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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수원/대구/청주]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조회수 | 39
작성일 | 18.07.12
[부산]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엄격한 선교수행지침(10,5-15)을 하달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암시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당장에 이와 같은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받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형태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 모양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성령에 의한 변호보장 약속이며(20절), 둘째는 가족의 고발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미움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빛나는 승리나 커다란 효과가 보장되기 보다는 처절한 박해가 준비되어 있음은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제자들도 스승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 가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시며,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천상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무관심과 적대심을 만나게 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심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적대심은 박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는 복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때 복음이 취하는 태도는 박해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이리의 다른 점이다.

복음의 강점(强點)은 오히려 어린양과 같은 약함이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이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는 약하지만 청빈과 사랑과 봉사에는 강하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세상과의 법적 조약이나 협정을 통하여 확고한 지위와 특혜를 영위하고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타부’ 등의 방패를 세상에 내걸고 온갖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신부(神父)인 나 자신도 그 맛에 젖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복음선포자로서 복음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는 자신이 인간적인 인정과 보호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적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별다른 의미 없는 그 무엇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 복음이 지향하는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종국(終局)에 가서는 교회와 복음의 결별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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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시면서 가족 안에서까지도 서로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을 철저히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주님께서는 또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 하시며 무조건 맞서기보다는 조금 더 지혜롭게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박해는 없을지라도 지금 역시 수많은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슬기롭고 무엇에 순박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우리의 적으로 돌리지 않는 슬기로움이 아닐까요? 또한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믿음으로 온유하게 박해자들 앞에 맞설 수 있는 여유로움이 아닐까요? 믿는 구석이 있으면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 앞에서 온유해질 수가 있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부끄러운 기억이 많이 떠오릅니다. 온유해야 할 상황에서 얼마나 자주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는지요. 그만큼 자신감이 없었다는 뜻이겠죠. 또 슬기롭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시점에 얼마나 무식하게 몰아세우며 그들에게 주님께 대한 반감을 심어주었는지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슬기로움과 순박함보다 더 효과있는 무기가 있을까요?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말씀처럼 저의 삶이 슬기롭고 순박하게 성령 안에서 신앙을 잘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 마산교구 백남국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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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가족의 건강과 생계를 위한 걱정을 하게 되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남편과 자식들의 대한 걱정으로 애를 태우게 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애들이 무슨 걱정거리가 있느냐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자녀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몸소 체험하면서 걱정거리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특별히 입시라는 관문을 앞두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을 오고가야 하는 이 땅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걱정과 근심은 말이 아닙니다. 이렇듯 모든 이가 저마다의 관심과 걱정거리가 있듯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걱정과 관심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여벌 옷이나 신발, 지팡이 그리고 돈주머니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복음 선포자로서의 몸가짐과 행동 양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복음 선포자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고통과 박해 앞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성령께 맏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걱정은 모든 근심과 슬픔 그리고 고통의 근원입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미리 걱정을 한다 해서 그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해서 하루하루가 바늘방석 같고 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일 것입니다. 따라서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내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에 용기를 가지고 걱정과 근심 그리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 맹자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이절 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고 외롭다는 것은 사람이 걸어가야 될 길을 말한다. 그 길을 버리고 걸어가지 않고 그 마음을 버리고 찾을 줄 모른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사람은 닭이나 개를 놓치면 찾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놓치면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그 놓친 마음을 찾는 데 있을 뿐이다.” 기원전 3~4세기의 맹자님과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렇듯 마음을 찾는 일에 몰두했듯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잃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되찾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 담긴 메시지도 결국 인간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 신앙인이든 신앙인이 아니든 누구에게나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하루도 만나는 사람마다 하시는 일마다 그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보다는 기쁨과 즐거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 부산교구 최요섭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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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현대의 박해의 의미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모략하여 선전한 데서 오는 것 이었다.

1.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세우신 성체 교리에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받아 마셔라. 이는 내 피다" 하신 말씀을 악용해서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고 했던 것이다.

2. 신자들을 비도덕적인 무리들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신자들이 집회를 가지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축성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었는데, 이 아가페, 즉 사랑의 잔치라는 것을 불미스러운 행위라고 모략했다.

3. 신자들을 방화범이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은 세상 끝날에 불로 망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방화범이라고 했다.

4. 신자들을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면 남편이 아내를 떠나고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등등의 말이 나오는데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중상 모략하여 박해했던 것이다.

