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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산/대구/제주/전주/청주/마산]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다
조회수 | 25
작성일 | 18.07.10
[수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다

어떤 지도자들이건 훌륭한 제자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노선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것이 상례이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 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옛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열 두 부족장을 두어 다스렸듯이 같은 의미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 두 명을 뽑아 사도로 부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배계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지혜 앞에 착각하기 쉬운 점이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 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 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 그 사람의 어떤 배경이나 능력을 보아서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본시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주님께 잡힌 사람이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분부를 받고 왔을 뿐이다"(아모 7,14-15). 아모스가 하느님께 선택된 경위를 말해주고 있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모습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신 것은, 그리고 사회적 지도급이 아닌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는 것과, 또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잘 사용하여 이 공동체가 잘 발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지위라든가 하는 이런저런 문제에 구애됨이 없이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나의 지혜와 모든 능력을 어떠한 마음 자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의 모든 능력으로써 응답하며 그분의 제자로 살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 해 보자.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라면,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또한 그러한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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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공동체, 협력자가 필요하다.

어떤 공동체이건 그 공동체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협력자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구원 사업을 계속해 나가시기 위해 협력자들을 뽑으시고 사도단을 구성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사도단에서 탈퇴한 이후에 사도들의 수는 열 하나 였지만, 성서는 사도들의 수를 언제나 열 둘로 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의 후예들로 열 두 지파를 형성하였듯이 새로운 계약의 시대인 신약은 열 두 사도를 통해 영적인 백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학식이나 사회적인 지위면에서나 상층 계급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별로 뛰어난 점이 없는 사람들을 내세워 맡기셨습니다. 그 뜻을 알기란 힘들고 다만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철부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당신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볼품없는 사람들에게 악령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제자로 뽑으신 사람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이 무엇이냐 하는 것 보다는 그들이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혜와 능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쓰여질 때 큰 결실을 맺을 수 있고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길 잃은 양들을 한 울타리로 다시 불러 모으는 데는 목동의 피리와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혜나 능력은 사실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있어서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복음 전파자들은 다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 살고 있는 사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어려움과 난관은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나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와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 얽힌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 프란치스꼬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전교하기 위해 시내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큰 길과 골목길을 아무 말없이 한나절이나 돌아다닌 후 그냥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스승님, 전교는 언제 합니까?"이렇게 묻는 말에 성인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걸어다니며 전교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보았고 우리 행동을 보지 않았습니까? 만일우리가 걸어 다니는 것이 전교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을 많이 하며 다녀도 전교가 될 턱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에는 지식을 파는 선생은 많아도 인격을 전수하는 스승이 적다'고 우려합니다. 사실 우리 시대에는 가르치는 사람은 많아도 증거자는 극히 적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으려 합니다. 서로 속고 속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가요? 불신의 골은 커지고 점점 깊게 패어 있습니다. '불신의 시대'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도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고향 사람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불신에 부딪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마르 13,2-6 참조).

그러나 신앙을 가진 우리가 하느님을 마음 속 깊이 알게 되면 될수록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자라날 것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허락하신 온전한 선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만큼 더 커질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성숙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느님을 닮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보다 앞서 가신 성인들의 삶은 전혀 실패가 없거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찾고 닮고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노력에 항구하도록 해야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하고는 근본부터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는 힘들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데 누구는 작은 일에도 불평하며 빼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나 독선적이어서 도저히 신앙인이라고 바라볼 수 없는, 그래서 함께 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비록 그들로 인해 힘들더라도 그들도 하느님께서 뽑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그가 하느님 안에서 회개하기를 바라며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도 주님께서 뽑아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 그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도로 말미암아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각자의 능력을 은혜롭게 사용하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 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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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허약함을 고쳐 주도록 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부르신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들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혀주신 시몬, 그의 동기 안드레아,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 요한, 필립보와 발토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야고보와 타대오, 시몬과 유다. 예수께서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사도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스승 예수께서 명하신 일--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일 -- 하게 됩니다.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요한 10,2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심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 하나 이름 지어 불러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 때에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는 그 이름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 예언자의 일, 예언자직, 사제의 일, 사제직, 봉사자의 일, 왕직,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루가 10장 20절. 예수께서 명하신 일을 마치고 돌아온 72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가 10,20) 묵시록은 생명의 책을 말합니다.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며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묵시 3,5)

