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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수원] 긍정적인 농부와 부정적인 농부
조회수 | 11
작성일 | 18.07.08
[인천] 긍정적인 농부와 부정적인 농부

긍정적인 농부와 부정적인 농부는 비가 올 때 이러한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먼저 긍정적인 농부는 “주님, 농작물에 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하고, 부정적인 농부는 이 기도를 듣고는 “무슨 소리야? 비가 계속 와서 곡식 뿌리가 썩으면 올해 풍년은 물 건너가는 거라고.” 하면서 투덜거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부정적인 농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우리 주위에는 비관주의자들이 득실대므로 그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철저히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우리 삶은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을 따라간다.’라고 말한답니다. 즉, 기쁨과 평화, 승리, 풍요로움, 행복 등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으면, 그러한 긍정적인 요소들과 우리의 삶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일들이 내게, 또 반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일들이 나를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당신 앞에 오는 사람을 반기실까요? 그 답을 오늘 복음에서 정확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말하지요.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당장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는 또 다른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혈루증을 앓는 여자였지요. 이 여자 역시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바로 이 긍정적인 생각들이 주님을 따르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어떤 말과 어떤 생각으로 무장하고 있었는지 반성하여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세상의 사람들처럼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과 생각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과 생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말과 생각이 주님을 움직이고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첫 번째 길이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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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깊은 강에서 살던 개구리 한 마리가 길을 가던 중에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침 무더운 날씨에 몹시 목이 말랐기 때문에 우물 속에 풍덩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그곳에는 토박이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나그네 개구리는 토박이 개구리에게 자기를 소개했지요.

“저는 아주 큰 강에서 온 개구리입니다.”

그러자 토박이 개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큰 강? 큰 강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도대체 그게 뭐요?” 라고 묻습니다. 나그네 개구리는 설명을 했지요.

“아하, 그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 우물은 너무나 자그마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한 번 설명해 볼게요.”

성격 급한 토박이 개구리는 껄껄껄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 우물보다 더 큰 게 있다는 소리는 처음이오. 당신이 말하는 그 강은 얼마나 크오? 이 만큼 되오?”

그러면서 우물 안 넓이의 삼분의 일쯤 펄쩍 뛰어 봅니다. 나그네 개구리는 “천만에요.”라고 답했지요. 이번에는 우물 안 넓이의 삼분의 이쯤을 펄쩍 뛰어 보이며 말합니다.

“이 만큼 되오?”

나그네 개구리는 “아무래도 도저히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네요. 그건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요. 아주 넓고 크단 말이오. 아예 경계도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토박이 개구리는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 미쳤소? 아니면 철학하는 개구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신은 거짓말쟁이가 분명하오. 여기서 얼른 나가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다니!”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요? 바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토박이 개구리이겠지요.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있는 나그네 개구리가 바보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네요. 바로 이런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래서 죽은 아이가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인데, 그래서 사랑으로써 어떻게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들은 그 사랑을 의심하고 판단함으로써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비웃던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그러면서 앞선 이야기에서 등장한 토박이 개구리의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당신 미쳤소?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다니!”

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다가선 회당장,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보여준 혈루증을 앓는 여인. 바로 주님 앞에 철저히 다가서려 했던 사람의 모습이고,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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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폰과 컴퓨터를 연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몇 번 시도했는데 잘 안 되었습니다. 보통은 잘하는 분에게 물어보거나, 직원에게 부탁하면 해결이 되었습니다. 차분하게 시간을 내서 방법을 찾으면 되지만 급한 성격에 번번이 포기하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스마트 폰과 컴퓨터의 연결 방법이 있었습니다.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따라 하니 드디어 스마트 폰과 컴퓨터가 연결되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던 때와는 다른 기쁨이었습니다. 직원이 도와주어서 해결하던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적성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한 자매님이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에서 미사참례를 오셨습니다. 서울에서 오려면 3시간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자매님은 남모르는 아픔이 있었고, 적성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언니는 동생이 매주 어디론가 간다는 말을 듣고 어느 날 동생을 따라서 적성 성당까지 왔습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동생이 미사에 오는 것이었고, 저와 이야기를 하면서 안심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매님은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 더는 제가 있는 성당으로 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통해서 치유가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매주 왕복 6시간 거리를 오려고 했던 자매님의 의지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은 이들까지도 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죽은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여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청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힘을 주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소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베짜다 연못의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낳기를 원하느냐?’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도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베드로 사도도 물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도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자.’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엄청난 양의 물을 퍼 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청은 우리를 은총의 바다, 축복의 세상으로 안내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내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으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이고, 이것이 신앙이며, 이것이 진리의 길입니다.

