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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벙어리 고침-추수할 일꾼]
조회수 | 2,362
작성일 | 08.07.07
호세아 예언서 8,4-7.11-13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4 “이스라엘이 임금들을 세웠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대신들을 뽑았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신상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망하려고 한 짓일 뿐이다.
5 사마리아야, 네 송아지를 내던져 버려라.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른다. 그들이 언제면 죄를 벗을 수 있을까?
6 송아지 신상은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7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줄기에 이삭이 패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알곡이 생긴다 하여도 낯선 자들이 그것을 집어삼켜 버리리라.
11 에프라임이 제단들을 많이도 만들었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그 제단들은 죄짓는 제단일 뿐이다.
12 내가 그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많이 써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낯선 것으로만 여겼다.
13 그들은 희생 제물을 좋아하여 그것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지만,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야 하리라.”

마태오 9,32-38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묵상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일할 곳은 많은데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예수님의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그 일은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알리는 일입니다. 쉬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생 한 사람만을 신앙으로 인도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기쁨에 있습니다. 우리는 참행복을 얻어 간직하려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삶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거나 믿음을 잘못 해석하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의 하느님은 무엇보다 밝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삶의 행복을 알려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은총과 연관된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 있는 전교가 됩니다. 나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면 강하게 전할 수 없는 법입니다.

최근 들어 신앙생활을 멀리하는 교우가 많아졌다고 걱정합니다. 신앙이 짐스럽고 귀찮게 느껴지기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이 있는 것이지요. ‘저 사람은 진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구나.’ ‘저 가정에는 정말 하느님의 보호가 있구나.’ 이러한 느낌을 주는 교우가 많아져야 합니다. 그들이 진정한 ‘주님의 일꾼’입니다.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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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변덕을 다스리는
확고한 믿음의 신앙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군중들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신기해하면서 경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독기에 찬 눈으로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의 행동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순수하고 단순했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환호와 찬미를 아낌없이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부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하고, 가장 올바르게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의 왜곡된 생활을 비판하고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의 자세는 예수님의 올바른 행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다면 날씨가 찌푸려져 있어도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이나 멸시보다는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쌓여 있다면 아무리 날씨가 쾌청해도 짜증과 불만투성이의 얼굴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웃의 선행에도 인정할 줄 모르고 비웃음과 증오감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바리사이파와 같이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 자세는 자기 스스로가 다스려 가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마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으로 충만 된 삶을 살아가겠지만,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걱정과 불안으로 뒤덮인 암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하셨고, 지금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계십니까?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지금 추수할 것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추수할 일꾼에 해당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니 깊은 고민에 빠져듭니다. 어떤 때는 추수할 것에 해당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추수할 일꾼에 해당되기도 해서 말입니다. 다시말하면 내 마음은 오늘복음에서 "군중들의 마음'인가, 바리사이들의 마음인가?...라는 질문에 둘다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 묘한 것인가 봅니다. 날씨에 따라 마음이 변하듯이, 하느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이렇게 왔다갔다 해서야, 감히 그분께 아멘이라고 진정으로 부를 수 있을지......

그러면 왜 이렇게 신앙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측은지심"아라고.... 즉 성서의 말씀으로 인용하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바라볼 때 측은지심이라는 기초 위에서 우리 마음을 쓴다면, 아마 모든 것이 용서되고, 사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측은지심도 어떤 때는 십자가 같이 넓고 깊으면서도, 또 어떤 때는 밴댕이같이 작아지곤 합니다. 결론은 내 마음이 아직도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직도 하느님을 아는체 할 뿐이지, 실상은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세상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와 많은 예언자들을 파견하시어 인간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셨고, 신약에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을 가르치셨으며, 그리고 성령시대에는 마침내 성령을 보내시어 가르침을 깨닫고 전할 능력을 주시어, 사도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땅 끝까지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오늘복음에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인류를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며,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영(靈)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땅 끝까지 당신을 증거하도록 하늘나라 복음의 전파 사명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자비와 구원의 역사는 바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크신 사랑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추수할 일꾼을 모으는 것, 즉 이웃에게 복음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전파라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지식이나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이웃에게 측은지심을 가지고 대하는 관심입니다. 관심으로 이읏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심이 바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군중의 마음으로, 때로는 바리사이같은 마음으로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느냐!!!"...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아멘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 보나와 함께하는 복음 묵상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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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꺾이고,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이 예수님 시대에도 많았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에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 세력에 기대어 편하게 살고 싶은 이들과 당장 눈앞의 이익을 얻으려고 이방인의 신상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일삼는 이들, 속된 세상 속에서 그래도 율법을 지키고 경건하게 살며 종교적인 권위를 내세우던 이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힘들면 당장의 내 실속만 챙기는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은 단순히 병자와 허약한 이들만이 아니라 마귀가 들린 사람들을 향해서도 표현됩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귀의 세력에 동조한 이들은 송아지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현혹하고, 희생 제물을 좋아하며 그 고기를 받아먹는 거짓 예언자들과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이념으로 백성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지도 세력과 늘 맞서 싸우셨습니다. 개인의 단순한 윤리적 죄보다 그들이 악과 타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세상의 악과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개인의 잘못보다는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 놓은 악의 결과들이 많습니다. 경제적 양극화와 빚에 떠밀린 서민들, 가진 자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가난한 이들이 일어설 길을 없애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이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보여야 할 때가 아닐까요?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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