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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전주/대구/청주/부산] 아버지의 기도와 아들의 기도
조회수 | 71
작성일 | 18.07.10
[제주] 아버지의 기도와 아들의 기도

방학 때 신자들을 만나면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제가 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언젠가 한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1남 1녀를 둔 그분의 아들이 얼마 전 첫영성체를 했다는데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고 싶은 그 형제님은 첫영성체 때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꼭 들어주신다는 말을 믿고서, 첫영성체 교리를 받는 아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첫 번째 기도로 “제가 신부님이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기를 바랐다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바람이 아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아들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첫영성체를 한 날, 식사 중에 아들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하느님께 어떤 기도를 첫 번째로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니?” 그러자 아들이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 아빠! 제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랑 나중에 꼭 결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 형제님은 아들의 대답을 듣는 순간 너무나 허탈했다고 합니다. 순수한 아들의 기도이기는 했지만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워낙 컸던지라 실망을 한 겁니다. 아들에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기도 가운데 어느 기도를 들어주실지 그 결과가 주목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일꾼이라 함은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할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희망처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가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제, 영성의 향기가 우러나오는 사제, 정성들여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 자주 성체 조배하는 사제,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제, 장애인과 환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사제, 사회 문제에 대해 복음적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사제, 신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제,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제, 맑은 삶을 사는 사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사제, 신자들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제가 많아지기를 간구해 봅니다.

▦ 제주교구 송동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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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긴 결과 적들이 습격해 오리라고 예고한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는 13년 동안 5명이 왕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세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었다. 여로보암 1세는 다윗 왕가와 관계를 끊고 베델과 단에 왕립 성소를 만들었는데 금으로 송아지 상을 세우게 했다(1열왕 12,29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하느님께서 뽑으시지도 않은 왕을 섬기고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겼다. 제단은 속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사람들이 하느님의 법은 지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안중에도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제사를 드려서 복을 받고 벌을 피하려고 한다.

더욱이 그들은 제사를 봉헌하는 것보다 제사 드린 후에 고기를 먹는데 더 관심이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씻는 제사가 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더하는 제사가 된다. 자기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고, 하느님께 마음을 봉헌하지 않는 제사는 하느님께서 즐기지 않으신다. 호세아는 이러한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인간은 부족하고 나약하여 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순수하게 만드시어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죄에 빠졌다. 하물며 원죄를 받고 태어난 아담의 후손들은 오죽하랴!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위하여 제사를 만드시었다. 비록 사람이 나약하고 어리석어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짓더라도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죄에서 벗어나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곧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배려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의 배려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악용한다. 하느님의 법을 아예 지키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죄에 빠져 죄를 즐기며 산다. 다만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벌을 피하기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봉헌한다. 제사가 죄를 뉘우치는 마음을 봉헌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속죄제사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한 제사를 하느님께서 반기실 리가 없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제사는 형식적으로 봉헌하면서 제사 뒤에 제물을 먹으려는 생각만 품고 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옛말처럼 그들은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하느님을 외면하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께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호소하신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받아들여 우상을 버리고 당신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향하여 그토록 호소하시며 구애하시지만 사람은 그 호소와 구애를 묵살하곤 한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대가로 시련과 고통을 당하곤 한다. 시련과 고통 역시 하느님께서 사랑을 호소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께서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까닭은 그를 통하여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은 왜 하느님께서 나를 괴롭히시고 벌하시냐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탓한다. 사람은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려 하지 않는다.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부르심을 결코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역사요 나 자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 나로부터 벗어나자. 우리의 관심을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 돌리자. 하느님께서 나를 좋게 만드셨고 기쁨의 동산에 살게 하셨음을 기억하자. 하느님께서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자. 내 주변의 삶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자.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사랑의 호소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자. 그리하여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자.

