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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제주/전주/청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조회수 | 37
작성일 | 18.07.08
[부산]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의 5,21-43에 보도된 복합기적사화를 옮겨 쓰면서 흥미거리 일화는 모두 삭제하고 그리스도론적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습니다. 즉, 총 23절을 단 9절로 줄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내용을 간단히 줄이는 데는 요약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수정하는 방법을 쓰는데, 물론 무턱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르게됩니다.

오늘 복음을 마르코복음과 비교해보면, 마태오는 마르코가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5,22)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냥 한 사람의 회당장으로, 회당장의 딸이 다 죽게되었다(5,23)는 부분을 "방금 죽었다"고 바꾸었고, 하혈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5,29)는 대목을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난 뒤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대뜸 여인의 병이 나았다고 바꾸는 등 여러 부분을 자신의 편집의도에 맞게 축소 수정시켰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사가는 기적사화의 주체인 예수님과 대상인물을 동시에 부각시키면서 기적을 유발시키는 "믿음"을 촉매제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기적의 주체인 예수님만 부각시키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기적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움직여 주는 동기를 대상인물과 관계없이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회당장의 경우에는, 아이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는 "간청"(기도)이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으며,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는 "생각"(믿음)이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코는 회당장의 간청과 여인의 생각 자체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나, 마태오는 간청과 생각 자체가 기적을 유발하는 중요한 동기는 되지만 기적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오는 결국 기도나 믿음 자체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더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의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 기도와 믿음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 하고 말씀을 내리시자 여인은 즉시 치유되었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24절) 하신 예수께서 소녀를 잡아 깨우시니 소녀는 다시 삶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행위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저 강렬한 기도와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와 믿음의 방향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회당장 야이로는 가파르나움의 회당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마르 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마르 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죽은 딸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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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할머니의 손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누워 계실 때가 많았는데, 제가 방학 때 인사를 드리면 가만히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놓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건네면서 제가 방을 나설 때까지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제가 찾아뵐 때마다 변함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 있는데, 아흔이 지난 할머니의 손이 거칠어도 저는 그 손에서 늘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 누워 있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녀를 살린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힘없이 축 늘어진 연약한 손에 예수님의 생명의 손길이 닿자 소녀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 손으로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사랑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며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되어줍니다.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손은 자녀의 신경조직을 자극하여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발육을 촉진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이의 머리나 얼굴 등 몸을 쓰다듬는 신체적 접촉이 피부의 신경세포를 따라 대뇌에 전달되어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에 긍정적인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태초의 하느님의 손을 생각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손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카인은 아우 아벨을 그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이 땅에 폭력과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들어 자손을 축복하셨고, 모세의 손을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으며 사무엘의 손을 들어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종종 인간의 손은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손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사람들의 폭력적인 손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 손을 축복의 도구가 되게 하시며 우리 손이 주님의 손처럼 쓰일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만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손이 아닌, 주님의 손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 제주교구 송동림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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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의 마음을 알며 살아가는 신앙인

하느님께서는 예고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지 않고 다시 한 번 당신 백성의 사랑을 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시어 광야생활을 하도록 하시면서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이들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사랑해주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내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그 어떤 외적인 위협에서도 다시 지켜주실 것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의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신부에게 주시는 선물은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 정의와 공평, 진실이다. 이처럼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시며 사랑을 구하신다.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느님께 간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침묵만 지키신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열심히 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까? 인간의 청을 외면하시고,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고, 함께 계셨음을 고백한다.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어리석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가를 고백한다.

욥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욥을 가리켜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1,8; 2,3)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 정도로 욥은 의로웠다. “나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네.”(6,29) “내가 죄 없다는 주장을 굽힐 성싶은가?”(27,6)라고 말할 정도로 욥은 의롭게 살았다.

그러한 욥이 사탄으로 인하여 건강, 자식, 재산이라는 세 가지 축복을 모두 잃었다. 부인까지도 욥을 비난했으며, 욥은 잿더미에 올라앉아 토기조각으로 몸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그는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 버려라.”(3,3) 하고 자신의 생일까지도 저주한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망치셨고 자신의 옳음을 거부하시고고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했다(27,2).

그는 하느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없으시고 보고만 계신다고 생각했다(30,20).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의롭게 살아가는 의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 인하여 마땅히 건강, 자식, 재산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의로운 자신이 받는 고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그가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비로소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40,41)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42,3.6)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잿더미에 앉아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하찮은 미물이요 티끌과 먼지 같은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이 얼마나 크고 좋으신 분이며,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시는가를 깨달은 것이다.

제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가를 말씀하신다. 그처럼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시며 사랑을 구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줄로 생각한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의지하며 사는 의인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욥처럼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똑바로 알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하루가 되자.

▦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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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믿음의 행동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장마와 함께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건강에 유의하셔야 하겠지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바라는 것 중에 제일 으뜸은 병나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로병사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약,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며 그 희망을 조금이라도 채워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찌 이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해결해 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되는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회당장의 간청,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몸부림을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의 갈망을 채워 주십니다. 좋은 약이나 좋은 음식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 마음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적같은 회복의 이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 믿음의 대가가 생명이요, 회복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없이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믿음 속에서 드러나는 행동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회당장을 봅시다. 회당장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신심도 깊고 재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살아가는데 아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를 반대하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도 의식하지 않고, 또 그 뒤에 일어날 자신의 불이익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즉, 악의 세력과 도전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다음 여인의 모습을 봅시다. 열 두해 동안 병마와 싸우며 지내는 고통의 여인입니다. 그동안에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아마 재산까지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죄 많은 여인이라고 업신여기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도 이제 다 떠나갔을 것입니다. 외로움과 병마와 싸우는 이 여인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기진맥진한 몸둥아리를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내어 던집니다. 주위 사람들의 저지와 냉혹한 비웃음 속에서도 옷깃이라도 스쳐 볼려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이렇게 회당장이나 여인이나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투신이 새로운 삶의 기적을 덤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며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합니다. 그렇지만 회당장이나 여인의 모습처럼 적극적인 투신과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께 다가가고 있는지요?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힘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께 청하면서, 사실상 몸과 마음은 주위 사람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엉뚱한 곳에 맡기고 생명을 연장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가련한 모습을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포자기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죄도 많이 지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하느님도 보살펴 주시지 않을 거야’라는 체념 속에서 더욱더 자신을 파괴하며 안타까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생명과 건강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머무를 때 비로소 우리는 또 하나의 기적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제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시련과 슬픔과 절망의 모습을 주님께 다가가 보여주고 간청하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립시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다 해 주십니다. 아멘.

▦ 부산교구 박재구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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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은수자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은수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은수자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부정을 탄 여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주님은 항상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처들과 우리 죄들을 그분께 보여드릴 때 그분은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정녕 온전한 자비이십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8년 7월 9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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