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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전주/청주] 주님을 믿고 받들며 살아야 한다
조회수 | 2,387
작성일 | 08.11.11
"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님께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이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당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 뜻을 잘 헤아려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진리와 정의를 따르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위험이 없는 범위 내에서만 행하려고 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한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어제의 원수와 화해할 수 있고 어떤 일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어야 사회에서 출세도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 믿음을 두어야 하는 문제만은 결코 이런 변신이 통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하느님을 모른 체하고 신자라는 것을 숨긴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받들며’ 살아가느냐(신앙)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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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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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교만

옛날, 불상을 지고 다니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이 당나귀는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잔뜩 교만해졌습니다. 이렇게 당나귀가 오만방자해지자, 주인은 당나귀에게서 불상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고 다니는 불상에게 절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교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이란 거짓에 속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당나귀는 속은 것입니다. 착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은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겸손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인정하는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 겸손을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루카복음 17장은 노예제도를 경험하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자칫 인권유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던 2천년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오늘 내용은 겸손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입니다 :

어떤 노예가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밥부터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인이 편안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 한다고 해서 주인은 그 종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종은 주인에게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2천년전,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소유물이이라면, 물건입니다. 노예는 사고파는 물건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예는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예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한 후,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이 식사를 하도록 먼저 시중을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노예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가 주인에게,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고 자신은 쓸모없는 종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종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노예로서의 당연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처신한 것입니다.

이 얘기를 통해 오늘 복음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고 초대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입니까?

우리인간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있는 9개의 행성 중 3번째 행성입니다. 9개의 행성을 거느린 태양이란 항성은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고,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과 비슷한 항성이 약 2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안에는 우리 은하계와 비슷한 은하수가 300억 개 이상 있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10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 찰라의 삶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먼지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우주적인 시간으로 보면, 우리 삶은 한순간 반짝하는 것보다 더 짧은 인생을 살고 갈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은 겸손해 질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본래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게 되면 우리는 조금 겸손해 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엄청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먼지만도 못한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서 무한히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인생을 기쁘게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신앙인들이, “하느님,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랑해 주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은 이유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참으로 성공적으로, 그리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비결은 바로 겸손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겸손의 은총을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권지호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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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참 나를 찾아서

슬기로운 사람은 내가 누구인가를 압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가 해야 할 바를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종은 종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주인은 주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주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 머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팔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 팔다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리가 뒤바뀌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혼란과 죽음이 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제 구실을 다하는 것을 수신(修身)이라 합니다. 자신을 바르게 한 사람이 비로소 재가(齋家) 즉 가정을 바르게 하고, 가정을 바르게 한 사람이 치국(治國) 즉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연후에 비로소 평천하(平天下)가 가능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참나(眞我)를 잃고 사는 사람입니다. 참 나를 잃고 망아(妄我)와 함께 높은 지위와 재산, 학식과 명예를 누린다한들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참나(眞我)를 찾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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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세상의 작은 예수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읽으면 그분의 헌신적인 노고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저는 가끔 ‘바오로 사도가 없었다면 교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일이 가능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에 끼친 영향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그의 서간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 시절의 교회도 ‘참 시끄러웠구나’ 싶은 것입니다. 세상살이 말 그대로 그렇고 그런 모양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갖출 덕목을 살펴보니까 말 그대로 품위가 넘치는 선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이 ‘세상에서 모독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1코린 14,40).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당당했던 예수님의 그 기품을 닮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대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섣부른 행동이나 언사가 하느님을 모독할 수 있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기에 대해서 절제된 삶과 신중한 행동을 통해 선행의 본보기가 되라고 오늘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명령을 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그분의 종입니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세상에서 또 하나의 작은 예수입니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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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에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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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작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하였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변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8년 11월 13일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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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게 섬겨라.” (루카 1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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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작가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4-7).”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주 삼라만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은 정말로 하루살이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지금까지 이룩한 학문과 예술의 성과를,

또 문화와 문명의 발전을 자신들의 업적으로 자랑하면서 한껏 교만해져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만물의 주님께서 주신 은총들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우리에게 중요하고 큰 은총은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4-5).”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 누가 당신 진노의 위력을, 누가 당신 노여움의 위세를 알겠습니까?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0-12).”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업적은 모두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교만한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고 겸손해지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이 말씀에 나오는 ‘종’은 신앙인들을 가리키지만,‘ 주인’은 주님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신앙인들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부려먹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또 신앙인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고마워하지도 않는 분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한 비유일 뿐입니다.

루카복음 12장에, 이 이야기와 대조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5-37).”

주님은 우리를 부려먹기만 하는 악덕 고용주가 아니라, 우리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우리 곁에서 시중을 드는 분입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섬겼으니 너희도 나를 섬겨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내가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섬겨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섬기는 모범을 보여 주셨으니, 신앙인들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서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생색 낼 일도 아니고, 잘난 척 할 일도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라고 ‘진심으로’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라는 말은,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종’이라는 뜻도 아니고, 또 실제로 쓸모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이고, 형제이고, ‘벗’입니다(요한 15,15). (우리가 하느님을, 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높이기 위한 호칭이고, 또 우리를 낮추기 위한 호칭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의 노예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성모님의 ‘응답’이 좋은 예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저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저도 원하기 때문에 종이 따르는 것처럼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종이어서 자유 의지가 하나도 없이 복종한 일이라면, 이 응답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겸손하게 당신을 낮추면서 당신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응답하셨고, 그래서 위대한 응답이 되었습니다.

