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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반성과 감사
조회수 | 1,742
작성일 | 08.11.12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군대에서 고생 많이 했다는 얘기.군대에서 있었던 무용담. 군대에서 있었던 특별한 일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군대에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자기는 그것을 겪어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삼아 또는 적당히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삶의 양념이 되겠지만 지나치게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허풍일 뿐 아니라 현재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가여운 과거 안주(安住)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성실히 그리고 제대로 산 성숙한 사람이라면 지난날의 자기 잘못을 늘 성찰하고 개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과거를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한 때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으로 살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내가 전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그릇되고 헛된 것들에 빠져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현재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어리석지 않은 삶을 살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나 잘 못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며
신앙인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잘못을 하였는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일깨우시고 인도하셨고 구원하셨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나의 모든 허물과 죄는 성령을 통하여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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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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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도 나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 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어려운 영적인 선택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기가 일수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비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안달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 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옵니다. 그러기에,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지, 아닌지는 ‘그가 감사와 가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침 식사 때 먹은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의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구를 약간 기울어지게 만드셨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발육과 성숙을 체험하고, 죽음과 소멸도 체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같은 계절만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밥상의 반찬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바로 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있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나를 위해 몸 바쳤는지! 닭은 나를 위해 몇 마리 쯤 목숨을 바쳤을까요? 또 몇 마리의 소가, 몇 마리의 멸치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 20).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1월 14일
  |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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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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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현주소가감사의 현주소입니다.

신앙인에게 하느님을 향한 감사가 없다면 마치 생명이 없는 존재와 같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주님과 일치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넘치는 은총에도 무례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는 까닭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들이 있어야 할 곳은 오직 주님의 품뿐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실천이 진정한 치유입니다. 실천은 감사로이어집니다.

감사가 없는 우리 삶을 다시 반성하게 됩니다. 생명은 감사를 바탕으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떨어지는 단풍은 우리의 출발점이 하느님이심을 다시 가르쳐줍니다.

신앙의 출발점인 감사와 찬미로 다시 돌아갑시다. 감사와 찬미가 진정한 치유이며 정화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11월 14일
  | 11.14
528 74%
가장 환대받고
특급 서비스를 받아야 할
VIP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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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간들의 생각이나 계획, 결심이나 다짐은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주어진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기에, 결코 믿을 만 한 것이 못됩니다. 기분에 따라, 여건에 따라 크게 요동치고 뒤바뀝니다.

저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수도회 입회 때나 첫서원 때, 서품 때의 마음가짐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그 어떤 것이든 못할 게 없을 태세였습니다. 수도회를 위해, 청소년들을 위해 이 한 몸, 이 한 목숨 다 바치겠다고 혈서까지 쓸 정도였습니다.
그 계획, 그 결심들을 쭉 밀고 나갔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살아있는 성인(聖人)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만에 그 대단했던 각오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제 한 목숨, 제 한 영혼 부지하는 것만도 벅차, 허덕이고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은총을 입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의 모습도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합니다. 치유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태도는 정말이지 열렬했고 간절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을 한번 보십시오. 율법의 규정에 따라 그들은 민간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그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의 목소리가 예수님 귀에 닿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복음 17장 13절)

주님의 자비를 부르짖는 나병 환자들의 마음가짐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지긋지긋한 나병만 치유해주신다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봉헌하겠습니다. 주님의 둘도 없는 제자가 되어, 세상 끝날 때 까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은총을 입자마자,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의 결심과 다짐들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룰루랄라 하며,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오직 단 한명의 치유 받은 사람만이 돌아와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배은망덕한 아홉 명의 행실 앞에 ‘얼척’이 없으셨으며, 살짝 ‘빈정’이 상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복음 17장 17~18절)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주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신 무수하고 무한한 은혜 앞에 늘 감사와 찬양을 드린 한 명 쪽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폭포수 같은 사랑과 은총들은 까마득히 잊어먹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아홉 명 쪽입니까?

저희 살레시오회 복자(福者) 아르헨티나 출신 아르테미데 자티(Artemide Zatti) 수사님(1880~1951)의 생애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 젊은 사제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여 진 다리에서 왔다 갔다 하던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한 가지 청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모님, 부디 제 병을 낳게 도와주십시오. 만일 치유의 은총이 제게 주어진다면, 제 남은 생애를 가장 가련한 환우들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기도 덕분이었던지 자티 수사님은 기적적으로 치유가 됩니다. 치유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각자 갈 길을 갔던 아홉 명과는 달리, 자티 수사님은 남은 생애를 오로지 환우들을 위해 100퍼센트 봉헌했습니다.

환우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환우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의 고된 일과가 끝나면, 그 유명한 고물 자전거를 타고거동하기가 힘들어 병원으로 오지 못하는 환우들을 방문했습니다. 빽 없고 돈 없는 환우가 입원할 때 마다 자티 수사님은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크게 외쳤습니다.

“여기 가장 환대받고 특급 서비스를 받아야 할 VIP 손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11월 14일
  |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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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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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언론사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첨 이후의 삶을 조사해봤더니,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금을 받은 이후에 거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아주 행복하고 건실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복권 당첨금의 상당 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고나서도 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

결국,
육체적인 나병의 치유가 그들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죠.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 간절히 바랐던 것이 돈 자체였고 갑자기 행운의 돈이 생기자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병환자 아홉 사람도 육체의 치유를 통해 그들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 환자만 치유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께 감사드리고자 찾아와서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이제는 몸만이 아니라 나병환자로서 살았던 삶까지 치유를 받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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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회 서현승 신부
  | 11.10
528 74%
감사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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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나병환자 열 사람의 병을 고쳐주신 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 안에 나타나는 치유에 대한 온전한 감사와 하느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칭찬하시며 “나머지 아홉 사람은 다 어디 갔느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완전한 치유란
육체적 치유만이 아닌 심리적·영성적 치유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예수께
“선생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크게 소리친 나머지 아홉 사람은 되면 되고 아니면 그만인 태도는 아닌지, 혹은 다 나은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는지, 아니면 고맙긴 하지만 다른 바쁜 일이 생겨 미처 표현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는 또 하나의 믿음과 사랑의 고백이기에 이 태도는 영적으로 치유된 사랑의 사람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거듭나고 세례와 견진성사의 은혜를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쇄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분의 돌보심으로 사는 태도가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매일의 삶 안에 베푸시는 온갖 기적을 알아차릴 수 있는 민감함과 그것을 참으로 감사할 줄 아는 태도라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나는
몇 차례나 그분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과 기적에 감사기도를 드렸는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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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목자수녀회 변수운 수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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