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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조회수 | 2,302
작성일 | 08.11.11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만한 글을 인터넷에서 보아서 이 지면을 통해서 소개합니다.

어느 부자가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재물도 많이 모았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는데, 이제 제 나이가 80이라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의 재산을 반 뚝 떼어 주님께 바치겠사오니 제 목숨을 조금만 더 연장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대답해주셨답니다.

“그래? 네가 전 재산을 다 내게 준다고 했으면 더 오래 살도록 해줬을 텐데, 반을 주겠다고 했으니 내가 1천년만 더 살게 해주마. 마음에 드느냐?”

이 부자는 주님의 이 대답을 듣고서 너무나 기뻤지요. 20년만 더 살게 해 주셔도 감지덕지 할 텐데, 자그마치 천년이나 더 살도록 해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서 이 부자는 동네방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벌여서 자신이 기도한 내용과 주님의 응답을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 재산의 반을 뚝 데어서 성당에 봉헌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이 부자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주님께 기도를 하면서 항의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님과 1천년을 약속하셨다는데, 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 3장 8절을 읽어 보렴. 나는 분명히 약속을 지켰다.”

아들은 얼른 성경을 펴서 베드로의 둘째 서간 3장 8장을 읽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사실 이 부자처럼 우리들은 주님께 참으로 많은 것을 청합니다. 그런데 내가 청하는 그것들이 과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셨지요. 왜냐하면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철저히 나의 영광만을 떠올립니다. 그 과정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떠날 수가 없으며, 내 안에 욕심과 이기심을 버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행복과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욕심에서 벗어나 보다 더 겸손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러한 겸손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증거하는 제자의 모습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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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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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다보면,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빨리 시간이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또한 내가 빨리 도달하고 싶은 어떤 일들이 있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내일 모레 있을 수능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시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이 수능을 더 이상 체험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득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하나 생각납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기의 연인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초조했지요. 바로 그 때 어떤 회색의 난쟁이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 젊은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묻는 것이었어요. 이 젊은이는 자기의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이 노인이 단추를 하나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추를 옷에 붙여서 오른쪽으로 돌리면, 당신은 시간을 먼저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졌어요. 이 젊은이는 너무나도 신기했고 꿈같았지만, 혹시나 하고서 자신의 옷에 단추를 붙이고는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사랑하는 연인이여, 빨리 와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고대하던 연인이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도 신기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단추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사랑하는 연인과 빨리 결혼하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말하기가 무섭게 성대한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집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집이 세워졌고, “아이를 원한다.”라고 하면 몇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또 “포도밭이 있었으면...”하면 포도밭이 생겨났습니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 희망의 단추를 돌렸지요.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는 이미 백발노인이 되어서 자기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요.

성급하게 미래를 먼저 가진 그 동화 속의 젊은이는 처음에는 행운인 줄 알았지만, 죽음까지도 먼저 얻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미래에 빨리 다가가고 싶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원 같은 곳에 가서 점을 보기도 합니다. 아마 내일 모레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도 희망의 단추를 가지고서 이렇게 미래에 빨리 다가가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그 동화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에게 희망의 단추가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행운이 아닐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주님께 모두 내어 맡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종과 겸손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에 보다 더 충실할 수 있고, 또한 늘 편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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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부모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진흙구이 오리 전문집’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곳 중의 한군데이거든요. 그리고 좋아하시는 이유는 맛도 좋지만, 그곳 종업원들이 연세 드신 분들에게 특별히 친절하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종업원들이 부모님께 말합니다. “아니,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저는 그냥 인사치례로 들었는데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요즘에 노인들에게 오랜만에 왔냐면서 반기는 곳이 어디 있냐?”

그리고 계산을 끝내고 갈 때에는 부모님께 또 오시라면서 ‘10,000원 할인 쿠폰’까지 드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모습에 부모님께서 이 집을 싫어하실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그 주인에게 “어르신들에게 참 잘하시네요.”라고 말하자, 그 주인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선배님이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잘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점점 소외받고 있는 분들이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어른을 잘 모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 사회의 분위기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설 자리를 점점 줄어들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젊은이가 눈치 보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거꾸로 눈치를 보며, 어르신들이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그 가게를 어떻게 싫어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 가게가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가게가 많기에 이 가게가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가게를 나오면서 문득 주님께 대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보다는 나의 이익만을 먼저 추구하려는 모습을 취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어쩌다가 그 계명을 실천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면서 어떻게든 티를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도 이렇게 행동한 자신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보상이 내려지기를 은근히 기대하지요.

