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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일꾼의 기준
조회수 | 630
작성일 | 16.01.26
[인천] 일꾼의 기준

히틀러의 만행을 규탄하고 전 세계의 결속을 다짐하는 방송을 하기 위하여 처칠은 방송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거리에서 택시를 세운 그는,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운전수는 뒤통수를 긁으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어요.

“죄송합니다. 손님.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멀리는 갈 수 없습니다.”

처칠은 바쁘기도 했지만, 영업을 하지 않으려는 그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지요?”

운전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보통 때라면 어디까지라도 갑니다만, 오늘만은 안 됩니다. 한 시간 후부터 시작되는 윈스턴 처칠 경의 세계를 향한 방송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처칠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1파운드짜리 지폐를 꺼내서 운전사에게 건네주었지요. 그러자 운전사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만,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이 힘차게 말합니다.

“어서 타십시오, 손님, 처칠이고 뭐고 우선 돈부터 벌고 봐야 되겠습니다.”

물론 처칠은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려는 이 운전수가 마음에 들어서 1파운드짜리 지폐를 주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운전수는 ‘돈을 줄테니 빨리 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물질에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신의 신념까지도 과감하게 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신념이나 믿음까지도 버리면서 얻은 물질적인 것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을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꾼이 적다’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통 일꾼을 뽑을 때, 아무 사람이나 쉽게 뽑지 않습니다. 주인이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딱 맞는 사람을 일꾼으로 채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신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일꾼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요? 바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 기준을 알 수 있지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고말고....”

일꾼의 기준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우리들 가운데 ‘일꾼이 적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 안에 사람은 많을 지라도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고서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과연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나 역시 주님의 사명을 받아서 세상에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요? 괜히 얼굴이 붉어지게 하는 질문들이네요…….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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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중에서 ‘꾼’이라는 글자가 있지요. 모두들 아시겠지만, 어떤 일 특히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가리켜서 ‘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이 ‘꾼’이 된 것 같습니다. 어떤 ‘꾼’이냐고요? 물론 좋은 ‘꾼’도 많겠지만, 글쎄 저에게는 도저히 붙지 않을 것 같은 ‘술꾼’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주 한 잔에도 온 몸이 시뻘게지고 머리가 아파오는데 어떻게 술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제가 요즘 매일 술을 마시면서 살고 있습니다. 본당에 와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다보니 마시는 술의 양이 조금씩 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는 술과 담배 인심이 좋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왜 이렇게 술잔을 많이 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말하지요.

“저, 술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주지 마세요.”

그러면 그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 잔만 받으세요. 제가 딱 반잔만 드릴께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반잔의 의미가 있을까요? 한잔씩 5번을 받는 것과 반잔씩 10번 받는 것. 똑같겠지요.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반잔씩만 받으라고 하지만, 저로써는 너무나도 힘들어집니다.

