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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성모찬송’(Magnificat : 찬미하다. 찬양하다)
조회수 | 125
작성일 | 22.12.21
[인천]  ‘성모찬송’(Magnifi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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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강화도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그렇게 눈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물론 저 역시 다른 젊은이들처럼 눈을 좋아했었던 적이 있었지요. 괜히 눈이 오면 가슴이 설레고, 강아지처럼 눈 위를 밟으면서 마구 뛰어다니는 것을 신나했던 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이곳 갑곶성지에서 생활하면서 눈 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서 이 넓은 지역의 눈을 쓰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강화도에 첫눈다운 눈이 왔을 때에도 그렇게 반갑지 않았답니다. ‘왜 눈은 이렇게 많이 와서 나를 힘들게 하는거야?’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눈을 쓸었지요. 그러다보니 작업의 능률도 그렇게 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6시간 동안 비질을 한 뒤에나 겨우 성지의 눈을 모두 치울 수 있었습니다.

어제 또 눈이 왔습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바로 그 순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말했던 어떤 분의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하긴 그렇지요. 제가 짜증을 낸다고 해서 눈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햇볕이 비추어져서 왔던 눈을 모두 녹여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쓸지 않고 둔다면, 오시는 순례객들에게 커다란 불편을 드릴 것입니다.

결국 눈을 쓸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왕 치우는 거,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눈을 치웠습니다. 가사를 몰라도 상관이 없었지요. 그냥 가사를 만들어가면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긴 저밖에 없는데, 가사가 틀리면 어떻고 박자가 틀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에 눈을 쓸 때는 6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유쾌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니 그만큼 일의 효율도 오르고, 시간 절약도 할 수 있게 되더군요.

어떤 일이 있어도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상황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즉, 할 수 없어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이 하길 잘 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등은 바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성모찬송’(Magnificat)이라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로 이러한 노래를 부르실 정도로 행복하였겠는지……. 아니지요. 어쩌면 최악의 상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도 ‘성모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 바로 이러한 마음이 예수님을 모실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은 바로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그래서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는 자리하십니다.

이제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나씩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오실 자리가 더욱 더 넓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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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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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구하신 주님 생각으로 제 마음은 울렁거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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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서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말을 기억하고 걸음을 서둘러서 “아인카림”이라는 유다 산골 마을로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내용이 어제의 복음 말씀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며 성령을 받아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었고 말할 수 없는 감격에 겨워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불러 드립니다. 바로 오늘 복음 내용이지요. 우리는 이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캇(MAGNIFICAT,찬양하다)”이라고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1,46-47)

마리아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 설레인 적이 있으신지요? 옛날 연애하던 시절에 상대방을 생각하며 설레였던 적은 있어도 하느님을 생각하며 설레인 때는 그리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알게되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성체 앞에서 기도하고 또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알아 가는 그 기쁨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체험할 수 있는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깊은 고요와 더불어 머리 속을 꿰뚫는 상쾌한 충만감에 젖게 되지요.

루카 복음서에는 이렇게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 드리는 찬미가들이 등장하는데 "즈카르야의 노래"(루카1,68-79), "시메온의 노래"(루카2,29-3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 찬송"(루카1,46-55)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 노래들을 매일같이 기도 속에 담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뭔가를 해 달라는 요구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올 수가 없지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 달라고 하느님을 보챕니다. 어느 신부님의 강론에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제목의 인용 글을 보았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라면 하느님은 구세주를 위대한 과학자로 보냈을 것이다. 우리가 최고로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쾌락이라면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가수나 코미디언 같은 연예인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하느님은 메시아로 위대한 경제학자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이다.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해서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아픔과 보복에서 건져주실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실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께 이것저것을 청하며 졸라대지만 실상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청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곧 없어지게 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더 이상 청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큰 은총을 깨달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청하는 내용들은 일신상의 안위와 복을 청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너무나도 설레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리아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희망을 지니고 살 수 있기를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성모찬가를 보면서 다음 몇 가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루카1,51) 하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힘겹게 살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힘겹기만 한 것일까요? 왜 그 누구도 예외가 없이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이런 상황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인지 의문이 들지요. 이에 대한 대답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보시니 참 좋게"만드셨지만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이 세상을 힘들고 어려운 혼돈의 장으로 만들고 말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조상의 죄를 대물림 받고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교만의 죄가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가 하면 하느님보다도 더 커지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도 지속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학과 재물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지요.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보고자 했던 그 교만의 결과가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간 제일주의의 사고는 혼란과 고통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가치는 점점 땅에 떨어지고 끝없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한 갈증 속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만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이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싶어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지은 교만이라는 죄의 대가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 때 이 혼란과 두려움은 극복될 것입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는 "주님께서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성모님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1,52)라고 노래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권력 있는 자들을 흩어 버리신다는 내용이지요. 예수님 시대에 로마의 권력층과 또 그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기생했던 이스라엘의 지배층들은 백성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면서 마치 그들이 승리하는 것 같은 세상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흩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준 권력이 영원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것을 잠시일 뿐 결국 하느님께서는 부정과 불의에 물든 자들을 내치시고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불러 위로해주실 것이라고 성모님은 노래하고 계십니다.