예수님께 불리워진 이름. 성세성사를 통해 불리워진 이름. 우리의 이 이름은 하늘에 기록된 성인 성녀들의 이름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성인성녀들의 이름입니다. 성인 성녀를 본받아 예수님께 불리워진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박재현(요셉)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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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12사도 선발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사도로 명하고, 이들에게 권능을 주어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갈릴래아를 무대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시던 예수께서는 곧바로 사람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이 인류, 즉 사람이라는 점이 그리스도 강생(降生)의 핵심이다. 인간의 구원협조는 하느님의 소명(召命)아래 천지창조 때부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수행되어왔다. 하느님 소명의 절정(絶頂)은 두말할 것 없이 성모 마리아의 소명이다.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교회(敎會)의 소명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배를 손질하던 어부출신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마태 4,18-22)으로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예수님의 복음과 수많은 병자치유의 기적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람들이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몰려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태 4,25)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그 많은 무리의 제자들 중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셨다. 제자(弟子)들은 많았지만 사도(使徒)로 뽑힌 사람은 열둘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많은 제자들 중에 오늘 복음에 거명(擧名)된 사람들만 사도로 선발되었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지만 마태오복음사가의 의도 또한 수긍해 볼만하다. 사도선발의 기준은 어떤 특별한 조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복음에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 집성문(8-9장)에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놀라움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적어도 이 믿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전파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使徒)로 선발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배반자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왜 사도로 선발하셨을까? 이렇게 따지자면 베드로도 멀리 못 간다. 베드로도 유다에 못지않게 스승을 배반하였다.(26,69-75)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27,3-5),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러는 이상의 가치를 지닌 순교(殉敎)로 스승을 따라갔다. 결국 선발은 예수께서 하시지만 사도로서의 실존(實存)은 스스로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며, 사도로서의 진가(眞價)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 밝혀 줄 것임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바탕으로 제각기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사도로서의 진정한 태도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병자와 노약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등 세상의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베풀며, 길 잃은 양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도는 그에게서 이름만 있을 뿐 아무 의미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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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부르심

제가 사제성소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설 요한 신부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던 저는 어느 해 배낭을 메고 혼자 부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하루는 시내를 지나게 되었는데, 식물을 좋아하는 제게 어떤 분이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진 속 나무를 보여주면서 아주 귀한 나무며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었습니다. 그 나무에 호기심이 생긴 저는 나무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그분한테서 받은 주소만 갖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농장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무 한 그루만 구하고 싶다고 했는데, 주인은 저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고향 선배님 댁에 갔다가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표정으로 그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여쭤보았더니, 신부님한테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혼자 성당에 갔고, 그때 제 생애 처음으로 만난 신부님이 바로 설 요한 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은 처음 보는 제게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현재 그 나무를 갖고 있지 않지만 아일랜드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제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시는 신부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향 선배님의 권유로 교리를 받게 되었고 예비자로 성당을 다니면서 신부님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머나먼 타국에서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신자들에 대한 섬김의 자세, 미사 전에 성당 마당을 거닐며 기도하시는 모습 등은 당시 제 삶의 진로에 동요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신부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이후 세례를 받고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가끔 당시를 떠올리며 주님의 이끄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제의 길을 걷는 지금 고귀하게 다가온 제 성소의 시작이 훗날 주님 보시기에 좋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큽니다. 여러 길 중에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사제 생활 12년째를 보내는 지금, 부르심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부르심 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사제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제답게 사는 것이고, 은총을 받는 것 못지않게 받은 은총을 잘 간직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제주교구 송동림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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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가나안 신들을 섬기기 위하여 제단과 석상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왕정이 끝나게 될 것이며, 베다웬(악의 집이란 뜻으로 베델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었기에 베델을 베다웬이라고 불렀다) 산당(비교적 높은 곳으로 제사를 봉헌하는 장소)은 무너지고 제단과 석상들이 부서질 것이다. 사람들은 산과 언덕이 무너져 덮어달라고 외칠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심지 말고 정의를 심어라. 그러면 사랑의 열매를 수확할 것이다. 주님께 매달려라. 그러면 주님께서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조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조각가였다. 그래서 집안에는 여러 가지 목상과 석상 등이 있었고, 우상도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데라가 외출한 틈을 타서 아브라함은 집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다 때려 부수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데라가 화가 잔뜩 나서 누가 이 상들을 다 때려 부수었냐고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방에서 잠을 자다가 들으니 대장 우상이 다른 우상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 때려 부수더라고 대답했다. 데라가 기가 차서 어떻게 우상이 말을 하며 손과 발을 쓰면서 움직일 수 있냐고 아브라함을 다그치자, 아브라함은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이 무슨 힘과 능력이 있다고 우상을 만들어 파냐고 말했다고 한다.

