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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
조회수 | 67
작성일 | 18.07.10
[수도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목자 없는 양처럼 쉽게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많습니다. 개인의 잘못된 욕망에 꺾여 회생불능 상태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방향 때문에 힘들게 사는 이도 상당합니다. 국가를 경영하는 일선에 선 사람이나 힘없이 따라가는 사람이나 정신적 가치관의 부재로 인해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별 수 없이 그냥 그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을 안고 살다 희생된 사회의 낙오자들, 어깨가 처진 채 거리를 방황하는 이들, 모두 목자 없는 양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에 열을 올릴 때, 어려운 처지의 삶을 사는 양들을 찾으시는 주님. 내면의 방황, 갈등 속에 시달려 기가 꺾여 있던 목자 없는 양인 내 어깨를 따스하게 두 팔로 안아 줄 수 있는 분의 존재감이 뼈저리게 그립습니다.

“나 너를 잊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 떼제공동체 장경선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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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마귀 들린 벙어리

사제는 ‘말’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제가 ‘정작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들었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일부분만 말하거나 완곡하게 표현해서 초점을 흐리거나 변죽만 울려 ‘받은 말씀을 적당히 왜곡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저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기보다 힘들다”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부자 신자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히 얼버무려 ‘부자인가 가난한가가 문제가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문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세상에서 물질에 집착하고 재물을 모으려고 힘쓰는 것이, 그것도 ‘더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비성서적이며 주님의 가르침에서 빗나간 것인지 정직하게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마음 한구석에 부자로 살고 싶은 마음을 숨겨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는 말씀을 그대로 강하게 선포하지 못하고 적당히 둘러대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그러면 세상에 간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신자들이 적당히 위안을 받으며 세상에 편승해서 살아가도록 방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혼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면서 적당히 권면하다가 무력하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 나는 마귀 들린 벙어리인가 봅니다.

▦ 홍영선 신부 (성공회 서울대성당)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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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죽음이 다가오자 일어선 베네딕토

한 성지(聖地)에서 이태리인 베네딕토회 수사님 한분과 몇 달간 함께 생활했던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휴일이면 이곳 저 곳 베네딕토 성인(480-547)과 제자들의 혼이 담겨있는 몇몇 대수도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변 경관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마치 신선들의 거처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던,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가 절로 나오던 수비아코 수도원, 아직도 그 강렬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산 정상에 위치해있어 한참을 꼬불꼬불 감아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었던, 마치도 견고한 요새 같던, 그래서 영화에나 나옴직한 몬테 카시노 수도원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는 곳 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그 웅장한 규모 앞에 깜짝 놀랐습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시절, 대수도원에는 수백 명의 수사들이 살기도 했다는군요. 그래서 어떤 시절, 수도원은 그 지역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학문을 주도하던 중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답니다.

수도원들을 방문하면서, 그분이 제정한 규칙서에 대한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면서 베네딕토의 업적은 그야말로 눈부시구나, 주님을 향한 바쳐진 그분의 일생은 정말 영웅적이었구나, 정말 파란만장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베네딕토가 떠나신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분은 유럽의 수호성인, 서방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베네딕토의 시대는 민족들의 대 이동이 있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이동해가면서 모든 것을 약탈해 갔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속에 살아갔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가질 수 없었던 절망의 시절이었지요. 이러한 불안정한 시대에 베네딕토는 정주(定住)수도회를 창설함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수도회 설립 초기 베네딕토의 삶은 여러 가지 도전들 앞에 흔들렸습니다. 베네딕토를 아바스로 선출한 수도자들이었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규칙, 지나치게 정확하고 성실한 베네딕토를 견뎌내지 못한 나머지 독살까지 계획합니다. 베네딕토의 엄격함이 아직 수도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던 수도자들의 나태함과 심하게 부딪혔던 것입니다. 아직 큰 그릇이 되지 못했던 베네딕토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한 베네딕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섭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습니다. 그 결과 베네딕토는 자신의 영혼 깊숙한 근저에 도달합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이 머무시는 내면의 장소,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제 베네딕토는 불평불만이 많은 수도자, 요구사항이 많은 수도자, 공격적인 성향의 수도자, 자기중심적인 수도자들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베네딕토는 수도자들의 진정한 영적 아버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동료수도자들의 삶을 한 차원 드높이기 위해 노심초사했습니다. 동료수도자들을 영적인 삶에로 이끄는 것이 그의 평생에 걸친 과제였습니다. 베네딕토는 동료 수도자들이 게으름과 우울함에 빠지지 않도록 쉼 없이 촉구했습니다.