지금 주어진 아픔, 갈등이 있다면 그것을 걸림돌로만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기회가 되는 디딤돌로 생각 할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8년 7월 9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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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관계를 위한 무분별심

문둥병자였던 승찬은 달마 대사의 제자인 혜가 스님을 만나 병도 치유되고 큰 깨달음을 얻어 중국 최고의 문자라 일컬어지는 ‘신심명’을 짓게 됩니다. 그는 병고에 찌든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으로 무조건 혜가 스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자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엎드리며 말합니다.

“스님, 저는 지금 이렇게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혜가가 조용히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혜가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승찬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혜가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 죄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을 없애 주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승찬이 다시 말합니다.
“죄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가 빙긋이 웃으며 말합니다.
“그렇다면 네 죄는 다 없어졌다.
찾을 수도 없는 죄에 묶여 헛되이 고통 받는 일은 이제 그만 하라.”
승찬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병들게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으로 병도 치유되고 은둔생활을 하며 무분별심을 주제로 한
‘신심명’을 짓게 된 것입니다.[출처: ‘무분별의 지혜’, 김기태, 판미동, ‘강의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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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은 관계를 위한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장애가 된다고 믿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장애가 됩니다.

사실 분별심을 가진 이들은 관계를 맺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니 그들을 신경 쓸 것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 분별심 없이 자신을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면 자격지심이란 병이 완전히 치유되고 누구라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 가끔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어색함 사이에는 수많은 나의 생각들이 끼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거나 말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자격지심입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존재 자체로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어색해지는 이유는 둘이 만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자아와 셋이, 어쩌면 상대의 자아와 넷이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친한 사람은 상대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만나고 있는데 상대가 끼어든 상태라 상대가 어색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떠나야합니다.

자아는 ‘분별심’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주는 양심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심은 옳고 그름은 알려주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자아는 죄를 짓게도 만들지만 죄를 지은 자신과 이웃을 심판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일어나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먼저 자신을 심판했으니 자신의 부끄러운 면이 드러날까 걱정인 것이고, 그렇게 상대가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미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방어막을 치고 먼저 상대를 공격하게도 되는데 그런 모습이 상대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관계가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어야합니다. 자신을 심판하고 상대를 심판했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색함도 두려움의 일종입니다.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자신을 심판하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그런 처지의 여자입니다. 피를 잃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부정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피를 잃고 있는 여인과 스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처지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런 자격지심을 극복합니다.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처럼 자신을 심판할 수많은 사람들이 끼어있었습니다. 그들을 뚫는 방법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도 무관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무분별심을 가졌다는 말은 심판자인 자아를 버렸다는 말입니다.하지만 자아가 계속 죄를 범할 때에는 그런 무분별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자아이기에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비록 죄인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적어도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예수님께 손을 뻗을 수 있는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면 어느 정도는 자아의 속박에서, 즉 죄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광야에서 자신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심판자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곳이 ‘광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 여자’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은 파라오를 섬겼습니다. 자아를 섬기는 상태에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기 위해 먼저 그들을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셨던 것입니다. 자아를 상징하는 파라오를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이라고도 부릅니다. 바알은 우상입니다. 자아를 섬기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들면 금송아지가 되는데 그것이 바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분별심이 사라졌을 때 자신을 구원해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만나게 됩니다. 신랑은 머리이고 신부는 몸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신부입니다. 그렇게 상대를 진정으로 만나게 되고 상대와 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주님은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오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과 이웃들의 심판에 무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자비’로 만나 뵙습니다. 자신이 자비로워야 하느님도 자비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과 만나도 단 한 명과도 만난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아라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집 안에서 사람들을 바라본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맺고 싶다면 분별심을 버려야합니다. 집에서 나와야합니다. 광야에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의 성전을 완성한 사람만이 하느님은 물론 이웃도 (하느님이 인간을 만나듯이) 만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8년 7월 9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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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온전하게 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회당장은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 그 딸을 위해 기도한다. 율법과 예언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을 양육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신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님께 나타나 예수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하였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 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그래서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 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는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8년 7월 9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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