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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딸아, 용기를 내어라.
조회수 | 37
작성일 | 18.07.08
[수도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어버이날을 맞아 홀로 계시는 아버님을 방문했다. 아버님은 어떻게 죽음을 잘 맞을 것인가가 큰 고민이라고 하셨다.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고와 죽음의 고통이 아닐까?

회당장의 딸을 되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병고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준다. 이야기의 전개는 한 회당장이 자기 딸이 죽었으니 가셔서 딸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의 집을 향한다. 그때 열두 해 동안 하혈로 고생하던 부인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이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아 왔다는 표현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이 여인은 남모르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음을 잘 알 수 있다. 하혈하는 여인은 부정하게 취급되어 타인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이 여인이 열두 해 동안이나 부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고립된 생활을 해왔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어느 공동체에도 속할 수 없었을 것이며, 가족에게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병고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자 과연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능력이 빠져 나간 것을 알아채신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치유가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 주신다. 이제 더 이상 인간 세상에서 격리된 병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받는 딸로서 지위가 회복된 것이다. 이제 어엿한 인간으로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하던 여인의 마음, 믿음으로 그분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 이정희 수녀 (성심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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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번의 손짓 ▬

저는 힘있고 유창하면서도 능력있는 기도를 할 수 있길 노력하고 그렇게 기도해 왔습니다. 특별히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대표로 기도를 해야 할 때는 더욱 기도를 잘해서 ‘기도를 잘했다’는 칭찬을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하느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대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형식을 빌려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끄러운 말과 논리적 수사로 하느님을 설득해 제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여자처럼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여자의 행동은 ‘전적으로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 같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잘 말씀드려서 예수님을 감동시키려 하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이 동의해주도록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더더욱 예수님의 확인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 여인은 단순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간절함 염원을 ‘단 한 번의 손짓에 담아서’ 예수님의 앞도 아닌 뒤에서, 예수님의 손이나 몸이 아닌 옷자락에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저도 이 여자를 닮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눈이나 평판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보증이나 증거를 요구하지도 않고 오직 간절한 태도로 단 한 번의 손길에 온 마음을 다 싣고 싶습니다. 그것도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습니다.

▦ 홍영선 신부 (성공회 서울대성당)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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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주 실낱같은 희망에도 큰 기대를 겁니다.

수치심을 자극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담대하게 외치던 가나안 여인과는 다르게, 오늘 복음의 이 여인은 용기없고 가냘픈 심정으로 군중 사이에서 떼밀려가시던 예수님의 옷깃 한 자락이라도 잡고자 했습니다. 그 여린 믿음을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는 “꺼져가는 심지처럼 깜박인 듯한 그 작은 믿음을 알아보겠다”라는 듯 여인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드러내기조차 부끄럽고 변변찮은 믿음. 마치 어느 깊은 산골 바위틈
사이에 피여 있는 이름모를 작은 야생초이지만 그를 외면하지 않으신 주님의 눈길로 인하여 한 생명이 살아 있고 또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십니다.

주위에 수많은 군중이 있었지만 그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속삭여줍니다. “너 안에 담긴 그 작은 희망의 불씨, 그 믿음이 너를 살렸다. 나에겐 그것도 소중하기 그지없다.”

▦ 떼제공동체 장경선 수사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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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접촉, 그것은 사랑