▦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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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제가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소리꾼”은 소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요, “춤꾼”이나 “씨름꾼”은 춤이나 씨름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꾼”이란 말은 상당히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붙여주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도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예수꾼”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꾼”들의 모임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되고 오염되어, 이제 교회에 예수꾼은 없고 “말꾼”이나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고 한탄하는 이도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이런 말꾼이나 구경꾼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일꾼”에 의해서 성장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일꾼을 찾으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하시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이 찾는 일꾼은 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품팔이 하는 사람,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 하루동안만 일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꾼”의 성경적 복음적 의미는 “일에 미친 사람” 즉 복음에 미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을 열심히 믿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얼핏 들으면 상당히 불쾌할 수 있지만, 사실 그 말은 이제 주님에게 합격점을 받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예배당의 경우 가장 만만하고 흔한 직분 중에 하나가 집사(執事)라는 것이 있습니다. 웬만한 교회는 절반쯤이 집사요, 많은 교회는 신자의 삼분의 이가 집사라고 합니다. 이 “집사”라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일(事)을 붙잡고(執)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한 시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사람을 집사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안 하면 좀이 쑤시는 사람, 일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희랍어로는 디아코노스-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이 봉사자를 “집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봉사자나 “일꾼”은 같은 말입니다.

또 “일꾼”을 말하는 다른 희랍어로는 에르가테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 즉 에르곤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일꾼은 일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하는 이도 피곤하고, 일을 시키는 이도 짜증스럽습니다. 물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일에 미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일 많이 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요란스럽게 떠들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인 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28절을 보면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했습니다. 믿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가 돼있지 않으면 공연히 선무당 사람 잡듯, 예수님의 이름만 더럽힙니다. 성당의 이미지만 나쁘게 만듭니다. 일꾼이란 모름지기 일에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찾는 일꾼은 사명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을 보면 일꾼 중의 일꾼인 사도 바오로가 세 번째 전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도시 밀레도스에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놓고 고별 연설을 합니다. 이 고별연설 속에는 복음 전하는 일꾼으로서의 사명감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거기에 가면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오로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면서도 예루살렘에 간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 속에서 사도 바오로가 얼마나 선교사명에 불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그토록 열성적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합니다.

여러분, 보통 사람들은 이런 불평을 합니다. “우리 성당에는 일꾼이 없어요.”그럽니다. 그 이유도 다양합니다. 작은 본당이라 없고, 이사 갔기 때문에 없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불평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것은 “일꾼을 보내 주소서”할 것이 아니라 “주여 우리를 일꾼이 되게 하소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일꾼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내가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 부산교구 김창대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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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오 9,32-38)

주님께서는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보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꾼이 모자라다니요. 둘러보면 보이는 것은 온통 빨간 십자가 불빛이고 사방에 널린 것이 그리스도인들인데요.

성체 앞에 앉아 주님께 슬쩍 물어봅니다. 주님, 요즘은 일꾼이 너무 많아서 탈이랍니다. 이제 그만 청해도 되겠지요? 그런데 더 열심히, 간절히 청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자꾸 떠오릅니다. 제대로 된 일꾼이 없다고. 하긴 모든 것 다 봉헌하고 따르겠다고 당신 앞에 서약한 저부터가 요 모양 요 꼴이니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복음은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처럼 애정을 지니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참된 일꾼들이 필요하신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세상에 일꾼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면 자기 딴에는 일한다고 얼쩡거리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밥만 축내는 놈팡이처럼 보이겠지요.

나는 어떤 일꾼일까 생각해 봅니다. 밥 벌어 먹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는 일꾼은 아닌지, 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기보다는 수없이 널려 있는 놈팡이 같은 거짓 일꾼들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을 심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주님, 제대로 일하는 일꾼이 되도록 저에게도 당신의 그 촉촉한 마음을 나누어주십시오.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 사랑으로 일하게 도와주십시오.

▦ 마산교구 백남국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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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한 해 동안 고생해서 농사를 짓고 나면 한해의 결실을 맺는 추수 때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런데 만약 추수 때가 되었는데도 일손이 없다면 농부의 걱정은 이만 저만 아닐 것입니다. 애가 탈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는 추수 때가 되면 서로서로 도와서 한꺼번에 추수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부상조 품앗이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품앗이조차 할 일꾼들이 없어, 한 해 동안 잘 지은 농사를 추수하지 못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농작물들이 말라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농작물이 말라죽는 것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추수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바로 하늘나라에 살게 될 새 백성들입니다. 지쳐하고 힘들어하며, 당신만을 기다려왔던, 당신을 믿고 따르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애타는 농부의 마음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렇게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결정적으로 당신을 도울 일꾼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예수님을 도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만 예수님을 도울 일꾼이 필요할까요? 예수님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 경제, 교육, 여러 가지 것들로 힘들어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기적, 그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 그리스도인은 전 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금방 깨닫습니다. 한쪽에선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인데 한쪽에선 배가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서로가 피흘리며 살아가는데 한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냐며 호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해도 예수님의 마음은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은 적습니다. 일꾼은 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추수할 일꾼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추수할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나 자신도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그 요청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꾼이 없으니 너희가 일꾼이 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어주겠니” 많이도 말고 매년 딱 한사람씩만 주님께로 이끌고 주님을 맛들이게 한다면 더 이상 추수할 일꾼이 없어 죽어가는 영혼들은 없을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김구노 (구노)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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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예수님의 치유