정반대로,
하느님 앞에서 대단히 교만했던 사람은 헤로데입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1-23).”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내세우면서 잘난 체 하는 것은, 하늘 높이 세웠다가 결국 무너져버린 바벨탑을 쌓는 일처럼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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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11.07
528 74%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의 도전입니다. 자기 존재와 업적을 드러내는 것, 남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단순히 교만과 겸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의 바탕은 겸손입니다.
그분의 삶 전체가 겸손이었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주님의 이 말씀은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종이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는 종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종은 끝까지 종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은 결국 스스로 ‘종’이라는 자각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각으로 주님께 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충실한 종, 겸손한 종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해야 할 바를 다하고
“주님!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하고 말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삶과 환경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한없이 겸손하게 오신 주님! 허리를 굽혀 제자들 발을 손수 씻겨 주신 주님! 그분을 좀 더 닮아가게 되고, 좀 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어른이 읽는 동화,
생각하게 만드는 동화로 늘 감동을 주었던 정채봉님의 글에서도 우리는 겸손의 가치와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화>

주인공 바위는
다른 바위들과 함께 산골짜기에 조용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골짜기에 사람들이 나타나 바위들을 차에 실었습니다.
그 중에는 주인공 바위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위들이 돌 공장에 도착하자
조각가들이 나타나 바위를 하나씩 차지했습니다.

바위 하나는 설익은 조각가의 정에 의해
고스란히 돌 부스러기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서툰 솜씨 때문에 망가진 것입니다.

다른 바위 하나는 해태상이 되어 한 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바위를 붙든 조각가는
늘 생각에만 몰두할 뿐 좀처럼 연장을 손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묻자 그 조각가가 대답했습니다.
“서투른 내 솜씨로 이 바위를 못 쓰게 만드는 것 보다,
후일 더 나은 주인을 만나도록 그냥 두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주인공 바위는 뒤돌아서 가는
그 조각가의 그림자를 가슴속에 가만히 안아 들였습니다.
세월이 반 백년이나 흘렀습니다.
어느 날 눈에 총기가 서린 젊은 조각가가 나타나서
자기 스승 모습을 남기겠다며 주인공 바위 앞에 앉았습니다.

점차 돌조각들이 정에 의해
떨어져 나가면서 얼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은 오래전에 그냥 뒤돌아 갔던
바로 그 조각가의 얼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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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겸손은 진실과 사랑을 열매 맺습니다.
또한 사랑은 겸손을 통해서 그 참 가치가 드러나고, 겸손을 통해서 사랑은 더 안전하고 바르게 전달됩니다.

성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 덕택에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우리가 만나고 알고 사귀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순명이 주님을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하고 바르게 전해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겸손하셔서 티 나지 않게 우리를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안전하게 주님께로 안내하십니다.

겸손이 나를,
우리 가족들과 공동체를 주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그래서 겸손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하고 겸손이 우리를 참된 행복에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은 이 이치를 깨닫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하면 천하를 얻는 것이고,
교만하면 천하를 잃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는 구름을 꿰뚫고,
주님께 도달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진정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사정없이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자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는 사이에 자신이 올라가 있다면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잘 사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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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경훈모 신부
  |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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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종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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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置簿)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無償)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가 6,13; 마태 6,24)

인간이 하느님께
보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곧 빚이 아닌가? 그 빚을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당시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채권자의 종으로 귀속되는 이치만 봐도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착각을 경계로 삼아 예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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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11.07
528 74%
[청주]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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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잔뜩 해 놓고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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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20년 11월 10일
  | 11.10
528 74%
[전주] 겸손하게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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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복음 17장 7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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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주님이신 하느님에 대한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신앙인의 마음가짐과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비유 속의 주인은 표현만 보면,
인정도 없고 아주 차가운, 나쁜 주인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주기 위한 과장된 표현일 뿐입니다.

1)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2) 신앙생활은 주인을 위해서 종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3) 하느님의 명령(계명)들은 당신을 위해서 정해 놓으신 강제 규정들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당부이고 호소입니다.
4) 우리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느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십니다.
5)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쓸모없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우리 자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또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 말씀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감사’와 ‘겸손’입니다. 신앙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겸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뭔가 잘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난 체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에페소서 1장 3절-8ㄱ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계명들’도 당연히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명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은총과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베드로 1서 1장 3절-5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노예로서 주인을 위해서 하는 강제 노동이 아니라, 자녀로서 아버지로부터 상속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하는‘나의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상속 재산을 주시는 일은 ‘자비’입니다. 우리가 어떤 권한이나 권리로 요구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땅히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와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가르침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복음 12장 30절).”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루카 15, 29)
‘사랑 없이’ 억지로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고마워하라고, 또 일에 대한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리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는 생활입니다.

‘겸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겸손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하시니까 마지못해서 겉으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진정한 겸손도 아니고 낮춤도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를 낮춘다는 의식 없이 자기를 낮춥니다. 만일에 자기가 실천한 겸손을(낮춤을) 기억하고 있거나 의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라는 가르침은,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겉으로만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생색내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마라. 온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드리는 신앙생활을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겸손은 기쁨과 감사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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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11월 10일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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