20년도 더 전 제가 결핵 환자들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함께 하려고 하던 때 그분들은 숨 한 번 쉬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가래 한 번 뱉어 내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기침이 시작되면 멈추지 않아 그렇게 힘들고 밥 한 술 넘기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 하였고 누울 수 없어 밤새 베게 껴안고 그렇게 잠 못 들어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안수 기도할 때 저는 진정 저의 안수로 그분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바랐는데도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안수 기도하여 치유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도 안수 기도를 해드리고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하지만 제가 안수 기도하는 더 큰 목적은 치유가 아닙니다. 치유는 저의 영역도 저의 역량도 아니기에 저는 그저 함께 하고자 하는 저의 마음과 저의 작은 사랑을 피부 접촉적으로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골치가 아플 때 어머니께서 이마에 손을 대시면 저의 이마의 열이 한결 떨어지고 배가 살살 아플 때 어머니가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 정말 기적처럼 아팠던 배가 나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때 바랐던 것은 아픈 것이 물리적으로 낫는 것도 있었지만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쁠 때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없으면 도리어 슬퍼지는 것처럼 아플 때 그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물리적인 아픔보다 훨씬 더 마음이 아프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외로움, 고독이라는 병은 정말 인간을 시들게 하고 말라 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녀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버려진 갓난아이들을 돌보는 소임을 하고 계셨는데 아이를 낳아 키운 적이 없는 수녀님이기에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채는 데 늘 애를 먹었답니다. 하루는 한 아이가 계속 울어서 배가 고파서 우는가 하고 우유를 줘도 먹지 않고, 기저귀가 젖어서 우는가 하고 기저귀를 봐도 괜찮고, 잠투정을 하는가 하고 잠을 재우려 해도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우는 것이었습니다. 달래다, 달래다 안 돼 나중에는 ‘아, 이놈이 왜 계속 우는거야!’하고 살짝 꼬집어 주니 오히려 울음을 그치고 배시시 웃더랍니다. 아이가 고팠던 것은 우유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기적이고 다른 하나는 죽었던 회당장 딸의 소생 기적입니다. 두 기적의 공통점은 접촉입니다. 혈루증의 여인은 그저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것만으로 치유되었고 아이는 주님께서 손을 잡으시자 살아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과 애비의 믿음이 기적을 낳았다고 하시지만 손을 얹어주기를 청하고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 했던 그 마음을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심으로 사랑의 힘이 통하여 낳은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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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는 사랑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첫 번째 회칙을 내셨네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걸출한 대 신학자답게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에 대해, 특히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사랑에 대해 심도 깊게, 그러면서도 명쾌하게 풀어내셨습니다.

특별히 제 눈길을 끈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eros)의 의의와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에로스가 인간에게 단순히 순간적인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절정, 곧 우리의 온 존재가 열망하는 지복(至福)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해주는데, 이를 위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간 실추되었던 남녀 간의 사랑, 소위 ‘세속적인 사랑’인 에로스의 가치의 복구를 강조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런 걱정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에로스가 단순히 ‘성’으로 전락하여 상품화되었고, 사고파는 단순한 ‘물건’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이 상품화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무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즐기고도 문제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상승과 극기, 정화, 치유의 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에로스는 새로운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비록 불완전한 남녀 간의 사랑이지만 보다 멀리 내다보기 시작합니다. 보다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결국 영원을 바라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에만 머물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갑니다.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내어주기 시작합니다. 결국 자아를 해방시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합니다. 최종적으로 참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적인 사랑인 에로스를 잘 정화시키고 성장시키면 하느님에게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낱말이 에로스인 반면에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신앙으로 형성되는 사랑을 드러내는 단어가 아가페(agape)입니다.

“올라가는 사랑인 에로스와 내려오는 사랑인 아가페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에로스가 처음에는 커다란 행복을 약속하는 매혹으로서 탐욕적이고 올라가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을 점점 더 염려하고, 자신을 내어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내려오는 사랑, 주는 사랑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줄 수만은 없으며,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분명히 인간은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 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샘이 되려면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새 물을 끊임없이 마셔야 합니다.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창에 찔린 그분의 심장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인 호세아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인격화시킵니다.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에로스적인 언어로 표현하십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이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을 표현하십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을 오랜 고통의 세월에서 해방시켜주시는가 하면, 죽었던 소녀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시는 말씀.

“딸아, 용기를 내어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이었고 가시적이었습니다. 가시화와 구체화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육화강생이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구체화시키고 가시화시키는 도구로써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사심 없는 이웃봉사를 통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통해, 이웃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안에 구체화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이토록 순수할 수 있으며, 이토록 지고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앞에 보여줄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에로스도 우리가 노력한다면 정화되고, 성장되어 아가페와 잘 융화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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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혈루증을 앓는 여자 (마태 9,18-26)