우상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을 만들어 모시고, 그 앞에 꿇어 절하며 소원을 빈다. 이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함이다. 보고 만지고 느끼기를 원하는 인간의 감각적 욕구를 채우고, 자신의 필요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은 우상을 만든다. 사람이 우상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사람 안에 있고, 사람 자신이 곧 우상이다. 자신이 우상이라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과 우상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우상을 버려야 하고, 자기라는 우상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고, 그렇게 기도하셨다(마태 26,39).

제자들에게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7,21) 하고 말씀하셨으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다(마태 12,50).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들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태 6,33).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겼다. 그 결과 그들은 산과 언덕더러 무너져 덮어달라고 외칠 정도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상숭배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처참함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우리를 좋게 창조하신 아버지이시며, 우리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자. 하느님을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자.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1,11-13)

▦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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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스라엘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여러 권능을 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파견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과 사마리아 도시에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라."

이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또 우리의 사명인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번 예비자 교리반에 몇 명이 들어왔는지, 총 몇 명을 선교했는지가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으면 '참으로 교우들이 열심히 했구나!' 그렇지 않으면 '뭐했느냐!' 하는 식입니다.

사실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사명입니다만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입교를 많이 시켜야하는 양적인 면에 치우치는 것은 문제가 많이 있다고 봅니다. 양적인 성장에는 내면적인 문제가 따르는 것입니다. 교우들 숫자는 늘어 나는 반면 교회의 질적인 면은 떨어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세상의 악과 대항하며 존재하는 교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인데 양적인 성장에서 비롯되는 무질서, 혼란, 세속화 등의 모습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에 들어오면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기는커녕, 좋지 않는 세상의 것을 계속 유지, 추구하면서 이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밀어내려 하는 경우, 하느님? 교회?신앙은 안중에 없고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겠지만 속으로 교회에 오는 이유가 많은 사람들을 알아서, 세속의 힘있는 자를 알아서 생활에 보탬이 될까해서, 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 좋아서라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사목자이고 교우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가르치려 한다면, 교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언짢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추세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서는 사목자나 교우 모두가 더욱더 노력해야 합니다. 말로써 꼬시다시피 전교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고 복음적인 삶을 먼저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전에 주신 권능을 우리들도 받아들여서, 나쁜 마음을 몰아내고 힘없는 자, 병약자에게 복음적인 삶으로써 다가가 전교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비추어 봤을 때, 교회 밖의 선교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방인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중의 길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길 잃어 하느님을 잊고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더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혹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 이웃, 애인이 있다면 이들을 포기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나아가 배척한다거나 스스로 양우리를 뛰쳐나간 사람이라면 힘이 들겠지만, 조그마한 이유나 상처로, 실수나, 몰라서 길 잃은 사람들을 우리는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 31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과 루가복음 16장 19절에 나오는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를 봤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한 곳에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을 하면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당연히 쉽지 않겠죠. 그러나 우리 자신이 더욱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세속의 유혹에 빠져 허덕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그 불쌍한 영혼들을 다시 주님께 모아 들이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 부산교구 우종선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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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열두 사도