또 성모님은 세 번째로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3)고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자만하고,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더욱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헐벗음과 굶주림 끝에 병들어 죽어가고 있지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불의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어 주실 것을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실은 이것은 성모 마리아의 노래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핍박받고 힘겨웠던 모든 사람들의 간구이기도 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살아보려는 것은 그 삶을 끝없는 고통과 갈증으로 내모는 것이며,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너무나도 큰 특은을 입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며칠 뒤에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소원을 채워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호의호식해서도 안 되며,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고 불의한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들 안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면 그것이 주님이 오시는 성탄이고, 그곳이 성모님의 찬미가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성탄은 나의 욕심을 채우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고 또 하실 일들을 우리가 대신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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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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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청년이 카페에 들어갔다가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 노트북에 푹 빠져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분명히 노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에 감탄하였지요.

‘무엇을 하시나?’하고 노트북 화면을 보니, 요즘 유행하는 최신 게임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게임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감탄한 청년은 이 노인과 이렇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아까부터 어르신을 지켜봤는데 컴퓨터를 정말 잘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그거야 하루에 12시간 이상 게임을 한 덕분이죠. 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게임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굉장하세요. 그 나이에 정정하신데도 기계도 그렇게 잘 다루시다뇨. 실례가 안 된다면 연세를 여쭤봐도 될까요?”

이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물여덟인데요?”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여기에는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행동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자기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행동보다 좋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시고, 성무일도에서 늘 바치고 있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노래의 한 가운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라고 고백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 잉태는 처녀의 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무시무시한 간음법에 거부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전능하신 분의 큰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게 된 것이고, 더불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을 잘 떠올려 보십시오. 결과만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자기 행동이 옳을 수 있도록 늘 성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좋은 결과가 따라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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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2년 12월 22일
  |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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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옹달샘이 있었습니다. 이 옹달샘의 물맛은 너무나 좋아서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옹달샘을 찾아와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 옹달샘을 포함한 주위의 땅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을 마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자기 땅에 있으니 자기 것인데 공짜로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혼자 이 물을 마실 생각으로 옹달샘 주변에 높은 울타리를 쳤습니다. 이제 물을 마시려면 울타리에 설치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주인이 항상 문을 커다란 자물쇠로 걸어 놓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옹달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옹달샘의 물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가 이 옹달샘은 완전히 썩어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옹달샘의 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옹달샘 물은 계속 퍼내야 새로운 물이 계속 나오는 것인데,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서 물을 퍼낼 수 없었으니 고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서 썩은 것입니다. 땅 주인은 이 사실을 모르고 그저 혼자만 독차지 할 욕심을 부렸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자기만 소유하고 마실 수 있으니 뿌듯한 마음도 생겼겠지요. 그러나 혼자만을 위한 욕심이 결국 자기 역시 좋은 물을 마시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이러한 욕심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만 잘 되면 그만, 나의 사리사욕만 채울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나요? 물론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욕심이 나만을 위한 욕심이 될 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욕심이 될 때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기존의 질서가 역전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제일이라는 세상의 질서가 역전되어, 이제는 오히려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 안에서 잘 살아가는 길은 세상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를 채우는 욕심이 아니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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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15년 12월 22일
  |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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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마니피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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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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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성구 마리아의 마니피캇은 매일 성무일도 저녁기도 때 바칩니다. 이 성구에서 마리아와 태중의 아기 예수님의 교류가 절로 느껴집니다. 신앙인들이 도달할 믿음의 세계를 펼쳐 보여 주는 듯한 기도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요한이 태어나는 것을 보시며 감격 감사했을 겁니다.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믿음이 바로 신앙인 마음 자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품안에서 두려움 없이 안심하고 기뻐하며 살게 되죠.

