에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이 분을 알아보고 찬양한 사람은 시메온이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죽기 전에 주님을 뵙게 될 것이라고 열려주셨다(2,26).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는 성령의 이끄심 아래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παράκλησις)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다(2,25).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 속에 살았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는 구세주 메시아로 오신 아기를 알아보았고 팔에 안아들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시메온의 노래는 어렵고 힘든 길고 긴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모든 것을’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구원의 노래인 것이다. 시메온은 이렇듯 구원받은 모든 이들의 상징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메시아를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마지막이자 참된 응답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며 우리 인간이 걸어야 할 신앙의 여정과 마음가짐을 집약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영광”(2,32)으로 드러난다. ‘빛’(φώς)은 구원에 대응하는 말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전 생애에 걸쳐 기다려온 구원을 본 의로운 종(δούλος), 시메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2,29).

가난한 나자렛 가정의 봉헌 속에 만민의 빛으로 오신 분을 맞아들이며 사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제1독서가 이를 잘 말해 준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1요한 2,4).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며 그분 안에 있게 된다(2,5). 따라서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2,6). 빛으로 오신 분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자기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2,10).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2,11).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교환의 신비’를 끌어안는 것이고, 사랑으로 오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모두를 내 세포 안에 새겨 혼이 되고 숨이 되어 움직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시메온처럼 늙을 때까지 그저 구세주를 기다리면서,자기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지금’ 과감히 버릴 것을 버리고 그분의 마음과 말씀으로 채우자. ‘지금’ 사랑하고, 기부하며,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을 미루지 말고 ‘지금’ 하자! 과거를 붙들고, 내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외모나 나이 먹어감이나 재능을 탓하고 있을 때, ‘지금’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은 흔적 없이 나를 스쳐 사라져버릴 것이다. 지금 기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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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22년 12월 29일
  |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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