오늘 복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씀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혈루증(하혈)을 앓고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인데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오늘 날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복음에서 열두 이라는 숫자는 충만한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일정한 기간만이 아니라 평생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여자의 일생은 혈루증으로 시작해서 혈루증으로 인생을 끝내야하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럼 도대체 혈루증이란 무슨 병인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사의 손에 숱한 고생을 하며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 25-26)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안해 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혈루증이란 어떤 병인가? 복음은 이 혈루증이라는 병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혈루증이란 피가 밖으로 흘러 나오는 병이다.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생명인 피가 밖으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올 피가 없으면 죽는다. 피를 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따라서 혈루증이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병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말은 평생 죽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하혈한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 누구도 이 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고 또 그 누구도 이 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기 위해 좋은 음식, 좋은 약, 좋은 의사, 좋은 공기, 좋은 운동 등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해보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상황이다. 나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혈하는 피를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능한 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르코 복음을 보면 이 여자가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여자는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만졌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 병이 낳겠지."하지 않고 "구원을 받겠지"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히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치유시켜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병에 걸려있지만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는 것이 곧 구원이다. 따라서 구원은 죽음에서 건져내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는 것이다. 구원은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행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치유시켜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살려내기 위해 오신 것이다. 즉 죽음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주러 오신 것이다.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요, 예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생명수를 마실 수 있는 파이프를 댄 것이다. 이 여자는 파이프를 통해 생명수를 마심으로써 살아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돌아보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을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위이다. 믿음이란 예수님 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믿음이란 죽어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그분께 자신의 병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 맡기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질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지 못한다.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죄 사함을 받는 고해 성사를 보면서도 전혀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만지는 믿음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생활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수동적이요, 형식적이다. 가라니까 가고 오라니까 오고 참례하라니까 참례한다. 그렇지만 아무 느낌도 없고 감격도 없다.

예수님을 만지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나를 구원하는 믿음일까?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추상적인 믿음에서 만지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한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만져져야 하는 믿음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내 맡길 수 있고 죽음에서 나를 살릴 수 있다.

▦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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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7월 9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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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영원한 반려자-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요즘 새삼 깊이 깨닫는 것이 돌아갈 집 내 수도원이, 돌아가 편히 쉴 내 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돌아갈 곳을 잃은 난민들을 최대한 선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환대는 주님의 환대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약 두 주간 미국에서의 일을 끝내고 귀원한 원장수사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벌써 한국이 그립습니다. 사진 감사합니다.”

“이제 사흘 뒷면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신납니다.”

“비행기 막 착륙했습니다.”

“잘하면 끝기도 전에 들어갑니다.”

귀국전 전송받는 원장 수사의 메시지입니다. 돌아갈 그리운 집에, 기다려주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저절로 마음도 안정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반대로 돌아갈 집도, 기다려는 주는 이도 없다면 얼마나 마음 황량하겠는지요.

즉시 인생사 끝내고 사후死後 돌아갈 주님의 집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돌아갈 주님의 집과 기다려 주는 주님과 그리운 이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집에 귀가歸家라는 죽음도 반갑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살아 생전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죽음의 귀가준비요, 하여 평상시의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앎과 믿음의 관계에 우정인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과 만남으로 구원받은 회당장의 딸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의 두 경우가 참 감동적입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청하는 회당장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회당장의 간절한 믿음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믿음이 주님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알게하며 주님과 우정관계를 날로 깊게 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9,24-25).-

파스카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딸의 부활체험을 통해 회당장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을 것이며 믿음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열두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 역시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즉시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치유의 구원체험을 통해 그 부인 역시 주님을 깊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여정에서 ‘믿음-앎-우정’은 하나로 직결되었음을 봅니다. 깊어가는 믿음에, 깊어가는 주님과의 상호 앎에, 깊어가는 주님과의 우정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살아갈수록 주님께 대한 믿음도, 앎도, 우정도 깊어가는 지요.
사랑할 때 압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며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 알아갈 때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앎의 관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우정입니다. 특히 영원한 반려자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제1독서 호세아서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마지막 부분의 ‘아내’란 말은 ‘반려자’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인생 광야 여정중 다정히 말씀하시는 주님과 친교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반려자)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반려자)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반려자)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주님의 핵심 말씀은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참 좋은 반려자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이런 주님과의 앎과 믿음과 우정이 깊어가면서 우리도 주님을 닮아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영적지도자의 바람직한 다섯 역할, ‘1.치유자healer, 2, 상담자counsellor, 3.간구자intercessor, 4.중재자mediator, 5.후원자sponsor’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반려자, 파스카의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영원한 반려자인 주님을 닮아갈 때 저절로 우리 역시 영적지도자 역할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깊이 알게 하시며 영원한 반려자인 당신과의 믿음과 우정도 날로 깊게 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 아멘.

▦ 베네딕도회 이수철 신부 : 2018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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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35.2%
[수도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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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와 용서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 신에게 필요한 것은 단연코 용기입니다. 슬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아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가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믿음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듯이 용기 없이 믿음으로 결코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향해야 할 곳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이고 믿음은 용기로 충만해지고 용기는 치유라는 구원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믿음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 없는 믿음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나약한 우리들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용기와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용기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용기와 믿음과 치유와 구원은 뗄 수 없는 예수님과 우리의관계이기 때문입니다.

▦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7월 9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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