5. 신자들을 당시 사회제도를 파괴하는 자라고 박해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노예문제였다. 당시 로마제국 안에는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이 노예들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를 인간으로 평등하게 한 형제, 자매로 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노예 해방이나 노예제도를 비난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교회 안에서 노예를 똑같은 사람으로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나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제도에 대한 큰 도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박해의 큰 원인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면서 그의 석상 앞에서 분향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당시 전 유럽을 일인 통치하에 두고 세력확장을 하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권위있는 신적 존재가 필요했는데 그런 인물로 로마황제를 세웠던 것이다. 로마는 어디를 가나 평화, 신뢰를 받는 정치, 시민의 질서를 꾀하고 해적, 산적, 불량배를 소탕하여 정의로운 혜택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 황제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고 1년에 1번은 향을 드리라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주"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국가 시책에 위배 된다는 이유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이러한 요인으로 희생되었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떠한가? 지금의 박해를 우리는 어떻게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보자. 현대에는 이러한 양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체면을 내세워서,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서, 그리고 여러 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게끔 유인하는 요인들을 통해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이것들을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이기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대한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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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떠나 보내시는 예수님의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 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슬기와 양순함이 닥쳐올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쇠입니다. 비둘기처럼 양순하여라. 200주년 성서는 "순박하여라"로 번역합니다.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 것, 흠잡을 데 없이 순결한 것, 이것이 양순함의 의미입니다. 죄 없이 순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은 닥쳐올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순결함, 양순함, 깨끗함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슬기로움은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서는 현명함을 이렇게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마태 2, 24)

2.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마태 24, 46)

3. 신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잔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슬기입니다. (마태 25, 2 + )

순결함, 깨끗함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실행하고 깨어 준비하고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어려움과 위험을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고린 4, 10) 그리스도를 믿음이 슬기며 현명함입니다.

▦ 대구대교구 박재현(요셉)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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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예수님이시라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8년 7월 13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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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제자는 걱정하지 않는다

‘어바웃 타임’(2013)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하는가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팀’은 성인이 되는 날 아버지 ‘빌’로부터 그 집안은 대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말해줍니다. 실제로 그 방법대로 해 보니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후로 팀은 실수하거나 놓친 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실수를 바로잡고 사랑하는 여인과도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릴 수는 없습니다. 팀이 과거로 돌아가 남의 여자를 가로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면서 시간을 되돌려 무언가를 얻게 되면 대신 잃게 되는 것도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건, 저렇게 하건 시간이 지나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을 깨달아갈 때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깨달은 시간을 돌리며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바로 일상을 한 번 더 살아보는 것입니다. 팀은 변호사인데 재판이 있는 날은 긴장하여 출근하고 재판에 간신히 이겨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루를 한 번 더 살아보니 처음 살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물건을 살 때 친절하게 인사하는 점원의 얼굴에 자신도 미소가 띄워지고 법원 건물이 그렇게 아름다웠는지 몰랐다며 감탄해하고 재판 때에도 동료와 장난을 칠 정도입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돌아오니 아내까지도 고생한 남편을 기쁘게 맞아줍니다. 같은 하루인데도 마음가짐에 따라 피곤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시간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매 순간을 이미 살아본 것처럼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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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걱정 근심 속에 똑 같은 하루를 힘들게 살지만 어떤 사람은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현재를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시간여행으로 얻은 교훈은 어차피 내가 노력해봐야 바뀌는 게 없기 때문에 현재를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지배해보고 나서 깨닫는 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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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예고하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재판정에 넘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이란 그냥 현재를 지켜보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받을 박해를 피하려고도 하지 말고 어차피 주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 대신 말해 줄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옷매무새부터 시작하여 온갖 잡다한 것에 신경을 쓰고 만나서는 끊임없이 무슨 말로 이어가야하나 부담을 갖습니다. 만남이 끝나고 나면 실제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허무함을 느낍니다.

박해가 오면 받고 할 말은 주님이 해 주실 테니 아무 생각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당신이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내가 해서 더 잘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고 그 결과는 그것이 어떻든 받아들이기만 할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다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안 좋은 일은 내가 현재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동자가 큰 스님에게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도 없자 스님에게 따졌습니다. 스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미 다 알려주었는데도 무엇 때문에 따지냐고 말합니다.

밥 차려주면 먹어주었고 인사하면 받아주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때 동자스님이 골똘한 생각에 빠지자 주지스님은 크게 노하며, “이놈아, 생각을 하면 어떡해. 그럼 다 망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동자는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빠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불법(佛法)이고 도(道)라는 것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놈이 좋은 결과를 내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 하루를 망치게 합니다.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참다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8년 7월 13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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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양들”과 “이리떼”의 의미를 보면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육에 따른 악한 것이 그 안에 항상 들어 있기 때문에 선할 때는 양이라고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양과 같다고 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리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대하라고 하신다. 뱀은 지혜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악 가운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악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잔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동물의 잔인함은 인간의 잔인함에 못 미친다. 이성적인 인간이 잔인하게 굴면, 그 잔인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23절)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를 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다른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그 자격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박해를 당하면 당장 위험에 뛰어들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죽게 되면 그들에게 배워 은혜를 누리게 될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 안에 확고히 뿌리를 박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자꾸 사람의 일로 돌아가려는 나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삶이며, 우리는 이 시대에서 순교정신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순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8년 7월 13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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