아무튼 이런 생활을 한 달 정도 하다 보니 소주 두 세잔이었던 평소의 주량이 소주 한 병까지도 거뜬하게 마실 정도가 되었네요. 도저히 늘 것 같지 않았던 저의 주량이 매일 계속되는 술자리에 의해서 늘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주량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꾸준한 노력만 있으면 늘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술 마시는 것 같이 나쁜 것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 외의 많은 좋은 것들도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늘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력을 하지 않고 포기할 때가 참으로 많은 우리들의 나약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우리 신앙인들이 쉽게 포기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쑥스럽다는 이유로, 자기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선교사명을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이천년 전의 예수님 말씀이 요즘 더 이해가 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즉, 우리 모두가 수확할 일꾼인데 불구하고, 그 수확이라는 일을 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신앙인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교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선교 노력이 바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충실한 주님 제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앙인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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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당의 초, 중, 고등학생들은 내일 모두 스키 캠프를 떠납니다. 100여명이 되는 학생들이 함께 떠나는 우리 본당에서는 처음 있는 스키 캠프이지요. 사실 요즘에는 이 스키를 많이 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스키는 고급 운동처럼 여겨지는 만큼 아이들에게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이 캠프를 작년에 기획하여 차분히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의 스키캠프에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나오면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일미사와 교리를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면 성당 보조를 100%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신 3번까지 결석할 경우는 60% 지원을, 그 외는 10%의 지원만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서 결석했더라도, 평일미사와 성시간에 참석하면 그 결석을 메울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내세웠지요.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정말로 열심히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숫자도 늘었습니다. 평일미사와 성시간에 참석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른들도 흐뭇해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으로 아이들을 성당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당에 열심히 다니면 그만큼 좋은 일도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성당에 많이 모인다면, 이로써 성당이 지루한 곳만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리교사들이 제게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이 캠프를 위해서 열심히 홍보를 했고 벽에 출석부까지 붙이는 등 교우들에게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성당 보조를 받지 못해서 불공평하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가 성당에 나오지 않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이지요. 그리고 어린 교리교사들에게 성당에서 보조를 해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분명히 학기 초부터 열심히 성당에 나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 이제야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힘을 빼놓다니요. 그러면서 이러한 반성도 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하는가? 아니면 힘을 빼는 말을 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평화로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이 평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평화는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즉,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므로,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몇몇 분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힘이 되어주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요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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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제님께서 교통사고로 양 무릎이 손상되었습니다.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운이 좋으면 걸을 수가 있을 것이고, 이제 앞으로 달리기나 각종 스포츠는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님께서는 운동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헬스클럽에 곧바로 등록해서 재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은 언젠가는 정상인이 되어 달리기를 포함한 각종 스포츠를 즐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이 지난 뒤, 이 형제님께서는 뛸 수 있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스포츠를 맘껏 즐기고 계십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약 이 형제님께서 의사 선생님의 말씀만 듣고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이렇게 뛸 수 있었을까요? 칠십 대인데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게 농구를 즐기고 계신다는 어떤 할아버지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정말 우습지 뭐야. 마흔 살 때 의사는 농구 같은 격렬한 운동을 하면 무릎이 버텨내지 못할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계속 뛰어다녔지. 쉰 살이 되자 의사는 이런 식으로 달리고 뛰면 등이 망가질 거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지. 예순 살이 되자 몸이 따라가지 못할 거라고 하지 뭐야. 하지만 나는 젊은이 못지않게 뛰어다녔어. 일흔 살이 되니까 결국 마음대로 운동하라고 하더군.”

늙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닐까요? 생각만 젊다면 나이를 먹어도 몸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스스로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늙은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점점 많이 늘어나는 것만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사실 우리의 선교 사명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것만 보아도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없다고 또 기회가 아니라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으로 선교 사명을 아예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 없음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좌절과 절망으로 힘들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며 보내시며 말씀하시지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주님께서 하실 일이 많지만, 그 일을 함께 할 일꾼이 적다는 것이지요. 이는 곧 믿음을 갖고 희망차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적다는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과연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주님의 일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함을 기억하면서, 늙은 마음이 아닌 젊은 마음을 간직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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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렸을 때부터 믿어야 한다고 배운 것만 믿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부류의 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현명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일까요? 바로 마지막 부류의 사람인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부류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제일 꽉 막히고 무서운 사람 같습니다. 이제까지 본 책이 딱 한 권 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그 사람에게 진리란 자기가 본 유일한 책이 전부입니다. 그 책과 반하는 것은 무조건 거부할 수밖에 없기에 어떤 진리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두 번째 부류 역시 첫 번째 부류와 별 차이는 없지요. 자기가 학습한 내용 역시 한계가 있을 텐데,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다른 이들을 자기가 배운 생각의 잣대에 맞춰서만 판단할 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부류인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기에, 보다 더 객관적으로 진리에 다가설 수가 있으며 더불어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 역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해서는 강한 의지로 대응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 세 부류 중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지혜롭고 강한 의지를 갖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지혜롭고 강한 의지를 갖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제자들을 파견하는 오늘 복음 장면을 통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파견되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과연 불만이 없었을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는 스승님의 말씀에 서운한 감정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 말씀을 따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고 떠나지요. 왜냐하면 주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의지하는 일꾼처럼 주님께 온전히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제자들이 뛰어난 지혜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의지가 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파견되는 체험 등을 통해 강해졌고, 점점 더 주님을 마음으로 믿으면서 지혜와 의지가 커진 것이지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이해해서 철저하게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지 못할 정도로 세상일에 대한 관심을 모두 접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요? 세상일에 대한 관심을 모두 접으면서 주님께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었을까요?

진정으로 지혜롭고 의지가 강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1월 26일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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