“열심히 일하십시오. 더 이상 슬퍼하지 마십시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거룩한 독서를 하십시오.”

베네딕토의 제대로 된 영성은 그의 임종 장면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임종의 순간이 오자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펴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모아 열렬히 기도하던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죽음조차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베네딕토를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다가왔을 때, 선채로 하느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는 죽음에 의해 자신의 삶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 승리했습니다. 죽음을 친구처럼 편안하게 맞이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내어드린 것입니다.
베네딕토의 수도 영성이 내포되어 있는 수도 규칙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정표였습니다. 그는 많은 규칙을 통해 사람들을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기를 썼습니다. 모든 종류의 고통이나 슬픔과 싸워나갔습니다.

베네딕토 영성의 중요한 요소가 사람들을 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충만히 발휘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바탕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도왔습니다.

“수도승들은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 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성 베네딕토)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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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마태 9, 32-38)

그들이 나간 뒤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새 번역에서는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라고 되어 있고, 공동번역에서는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예수께 데려 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벙어리가 아니라 마귀가 들려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만일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말들을 하였을까? 부드러운 말을 할까?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할까?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까? 아니면 남을 욕하는 말을 할까? 남을 흉보고 멸시하는 말을 할까? 남의 흠을 잡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말을 할까? 말도 안 되는 괴성을 소리 소리 지를까? 아마도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벙어리로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까?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말씀이 있다.

천사가 즈카리야를 찾아와 "두려워하지 마라, 즈가리아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되겠기 때문이다."(루가 1, 13-15)라고 말하자 즈가리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 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가 1,18-20) 이렇게 해서 그는 벙어리가 되었다. 그 뒤 엘리사벳이 해산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는데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가리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안된다고 말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즈가리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가리야는 글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 때에 즈가리야가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아마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던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가 한 말은 즈가리야가 하느님을 찬미하였듯이 그도 분명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마귀를 쫓아내 주셨는데 어찌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으며 찬미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마귀를 쫓아내 주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벙어리로 있다면 그것이 정상이 아닐 것이다.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라고 시편은 노래하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입을 주신 것은 주님을 찬미하기 위함이다. 주님을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준 우리의 입에서 무슨 말을 할 때에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나와야 한다. 아침에도 찬미, 한 낮에도 찬미, 저녁에도 찬미!!! 찬미는 우리의 말이어야 한다. 찬미는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리는 표현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했으면서도 찬미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흉보는 말은 잘하는데 주님을 찬미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남 앞에서 자기 자랑은 잘하면서 기도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토록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본당에서 무슨 사목회장이다, 꾸리아 단장이다, 구역장이다, 반장이다 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찬미하라면 모두가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있다.

왜 그럴까?

말을 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어린 아이가 하루 아침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 쫑알거린다. 그러면서 말을 배우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를 배워야 하듯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 인간의 언어가 있듯이 하느님의 언어가 있다. 인간에게 사용하는 언어가 있듯이 하느님께 사용되는 언어가 있다. 인간의 세계가 있듯이 하느님의 세계가 있다. 자기가 어느 분에 대해 말을 하려면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야 하듯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려면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왜 기도를 하라면 벙어리가 되는가? 하느님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말 못하는 우리들이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아픔과 질병을 고쳐주셨다." 이것은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고 하였듯이 우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에 대해 감사드리고 하늘 나라 대해 말을 하게 함이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하려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하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을 듣고 깨달음으로써 그렇게 해서 하나 하나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하늘 나라에 대한 신비를 배움으로써 우리도 말을 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대해 선포하시는 복음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고서는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서는 세상 일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흉보고, 비난하는 말은 잘 할런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하느님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하는가? 자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하는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말을 하는가? 직장에서 함께 일을 하는 동료에게, 친구에게 내가 카톨릭 신자라는 것을 말하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나눈 적이 있는가? 몇 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서로 카톨릭 신자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한번도 하느님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 벙어리로 지냈기 때문이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복음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생활한 사람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늘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에서나 신자이고 성당을 나오면서부터는 한번도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을 하거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에 대해 표현한 적이 없는 마귀 들린 벙어리들이 많이 있다.