그러나 사랑의 계명 실천은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종처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그저 주시는 선물인 것이지, 잘한데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봉사하는 자에게 하늘 나라가 약속된 것이지, 자신의 선행 하나 하나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받으려는 자에게 하늘 나라는 멀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당장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이에 따라는 보상을 원하지 마십시오. 숨은 일도 지켜보시는 주님께서는 알아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조명연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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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야 할 일을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조건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 속에서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해주시려고 이러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조이 분부대로 하였다고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 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나의 마음이 흐트러질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말씀이 당연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쉽게 교만에 빠지는 '나'임을 나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해 놓고서도 내가 잘나서 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이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힘으로 한 것뿐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힘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해야 할 일을 내가 할 수 있었다면, 할 수 있었던 모든 조건이 나에게 마련되었음을 감사드릴 뿐입니다.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봉사할 마음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면, 봉사할 힘이 솟구쳤다면, 이 모두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생명과 복음과 계명 주셨네. 티끌인 나 무엇 드리리. 감사드릴 뿐이외다. 감사드릴 뿐이외다." (『가톨릭 성가』332번) 오늘도 감사로 시작하여 감사로 끝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서울대교구 홍성만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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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얼마 전 <신심 서적 100권 읽기>중에 선정한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 중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자신의 묘비에 썼던 성경 말씀입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1945년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질 때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엄청난 비극 앞에서도 의료진과 남은 사람들을 모아 사랑을 실천하며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부모로부터 조상 대대로 믿던 신도(神道)를 물려받았지만 나가이 다카시는 과학적 이성주의의 영향으로 신도(神道)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비과학적으로만 생각해온 종교에 눈을 뜨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지요. 특히 그 시기에 읽게 된 파스칼의「팡세」는 그리스도교로 입문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고, 중국과의 전쟁에 소집당한 후 그는 하느님을 찾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가사키로 돌아온 그는 영적인 갈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영세를 받고, 미도리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의대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방사선학을 가르치고, 그 당시 많았던 결핵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방사선과 씨름했던 13년의 세월은 나가이 다카시에게 방사선의 과다한 노출로 백혈병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합니다. 그는 아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1945년 8월 미군에 의해 발사된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순식간에 한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20만 인구 중 80%가 죽었고, 그 중에는 나가이 다카시의 사랑하는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자신도 원폭 피해자가 된 그 절망 속에서도 그는 의료진과 남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신앙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원폭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읽을 줄 알았던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을 큰 재앙으로 보고 분노하였을 때 그는, 특히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았던 나가시키의 우라카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의미를 2차 대전과 연루된 모든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쳐진, 하느님의 선택된 희생 제물, 곧 흠 없는 어린 양으로 해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자신도 많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백혈병을 앓았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충실한 종이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벗이라 부르시고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험난한 삶을 살면서도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인생을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죽기까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살았고, 죽어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며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 하는 삶으로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이런저런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겪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내 말을 따라 주기를 바라며 나를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는 자세로 산다면 우리 인생에서 대부분의 다툼과 어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작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섭섭해 하고, 지나치면 화를 내며 다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주위의 반응에 나를 맡기면 수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작은 것에 눈치를 살피고, 말 한 마디에 기뻐하거나 절망하여 우울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의 반응에 민감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는가에 내 삶을 맡겨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하는 겸손한 자세로 살아간다면 급변하는 주위 여건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삶을 사려면 인간의 반응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흔들림이 있을 수 없으며,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묘비명에 썼던 글과 오늘 복음말씀처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절망과 시련에서도 꿋꿋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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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인도에서 자선 활동을 막 시작하셨을 때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수녀님께서는 허기진 고아들을 위해 먹을 것을 얻으러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빵가게에 들어가셔서 이렇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는 데레사 수녀입니다. 이 길거리 모퉁이에 고아원을 새로 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배가 고픕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팔다 남은 빵이 있으면 좀 주십시오.”