어떤 존재든지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에야 비로소 참된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불립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불러주는가, 내가 누구에게 불리는가에 따라 나는 그에게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불렀을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든든한 보호를 받게 되는 가장 소중한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지만, 그 부르심 앞에서 늘 스스로의 모습에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부족한 모습에 두려워하거나 도망치려 하지 마십시오.

오늘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열두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우리처럼 부족한 죄인의 모습이었고, 그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했던 공생활 내내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약한 믿음, 경솔한 모습, 이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열두 사도는 그 부르심을 점점 더 올바로 살아서, 마침내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많은 어려움과 희생들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불러주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에 옮긴다면, 열두 사도들처럼 완성되어 가는 삶,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 안에서 변해야 합니다.

▦ 청주교구 여성국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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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어릴 때 ‘예수께서 유다를 제자로 뽑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당신을 배신할 것도 모르고 유다를 뽑으시다니, 하느님도 실수할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당신 구원사업을 위해 악역을 맡을 인물이 필요해서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궁금증도 사라져 갔습니다. 내 삶에 그런 질문이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사는 것이 엉망이고 내 삶이 유다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의문은 다시 나를 찾아왔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유다를 뽑으셨을까? 성체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같은 이 시대의 유다들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당신의 공동체는 좋고 훌륭한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를 품어주고 기다려 주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유다처럼 자기의 길을 간다 하더라도 당신처럼 내치지 않고 품어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시면서.

그런데 참 희한합니다. 가만히 성체 앞에 앉아 있으면 온갖 나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저 같은 유다도 없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의 조그마한 허물에는 또 왜 그리 쉽게 판단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게 되는지요.

오늘 하루, 이 세상의 모든 유다들을 위해 그를 제자로 뽑으신 당신을 기억하며 조금 더 너그러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 마산교구 백남국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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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신화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오심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내려주신 마지막 처방이십니다. 우리는 이 처방으로 죽음을 택할 수 있고, 영생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는 반면 전혀 그를 믿지 않고 핍박하는 부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일에는 ‘중간쯤’, ‘적당 히’ 또는 ‘그저 그렇게’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말 그 대로 구세주이시고 구속자이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강한 힘을 믿고 의탁하는 쪽에 서지 않는다면 그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박해하는 쪽에 설 수밖에 없는, 단호하고 아주 무서운 일입니 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전해 듣고 예수를 향해 “몰려 들며” 앞 다투어 예수님을 만지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모한다할지라도 그 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하느님을 귀찮게 하고 피곤하게 할 뿐 입니다. 내 욕심을 위한 도구로 그분을 사용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빵을 받고 말씀을 듣고 탄복하며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걸려 넘어진 사람도 많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 명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오심은 큰 축복이기도 하지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버리고 따라 나서는” 단호함이 필요 할 것입니다. 다른 필요나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리운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만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은 바로 “나를 따라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 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홀로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는 우리들을 불러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 두 사도를 이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구원사업을 이어가도록 명령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위해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과 세상에 하느님을 알리는 일은 하늘의 천사에게 맡겨지지 않고 바로 ‘나’, ‘우 리’에게 맡겨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의 임무는 이렇게 막중합니다.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 가 장 도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이 세계를 정복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내려져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아니라 나 하나의 완전함이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하느님은 믿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이렇게 넓고 큰 안목을 지니는 일입니다. 좁고 근시안적인 내 시야를 넓혀서 하느님의 왕국에 든든한 반석이 되는 것이 우리의 할 바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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