하늘의 뜻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며 계획이고 안내며 구원입니다. 신앙인들의 속마음과 자신감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는 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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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정 신부
2022년 12월 22일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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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관행(慣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도, 더러 잘못된 점이 있어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니 그냥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병환자,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세리, 창녀, 이방인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불평하지 말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그리 된 것이라고 체념하고 살라고 합니다. 천동설은 당연한 관행이었습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는 것을 보고, 저녁이면 태양이 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작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 관행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단죄를 받았습니다.

관행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재물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예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행은 가난한 이에게는, 아픈 이에게는, 이방인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였습니다.

‘관습(慣習)’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제게 관습이라는 말이 강하게 다가왔을 때가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행정수도를 옮기는 문제가 쟁점이 된 적이 있습니다. 행정수도를 옮기려는 정부의 의지가 있었고, 행정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행정수도를 옮기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판결의 주된 이유는 ‘관습헌법’이었습니다. 서울이 행정수도인 것은 관습헌법이라고 하였고, 헌법에 그리 되어있으니 옮길 수 없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수도권에 전 국민의 50%가 넘게 살고 있습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시설이 수도권에 몰려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수도권으로 몰리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교구를 분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동이 적었던 농촌시대와 중세시대에는 합리적인 분할입니다. 그러나 교통이 발전하고, 사람의 이동이 빈번한 현대사회에서는 속지주의라는 관습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떨어진 인간을 굽어 살피시고 저희를 구원하시려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구세주의 강생을 경축하며 마침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생명에게 주어지는 관행입니다. 관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관행과 관습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죽음이라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관행, 관습, 율법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위선과 가식을 일삼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비난하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행과 관습을 버리고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관행과 관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러나 관행과 관습이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보호막이라면, 그러한 관행과 관습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이방인에게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는 관행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따를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이방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관행과 관습을 버릴 수 있다면 매일의 삶이 성탄입니다.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며, 저승으로 내리기도 저승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주님은 가난하게도 가멸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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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2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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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수도회] 구원의 빛  [4] 480
1593   [부산/전주/광주/청주] 돌아봄의 눈은  [4] 579
1592   [수원/원주/대전]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3] 78
1591   [인천/서울] 그리스도를 평생 기다려왔던 한 분  [5] 509
1590   (백)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독서와 복음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  [8] 2262
1589   [수도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77
1588   [광주/부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1] 550
1587   [수원]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65
1586   [인천/서울] 내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벽은  [2] 685
1585   (자) 대림 12월 24일 독서와 복음 (즈카르야의 노래)  [8] 2214
1584   [수도회]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  [3] 549
1583   [청주/전주/광주/부산] 아기의 이름은 요한  [4] 687
1582   [의정부/대전/수원] 그리스도인의 현실  [3] 68
1581   [서울/인천] 이제 곧 성탄입니다  [4] 685
1580   (자) 대림 12월 23일 독서와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지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  [6] 2500
1579   [수도회] 심연(深淵)의 근저(根底)까지  [8] 126
1578   [광주/전주/부산/청주] 마리아의 노래가 현대 여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4] 128
1577   [수원/의정부/대전]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3] 104
  [인천/서울] ‘성모찬송’(Magnificat : 찬미하다. 찬양하다)  [5] 125
1575   (자) 대림 12월 22일 독서와 복음 (마니피캇 ; 성모님의 노래)  [8]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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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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