그러나 빵집 주인은 욕지거리와 함께 수녀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힌두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고아가 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서 굳이 동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국인 여자에게 좋은 대접을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수녀님께서는 얼굴의 침을 닦으면서 물러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를 위해 침을 주셨으니,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무엇인가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에게 빵을 좀 주세요.”

수녀님께서 빵가게에 간 것은 아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의 얼굴이나 자존감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모욕을 당해도 당당하게 빵을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존심은 별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하셨던 것이지요.

중요한 사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실에 집중한다면 다른 부차적인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부차적인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종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이러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종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주인을 잘 보필하는 것뿐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받고, 또한 알아주지 않는다면서 억울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겸손함을 간직할 때 주인에게 충실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겸손한 종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 하나에 집중한다면 세상 안에서 어떤 어려움과 힘듦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이유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13일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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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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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가족을 위해 고생하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혈당과 혈압이 갑자기 오르면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 달 넘게 어머니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수발하셨는데,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의 자녀들이 병원비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시고 긴 병에 효자 없다며 씁쓸해하셨다.

어느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맏이인 나를 부르시더니 당신 간병하느라 아버지께서 고생하신다며 잘 챙겨드리라고 하셨다. 아버지 환갑 때 대충 지낸 터라 칠순은 서운하지 않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이 있으면 잔치를 하지 않는 거라며 완강히 거부하시는 통에 식구들끼리 식사만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처럼 무척 좋아하는 한편으로 자식들에게 폐를 많이 끼친다고 걱정하셨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했다.
혼자서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하긴 결혼 후 1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께 식사 한번 대접할 수가 없었다. 드시고 싶은 것을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동네에 있는 고기 뷔페 집에 가자고 하셨다. 큰맘 먹고 나선 것에 비하여 음식점은 초라했다.

딸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신 아버지는
가격도 저렴하고 먹고 싶은 것 다 골라 먹을 수 있어 좋다며 애써 흡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니는 당뇨와 백내장으로 앞을 잘 보지 못해 아버지가 갖다 드린 음식만 드셨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하는
외식에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땅히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인데 평소 왜 그렇게 해드리지 못했는지 후회스러웠다. 같이 있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자주 두 분을 모시고 좋아하는 영화도 보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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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심 (서울대교구 중림동 성당)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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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I Have a Dream"을 들었습니다.
1963년에 한 연설입니다.

그해에 저는 태어났습니다.
연설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을 하고 100년이 지났어도,
흑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100년이 지났어도,
흑인의 삶은 여전히 격리의 족쇄와 차별의 사슬로 인해 몹시 부자유스럽습니다.

100년이 지났어도,
흑인은 물질의 번영이라는 광대한 대양의 한가운데 있는 어느 한 고립된 빈곤의 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났어도,
흑인은 여전히 미국의 후미진 곳에서 고통 받고 있으며, 비록 자신들의 땅에 있지만 마치 유배자인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흑인은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버스에서 흑인은 자리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백인 전용의 자리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이동의 자유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여행의 피곤으로 몸이 무거울 때 고속도로의 모텔과 시내의 호텔에서 잠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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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그때는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실의 강령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 위에서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부정과 억압의 열기로 찌는 듯한 미시시피주 조차도 언젠가는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뀔 것이라는 꿈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정당한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법행위에 따른 범법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통과 증오의 잔에서 흘러내린 물로써 자유를 향한 우리의 갈증을 풀려고 하지 맙시다. 우리의 창조적인 저항이 육체적인 소동으로 타락하지 않게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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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꿈이 이루어질 때
미국은 진정으로 자유의 국가가 될 것이고, 미국은 진정으로 위대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유를 향한 꿈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성서의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 여성이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온지 54년이 되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선행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사목자도 많았지만 공동체에 아픔을 주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목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목자도 많았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사목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과 미국의 문화의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났던 모든 사목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특히 힘들고 어렵게 있다가 돌아간 사목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대부분의 공동체가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눈 덮인 길을 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오늘 걷는 발걸음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신앙 안에서 사제는 봉사자여야 하고,
성사를 집전해야 합니다. 봉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가장 큰 사명이고, 성사의 집전은 사제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미사와 고백성사를 정성껏 집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종이 주인을 위해서 일하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영광은 주님께로 돌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의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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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11월 10일
  | 11.10
528 74%
아는 신부들과 함께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올해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합석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 우리 일행 중의 한 명이 제일 어린 신부에게 “너 올해 몇 살이니?”라고 묻습니다. “올해 서른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러자 그 신부가 젊은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참 좋을 때다.”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어린 사람의 나이를 묻고 몇 살이라고 말하면 “참 좋은 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신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서른 살 때 정말로 좋았어?”