말은 자기 생각의 표현이다. 말은 서로 통교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꼭 언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따듯한 미소, 살며시 잡아주는 손, 한 폭의 그림, 관대한 마음 등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표현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많은 표현을 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이나 표정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다면 그는 마귀 들린 벙어리일 것이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께 데려가자. 또 내가 하느님을 찬미하지 못하는 벙어리라면 나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어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가자. 오늘도 말 못하는 벙어리인 내가 말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예수님,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우리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어 당신을 찬미하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아멘.

▦ 성 바오로회 유 광수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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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사가는 5~7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8~9장에서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 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몸서리치게 겪고 있으면서도 놓쳐버리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에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 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너희를 보내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소서.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그들은 우리 가운데 있고 당신도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시오니 못 본 척, 그들을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7월 10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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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주님의 전사, 수확의 일꾼-하느님 중심의 삶-

요즘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시멘트 벽돌담을 줄기차게 타오르는 진초록빛 담쟁이가 온통 벽을 덮었습니다. 영적전쟁에 지칠줄 모르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의 면모를 보는 듯 합니다. 담쟁이를 볼 때마다 되뇌이며 마음을 새로이 했던 ‘담쟁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하늘 향해
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1998.6.

오늘 지금 여기가 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도, 하늘 나라를 살 자리도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이래야 삶의 환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현실은 똑같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의 수행에 최선을 다합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 제1독서의 호세아 에언자도 전사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말 그대로 영적전투 치열한 삶의 현장 같습니다. 무지의 어둠의 세력과의 전투같습니다. 마귀를 쫓아내지만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며 경탄하는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군중이 있는가 하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무지에 눈먼 악의의 바리사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사명에 충실한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熱情에 마음의 순수純粹입니다. 다음 복음 장면이 사명 수행에 충실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참으로 지칠줄 모르는 주님의 열정은 어디서 기원할까요? 무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오늘날의 현실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대부분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지요.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음으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비로소 주님이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중심과 의미임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어제 잠시 외출했다가 인파人波란 말을 실감했습니다. 전철 환승역에서 쏟아져 나와 쏜살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흡사 거대한 강의 물결처럼 느껴졌습니다. 삶의 흐름, 시대의 흐름에 휩싸이다 보면 자기를 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자주 바쁜 일상 중에도 ‘강江’으로 흐르며 살다가 잠시 ‘호수湖水’로 멈춰 하느님과 나를 만나는 관상의 시간도 필수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호세아 역시 무지의 세력과의 치열한 영적전쟁의 삶입니다. 주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위태하고 허망한 삶인지 말그대로 모래 위에 지어진 집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임금들을 세웠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대신들을 뽑았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신상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망하려고 한 짓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을 떠난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삶입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이들의 자업자득의 불행한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입니다. 주님을 만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삶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전사가 되어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는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전사들이라면 수확할 일꾼을 보내 주십사 청하기 전 우리가 먼저 수확의 일꾼으로 사명을 다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시어 당신 ‘사랑의 전사’로, ‘수확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시편115,9). 아멘.

▦ 베네딕토회 이수철 신부 : 2018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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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마태 9, 37)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일꾼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행복한 일꾼은 복음을 위해온 삶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확의 참된 일꾼이필요한 때입니다. 수확할 일꾼의 첫 번째 덕목은 언제나 기도이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일꾼이 청해야 할 것은 풍성한 주님의 뜻이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확할 수확물은 결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복음의 일꾼은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합니다. 일꾼을 이끄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일꾼은 먼저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를 내면에서 묻는 이들입니다.

우리 내면은 가장 강력한 수확의 현장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행복과 성장이라는 주님의 현존을 수확하길 기도드립니다. 수확할 현장에서 자꾸만 만나게 되는 주님의 풍성한 사랑입니다.

일꾼의 기도로 일꾼의 충실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복음이 풍요로이 수확되길 기도합시다. 일꾼의 수확은 이미 일꾼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이미 행복한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7월 10일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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