학창 시절에 국어를 배울 때 ‘한 문장 안에 쉼표와 쉼표 사이에 있는 것은 생략해도 그만인 부연 설명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라고 배웠습니다. 이것이 정확한 기억인지는 몰라도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안의 35절의 말씀을 그것에 따라 묵상해보았습니다. 가르침과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의 문장 안에서 그것을 생략해도 좋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시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라는 것 안에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전공하신 분들이 보면 경을 칠 일이고, 그리고 많은 분들이 그저 한글로 번역된 성경으로 이러한 묵상을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실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자상하시며 소외되고 병든 이들에 대한 치유의 모습 안에는 이미 그분의 가르침과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에 대한 자상한 보살핌을 통해 그들의 내외적인 병이 치유될 수 있도록 행해야겠습니다.

▦ 청주교구 여성국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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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을 원하십니다. 그 일꾼들은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세상이 그분을 미워하더라도, 그분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참 일꾼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안고 기쁘게 출발하면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일매일 건강한 날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 부산교구 박재구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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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음 선포에 필요한 일꾼이 되어야

오늘 복음으로써 마태오가 집성한 예수님의 10가지 기적사화에 관한 보도(8-9장)는 일단 막을 내리고 12제자의 선발과 파견설교(10장)가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사건으로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보도한다.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열 번째 기적이다.

그러나 복음에서 보다시피 벙어리 치유에 관한 내용(33a절)은 단 한 줄에 담겨있고, 나머지는 치유사화에 대한 군중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상이한 반응(33b-34절)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전반적인 복음선포 활약상(35-36절)을 요약하고 있다. 끝으로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제자들의 협조가 필요함을 암시함으로써(37-38절) 제자선발과 파견설교를 예고한다.

마태오가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이토록 간단하게 보도하고, 오히려 그 반응을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간단하다보니 좀 성급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돋우는 일이 있다. 마태오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벙어리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나중에 중복하여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22-24 참조) 뿐만 아니라 어제 복음(9,18-26)과 오늘 복음(9,32-38) 사이에 빠진 부분(9,27-31)도 다시 반복됨을 발견할 것이다.(20,29-34 참조)

비교적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마태오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물론 자세히 살펴 하나씩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기도 할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같다. 서로 다른 점은 두 가지의 기적사화가 9장에서는 대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12장과 20장에는 약간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문점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마태 11,2-6)에서 풀린다. 특히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5절)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메시아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적이 증언되기 전에 소경과 벙어리 치유가 선재(先在)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기적사화들을 논리적으로 한데 모아 집성하려는(8-9장) 과정에 따른 무리수(無理數)로 지적된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 복음과의 사이에 빠진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빠진 부분은 예수께서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려주시고 그의 집을 떠나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소경의 치유기적사화이다. 이 대목의 원전(原典)은 바로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 치유사건(10,46-52)이다. 물론 마태오는 원전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개작(改作)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7절로 이루어진 대목을 5절로 축약하면서 1명의 소경을 2명으로 바꾸었고, 지명(예리고), 소경의 이름(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 그리고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과 사람들의 나무람 등을 삭제해버렸다.

이로써 예수님의 권능이 뚜렷이 부각되며, 그것도 소경 1명을 2명으로 바꾸었으니 마르코에서보다 2배로 강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치유된 두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함구령(緘口令)을 내리신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들은 곧장 그 길로 달려가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린다.(30-31절)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당신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이유를 오늘 복음과 연결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마태오가 단 한 줄로 보도하고 있는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분명 앞서간 소경치유 끝에 내려진 함구령(緘口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를 똑바로 알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을 보고 군중이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보는 일이다”(33절)라고 웅성거리며 놀란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 편에 서서 같이 놀라거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34절) 하며 빈정거린다고 해서 이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기에 감탄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적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 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고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36절)일 뿐이며,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고, 예수님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도와 세상의 추수(秋收)에 필요한 일꾼이 되는 것이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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