이 질문에 말을 흐립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좋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냥 막연하게 젊으면 ‘좋은 때’라고 생각할 뿐일 것입니다.

어쩌면 남의 시간을 막연히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60대에는 50대를 향해 ‘좋을 때’라며 부러워하고,
50대에는 40대를 향해 ‘좋을 때’라고 부러워합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이 시간을 부러워할 미래의 순간이 곧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금을 충실히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제일 좋을 때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종과 주인의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주인은 종에게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일을 시키며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종이 불평을 하고, 다시는 시킨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은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떠올려 보십시오.

종과 주인의 모습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일까요?
당연히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종의 모습에 부합하는지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종과 주인의 모습이 바뀐 것 같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고 요구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 가장 충실해야 할 시간임을 기억하면 불평불만보다는 자신이 할 일을 먼저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남의 자리를 탐내고, 남의 시간을 탐냅니다. 끊임없는 욕심과 이기심 안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종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종’인데도 불구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종을 주인은 어떻게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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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11월 10일
  | 11.10
528 74%
[서울] 자신감과 겸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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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시절 교수님들로부터 항상 들었던 말은

“사제가 되면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의 의견을 잘 경청할 수 있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제로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높아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듣곤 했습니다. 사제로서 자존감이 낮으면 오히려 피해의식을 갖게 되고 나아가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소 의아한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두 가지 의견 다 옳은 말인 것 같지만 자신감과 겸손은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제로서 생활 할수록 이것이 정반대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유학시절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그중 하나가 자신감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약,
다른 똑똑한 유럽 학생들 사이에서 외국어로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 ‘아, 나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구나,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저는 결코 공부를 마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들도 힘들겠지, 그래도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제가 겸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유럽권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장점을 충분히 인정했기에 저는 어쩌면 그들보다 더 성실히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지내며 깨달은 것은 올바른 자신감과 겸손함은 결국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 일종의 법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감을 가질 때 이것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신감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할 때 그 자신감의 근거가 주변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자신감이 아닌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특정 과제를 행할 때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음을 믿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자신감입니다. 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신감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법칙은,
겸손과 관련되어 있는데, 남을 나보다 더욱 높게 여기고 그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분명 누구든 내가 못하는 것들을 훨씬 잘 할 수 있는 장점 혹은 잠재력이 있습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나보다 나은 타인의 장점을 모두 인지할 때 자신감과 겸손을 고루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믿음과 타인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덕목을 모두 갖춘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인을 모시고 있는 종은, 주인의 분부를 받은 대로 행한 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 안에는
첫째, 내가 할 일을 했다는 스스로의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주인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 인정하는 겸손함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각별히 요구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이 분보다 우리는 결코 더 높아질 수도 없고 더욱 큰 권한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인 앞에서
더욱 겸손하되 해야 할 일을 성실히 그리고 자신감 있게 수행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수고를 그대로 인정해 주시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그것은 오늘 복음 환호송이 명확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군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하느님이라는
주인을 올바로 따르는 종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 즉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하며 자신감 있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종은 행복합니다.
주인은 그러한 종을 신뢰하며 더욱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인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증언하듯,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는 진정한 사랑을 전해주는 주인입니다.

이러한
무한한 구원의 은총이 일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찌 이 주인에게 충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우리의 주인이 돌보아 주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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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11월 10일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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